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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경준 Mar 05. 2020

태초에 인큐베이터가 있었다

다시 2014년으로 돌아가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액셀러레이터로 등장한 분들이 나는 솔직히 부러웠다. 액셀러레이터라는 신조어를 쓰지 않았을 뿐 액셀러레이터가 하는 일은 실제로 내가 지금까지 쭉 해오던 일이었고 적지 않은 성과도 가지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나를 몰랐다. 정확히는 ‘대중(大衆)’이 나를 몰랐다. 


나는 1999년 대학을 졸업한 직후 바로 창업을 했고 기회가 있어서 1년만에 회사를 매각했다. 그 때는 몰랐는데 그게 엑싯(exit)이었다. 아무 것도 없이 창업한 29세의 청년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정도는 못 되었지만 생전 처음 만져보는 큰 돈을 벌었다. 그렇게 회사를 매각하고 6개월쯤 쉬었다가 다시 창업을 준비하고 있는데 알고 지내던 분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벤처 인큐베이팅(venture incubating)’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해본 적이 없는 일인데 내가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내가 지금껏 해온 일을 그대로 하면 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 창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창업을 하고 투자를 유치하고 직원을 뽑고 제품과 서비스를 개발하고 영업을 해서 매출을 일으키는 창업의 전 과정을 가이드하고 필요한 지원을 해주는 게 인큐베이팅인데 내가 지금까지 해온 걸 지켜보니 잘 할 것 같아서 추천한다는 것이다. 나는 아무 것도 없이 창업을 했고 사업계획만으로 투자금을 모았다. 사업경험은 전무했고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맨땅에 헤딩하듯 창업을 했고 모든 걸 몸으로 부딪히면서 직접 배워야했다. 내가 직접 겪으며 배운 것을 그대로 가르쳐주는 것인데 생각해보니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인큐베이터의 세계에 발을 디뎠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지금 우리가 액셀러레이터라고 부르는 영역이 이전에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찾아보니 그 당시 상황을 설명해줄 수 있는 기록이 남아있었다. 대한민국 벤처업계의 산 증인 고(故) 이민화 회장님의 2012년 전자신문 인터뷰 일부를 옮겨본다. 



인큐베이팅도 당시(2000년) 벤처 붐과 함께 일반화한 단어다. 예비 벤처기업이 설립해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업무 공간과 연구실·장비 등 하드웨어는 물론이고 자금·사람·기술·마케팅·경영컨설팅 등 소프트웨어 부분을 지원했다. 당시 벤처 인큐베이팅 관련 업체가 600여개에 육박한 것으로 추정한다. 정부 참여도 활발했다. 사무공간을 제공하면서 일정한 보육기간을 정해서 지원하는 하드웨어 인큐베이팅은 산업자원부·과학기술부·정보통신부·중소기업청이 운영하는 곳이 대학을 중심으로 수백개에 달했다.
 
 여기에 경영컨설팅·마케팅·홍보 등 넓은 의미의 소프트웨어 인큐베이팅업체로 분류되는 업체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단순 경영컨설팅업체부터 벤처기업 홍보와 마케팅 대행사, 온라인 벤처 인큐베이팅업체, 해외 벤처비즈니스 지원업체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창업에서부터 기업공개(IPO)까지 모든 것을 지원하는 원스톱 인큐베이팅업체도 우후죽순으로 출현했을 정도다. 벤처 붐과 함께 기존에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비즈니스가 나타났고 이는 상당한 규모의 일자리 창출로 이어졌다.
 
 벤처투자도 각광을 받았다. 엔젤이 득세하고 벤처캐피털도 확실한 금융 영역으로 자리 잡았다. 그동안 고수익에 한계를 보였던 벤처캐피털은 연이어 대박을 터뜨리며 두각을 나타냈다. 코스닥 활성화로 투자회수기간이 짧아지고 수익률이 급등한 결과다. 단기간에 높은 수익을 창출하자 벤처캐피털에 투자하고자 하는 민간업체와 기관이 줄을 섰다. 심지어 벤처캐피털 설립에 나서는 기업도 크게 늘었다. 1999년 5월 70여 개사에 머물던 벤처캐피털 수는 2000년 100개를 돌파했고 반년이 지난 후에는 150개를 넘어섰다.



어떤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의 상황이 지금과 매우 유사하지 않은가. 지금은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팅’이라고 부르는 것을 저 당시에는 ‘벤처 인큐베이팅’이라고 불렀다는 것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심지어 인큐베이팅 업체들이 제공하던 서비스들은 지금보다 오히려 더 디테일하기까지 했다. 앞의 글에서 이 작은 나라에 액셀러레이터가 200개도 더 된다는 걸 우려했는데 이민화 회장의 추정으로는 이 당시에 인큐베이터가 600여 개였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지금 저 역사(history)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왜일까. 너무 빨리 사라졌기 때문이다. 


벤처 붐을 타고 국내에 인큐베이터가 처음 생겨난 건 1998년이다. 이 때도 지금처럼 실리콘밸리에서 유행이 시작된 모델을 국내에 들여온 것이었다. 내가 이 업을 시작한 건 2000년이다. 2002년에는 당시 국내 최고의 벤처캐피탈이었던 KTB네트워크가 50억원을 공동 출자해 KTB인큐베이팅을 설립하면서 뒤늦게 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벤처 경영지원 'KTB인큐베이팅' 출범

KTB네트워크는 6일 ㈜한화, 미국의 컴팩, 벤처인큐베이팅회사인 테크팜, 벤처투자업체인 실리콘밸리뱅크스 등과 50억원을 공동출자, KTB인큐베이팅㈜을 설립했다고 6일 발표했다. 6일부터 업무를 시작하는 KTB인큐베이팅은 서울 대치동 다봉빌딩에 5개층, 1천3백여평 규모의 벤처기업 보육센터를 마련, 초기 벤처들을 입주시켜 각종 경영지원을 할 예정이다. KTB네트워크는 이 보육센터에 이미 8개의 벤처기업을 입주시켰으며 연말까지 입주기업을 30여개사로 늘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KTB인큐베이팅의 송낙경 사장은 "보육센터 운영 이외에도 테크팜, 실리콘밸리뱅크스 등이 미국에 갖고 있는 네트워크를 이용, 벤처기업들의 해외 진출을 적극 도울 계획"이라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2002년 2월 23일 중앙일보 안승섭기자



인터넷 열풍을 타고 1990년대 후반부터 불어닥치기 시작한 벤처창업 붐은 1999년과 2000년 상반기 정점을 찍고 2000년 하반기부터 빠르게 냉각되기 시작했다. 정치권이 연루된 수 천억 규모의 대형 벤처 비리가 연속으로 터지면서 ‘인터넷’ 이라는 단어만 붙어도 수 억에서 수 천억이 몰리던 묻지마 투자 광풍이 꺼지기 시작한 것이다. 황금알을 낳아줄 것 같았던 인터넷 벤처들이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한 것도 크게 작용했다. 심지어 네이버도 이 때는 수익모델이 없었다.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엄청난 자금이 공중으로 증발된 후였다. 떼돈을 벌 수 있다는 환상에 떴다방처럼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인큐베이터들도 빠르게 사라졌다. 이 당시에 만났던 인큐베이터 한 곳이 기억난다. 딱 봐도 찜질방에서 지내면서 옷도 제대로 못 갈아입는 형편 같은데 모 벤처캐피탈로부터 수 십억을 받아줄 수 있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테이블 아래에서는 버짐이 핀 종아리를 벅벅 긁던 게 아직도 선명하다. 테헤란로에 떴다방처럼 넘쳐나던 인큐베이팅 업체들이 불과 2~3년만에 모두 사라졌다. 화려하게 출발한 KTB인큐베이팅도 1년만에 내부사정으로 문들 닫았다. 대한민국 벤처 역사의 한 대목을 장식했던 이런 내용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 바닥을 다 떠났기 때문이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이 업을 계속 하고 있는 사람은 내가 유일한 것 같다. 적어도 내가 아는 선에서는. 그런 이유에서 대한민국 창업생태계에서 인큐베이터와 액셀러레이터가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말해줄 수 있다는 것에 나는 자부심을 느낀다. 이런 내용을 아는 사람들이 그래서 나를 액셀러레이팅 업계의 ‘시조새’ 혹은 ‘화석’으로 부른다. 어려움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업에 대한 확신이 있어서 죽지 않고 가늘고 길게 버텼더니 이제는 그런 소리도 듣나 싶다. 확신이 있으면 한우물을 파는 게 그래서 중요하다. 20년이라는 시간은 거슬러 올라갈 수 없기 때문에 나에게는 참으로 명예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액셀러레이터가 하나의 독립된 분야로 인정받고 있지만 당시의 인큐베이터들은 그럴 새도 없이 너무 빨리 사라져버렸다. 한참 붐을 이룰 때에도 인큐베이터라고 말하는 다수의 업체가 벤처캐피탈에 업체를 소개하고 소개한 업체가 투자를 받으면 업체로부터 커미션을 받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브로커 취급을 받았다. 브로커 비즈니스가 그 자체로 나쁜 건 아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부정적인 인식이 있었다. 게다가 당시는 벤처캐피탈이 절대적인 ‘갑’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인큐베이터라고 주장해도 그들 입장에서는 업체를 소개해주는 브로커일 뿐이었다. 지금이야 액셀러레이터가 벤처캐피탈에 업체를 추천하면 내부 투자심의위원회에 딜 소싱 출처를 밝히는 게 자연스럽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담당 투자심사역들도 자기가 이 업체를 발굴했다고 해야 소위 가오가 서는 때였으니 말이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하면, 당시 메이저 벤처캐피탈 중 하나였던 D창투의 모 팀장과 인연이 되어 심혈을 기울여 발굴한 업체 두 개를 소개한 적이 있었다. 그 팀장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고 두 업체 모두 나중에 코스닥에 상장되면서 벤처캐피탈과 담당 팀장에게 상당한 수익과 명성을 안겨줬지만 나를 은근히 하대하는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2016년 어느 날 그 팀장에게 전화가 왔다. 이미 다른 메이저 벤처캐피탈로 이직하면서 임원이 되어있었는데 실체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누군가 내 레퍼런스 체크를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업체 두 개를 추천받아 투자를 했는데 두 개 모두 상장됐다고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과거에 자기가 나를 대하는 방식이 잘못되었던 것 같다며 사과를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나는 훌륭한 분들이 액셀러레이터로 창업생태계에 들어와 주신 것이 참 좋다. 이 업에 대한 인식을 바꿔주었으니 말이다. 


벤처 붐이 꺼진 후 2000년대는 소위 ‘벤처 암흑기’였다. 창업을 하는 것 자체가 죄악시되고 정부가 창업 억제 정책을 펴던 시기도 있었다. 그리고 나와 같은 업을 하던 사람들은 거의 다 사라졌다. 그렇다 보니 어디 가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웠다. 지금이야 ‘액셀러레이팅한다’고 하면 창업 바닥에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지만 당시에는 벤처 인큐베이팅한다고 말해도 사람들이 잘 이해를 못했다. 좋은 면도 있었다. 이 업을 하는 사람이 나 밖에 없다 보니 좋은 기회가 정말 많았다. 내가 하는 일을 이해시키는 게 어려웠지만 그 허들만 넘으면 좋은 기업들을 주워담을 수 있었다. 결국 내가 발굴해 코스닥 상장까지 성공한 10여 개의 기업들이 대부분 이 시기에 나왔다. 


그렇다면 만약 2000년대 벤처 암흑기가 없었다면 인큐베이터는 지금의 액셀러레이터처럼 활성화 되었을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렇지 않았을 거라 본다. 이유는 전문성에 있다. 당시 인큐베이터들은 스타트업(그 당시 용어로는 벤처)을 육성할 수 있는 전문성이 없었다. 그나마 전문성을 가진 곳들도 컨설팅으로 접근했다. 넓게 보면 인큐베이팅이나 액셀러레이팅도 컨설팅의 영역인 건 맞다. 그러나 이 분야는 세계 최고의 컨설팅 회사인 맥킨지마저도 무릎꿇게 한 매우 고난이도의 영역이다. 1990년대 후반 맥킨지는 스타트업에 기회가 있다고 보고 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스타트업에게 컨설팅 비용을 받지 않는 대신 경영에 참여하여 수익을 공유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스타트업들은 환영했다. 맥킨지는 컨설팅 전문가인 자신들이 직접 경영에 참여하면 기업을 훨씬 더 키워 컨설팅 비용 이상의 수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결과는 어땠을까. 불과 3년만에 맥킨지는 수 백만 달러의 손실을 보고 이 시장을 떠났다. 세계 최고의 두뇌집단이라고 불리는 맥킨지가 왜 실패했을까. 일부에서는 맥킨지의 자신감이 지나쳤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있는데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스타트업을 직접 해보지 않은 사람은 스타트업을 키울 수 없다. 생각하는 방식, 일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창업을 직접 해보지 않고서는 창업가의 마음을 읽을 수도 없다. 최악의 상황과 최소한의 자원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는 접근법과 미친 실행력도 만들어낼 수 없다. 심지어 창업 경험이 있더라도 현장에서 손을 뗀지 너무 오래 되어도 감이 떨어져서 어렵다. 창업을 해보지 않고 이 일을 하겠다면 어떤 형태로든 10년 정도는 스타트업을 지원하는 일을 해본 후 할 수 있는 일이다. 


같은 이유로 오늘날의 액셀러레이터들은 과거의 인큐베이터들보다 훨씬 더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 이들이 창업을 경험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창업가를 인도하기 가장 좋은 사람은 창업 선배들이다. 스타트업에게 추천하고 싶은 것은 현역(직접 창업)으로 뛰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액셀러레이팅을 받지 말라는 것이다. 굳이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아도 겪어본 스타트업들은 이미 그 이유를 알고 있을 것이다. 창업은 전쟁이고 생존을 위한 치열한 사투다.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출전(出戰)을 준비하는 군인을 훈련시킬 수 있겠는가. 화려한 승전(勝戰) 경력이 없어도 좋다. 그러나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를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 몸 어딘가에 칼자국 하나 없는 사람을 인도자로 삼는 것은 죽을 확률을 스스로 높이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대한민국에는 지금 두 번째 창업 열풍이 불고 있다. 90년대 후반의 창업 열풍은 인큐베이터라는 업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열풍이 사라지면서 전문성을 채 확보하지 못했던 인큐베이터들은 빠르게 사라졌다. 20년이 지나서 두 번째 창업 열풍이 불고 있다. 이번 열풍은 지난 번과 달리 10년째 이어지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최소 10년은 지속될 거라 본다. 이 열풍이 액셀러레이터를 탄생시켰다. 앞으로의 창업생태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주체는 명실상부하게 액셀러레이터가 될 것이다. 


이제는 액셀러레이터가 좋은 스타트업을 발굴(sourcing/scouting)하는 창구라는 것이 검증되면서 최근에는 벤처캐피탈도 액셀러레이터를 자회사로 설립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조심스러운 얘기지만 벤처캐피탈이 설립하는 액셀러레이터는 성공 가능성이 그다지 높지 않다고 본다. 액셀러레이터는 창업 경험이 있는 멤버들이 중심이 돼서 창업가의 눈높이와 마인드로 접근해야 하는데 벤처캐피탈의 자회사가 되는 구조에서 그게 과연 쉬울까 싶다. 자회사 방식보다는 실력 있는 액셀러레이터와 합리적인 방식으로 전략적 관계를 설정하는 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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