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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지윤 Aug 14. 2022

천사들이 사는 도서관

도서관이라는 공간

학교도서관에서 일하던 시절, 방과 후마다 책을 읽으러 오는 아이가 있었다. 이제는 얼굴도 가물거리는 그 아이는 학원 차량이 올 때까지 도서관 소파에 편하게 늘어져 자그마한 손바닥에 쏙 들어가는 크기의 얇은 책을 즐겨 읽곤 했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파는, ‘오싹오싹 공포체험’이나 ‘특급 공포체험’ 따위의 제목을 단 괴담집이었다. 내가 어릴 적에도 그런 괴담집을 사서 친구들과 돌려보곤 했으니, 초등학교 문방구에서 파는 다양한 오락거리들은 유행을 타지 않는 법인가 보다. 도서관 서가에 가지런히 진열된 책에는 아랑곳없이 아이는 늘 괴담집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어느 오후, 아이는 어김없이 도서관에 오자마자 네모난 책가방과 실내화 주머니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뒤 괴담집을 꺼내 정신없이 읽고 있었다. 평소 인사 외에는 별말이 없던 아이가 불쑥 입을 열었다.


“선생님, 학교에서 가장 유령이 많은 곳이 도서관이래요.”


종일 비가 내려 창밖으로 보이는 운동장은 텅 비어 있었다. 복도를 오가는 이도 없었다. 도서관에는 아이와 나뿐이었고 빗줄기는 갈수록 거세지는 모양새였다. 느닷없는 아이의 말에 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장난이라고 넘기기엔 그 작은 표정이 너무 진지했던 데다 나는 초자연적 현상에 유독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아마 아이가 읽던 괴담집에 그런 이야기가 나온 모양이었다. 


“그런가?” 


나는 평정을 가장하며 웃어넘겼다. 학원 갈 시간이 됐다며 아이는 가버렸고 남은 오후 동안 아무도 찾는 이 없는 도서관에서 나는 아이의 한 마디에 풀려난 어떤 망상과 맞서 싸워야 했다. 그날 이후 도서관에 혼자 있을 때마다 서가 어딘가에서 정체 모를 툭, 이라든가 탁, 이라든가 끼익, 같은 소리가 갑자기 들려오면 나는 팔뚝에 돋아나는 소름을 진정시키려 애쓰곤 했다. 텅 빈 서가와 서가 사이에 어쩌면 유령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한동안 날 오싹하게 만들었는데, 아이가 의도치 않게 씌워준 공포의 안경을 가까스로 벗게 된 건 오래된 한 영화를 보고 난 뒤였다.     


영화 「시티 오브 엔젤」에는 제목 그대로 천사들이 사는 도시가 나온다. 물론 이 천사들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도시 어느 곳에든 있었다. 차들이 지나는 도로의 이정표 위나 비행기의 이륙과 착륙을 관장하는 공항 관제 센터나 초고층빌딩의 꼭대기, 또는 석양이 지는 해변에서 세상에 펼쳐지는 다양한 장면을 감상하는 관조자처럼 존재한다. 천사들은 인간의 삶 자체에 다정한 호기심을 보이기도 한다. 아이의 탄생에 기뻐하는 한 여자의 생각을 읽고 미소 짓거나 걱정으로 가득한 어느 남자의 속마음을 듣고 연민의 표정을 내비치기도 한다. 인간의 생각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감정을 들여다보면서 천사들은 도시를 공기처럼 떠돈다.

영화 속 천사들은 죽음이 가까워온 사람 앞에만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의 역할은 몸을 떠난 영혼이 어디로 가야 할지 인도해주는 메신저. 어느 누구든 세상을 떠나는 일은 처음이니까, 그런 천사들이 존재한다면 삶이 끝나는 순간이 막연히 두렵지 만은 않을 것 같다. 그래서일까. 자그마한 몸에서 떨어져 나온 한 여자아이는 산소 호흡기를 찬 채 숨을 거둔 자신과 오열하는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담담하다. 아이 곁에는 그녀를 마중 온 천사 ‘세스’가 있다. 따스한 눈빛의 그 손을 붙잡고 아이는 명랑하게 따라나선다.


「시티 오브 엔젤」은 천사 세스와 인간 매기의 사랑에 초점을 맞춘 로맨스물이지만 사서의 시각에서는 고마운 영화이기도 하다. 도서관이라는 공간을 평화롭고 신성한 공간으로 그려주었으니까. 그가 천사일 거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한 채 우연처럼 자신의 주변을 떠도는 세스에게 호감을 느끼던 매기(천사는 자신이 원하는 사람 앞에서는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고).

어느 날 매기는 책을 반납하러 도서관에 갔다가 세스와 딱 마주친다. 도서관에 자주 오냐는 그녀의 질문에 세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여기서 살죠.”     


그리고는 어디선가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 천사들이 서가 사이 곳곳에 서서 두 사람의 모습을 호기심 가득한 고갯짓으로 바라본다. 세스, 그러니까 영화 속 천사들이 사는 곳이 바로 도서관이었던 것.     


지상에서 지낼 안식처로써 천사들이 도서관을 고른 건 어쩌면 당연한 이치인 듯하다. 생각의 속도로 이동하고 사람의 마음을 읽으며 영원을 사는 천사들. 세상이 자아내는 온갖 소음과 끊임없이 지저귀는 새소리처럼 귓가에 맴도는 사람들의 거침없는 생각들로부터 천사들이 잠시나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을 도시에서 찾기란 쉽지 않았을 터. 그런데 도서관에 떠도는 소음이라곤 책장 넘기는 소리나 조심스러운 걸음 소리나 이따금 들려오는 재채기, 또는 대출되거나 반납되는 책이 서가를 오가는 소리뿐이다. 도서관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사람들은 일상의 거친 생각들은 잠시 잊은 채 작가들이 영원히 박제해놓은 생각들을 읽느라 여념이 없다.

하나둘 천사들은 책 읽는 사람들 뒤로 다가가 그들이 생각으로 읽어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천사들에게 있어서 도서관에 온 사람들은 개개인이 한 권의 오디오북인 셈이다. 열람석 가장자리에 앉은 사람의 머릿속에는 끝없이 펼쳐진 오솔길을 걷는 순례자의 여정이 펼쳐지고, 그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무한한 우주 공간을 떠도는 여행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건너편 자리에서 심각한 표정을 한 학생은 수학 문제 풀이를 머릿속으로 설명해주고, 구석 소파에 편하게 등을 기대고 앉은 아이는 이제 막 벽장 세계의 문을 열었다. 다양한 목소리로 울려 퍼지는 오디오북을 들으며 천사들은 도서관에서 휴식을 취한다. 게다가 서가에는 이따금 반가운 이들의 이름이 보인다. 한때 천사들이 메신저로서 만났을 고인이 된 작가들. 시간이 흐를수록 서가에는 천사들에게 익숙한 이름들이 점점 늘어가고 어느새 도서관은 그들에게 기억의 장소가 된다.   


영화에서 천사들이 사는 곳이 도서관이었던 걸 보면 감독에게 평소 그 공간은 천사가 쉬려고 모여들 만큼 평화로운 곳, 그리고 그 불멸의 존재들이 안심하고 지낼 수 있을 만큼 지상에서 사라질 염려가 거의 없는 장소로 인식되었던 게 아닐까. 천사들뿐만이 아니다.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난 누군가의 생각도 고스란히 보관되고 있는 곳이 바로 도서관이니까. 도서관은 유령이 출몰하는 오래되고 으스스한 공간이 아니라 영원한 것들의 평온한 안식처인 셈이다.

그러고 보면 도심 속에 위치한 몇몇 숙박시설들은 이러한 감독의 상상을 어느 정도 실현해낸 듯하다. 일본 도쿄의 중심가에 위치한 숙박시설 ‘북 앤 베드’에서는 여행자들이 서가 속에 마련된 침대에 짐을 푼다. 도서관으로 꾸며진 공간이기에 주변은 온통 책들로 가득하다. 여행자들은 마치 도서관 이용객인 것처럼 서가를 둘러보고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소파에 앉는다. 그러다 도시에 어둠이 찾아오면 마치 자신이 책이라도 되는 양 서가 사이로 쏙 들어가 눕는다.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서가 속 책들은 할 말을 잃은 듯한 표정이다. 서가에 들어가면 아무리 수다스러운 여행자라도 책처럼 과묵해지고 공간이 발산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된다.     


종이를 보고 만지며, 종이를 넘길 때 나는 사각대고 바스락대는 소리에 귀를 바싹 세우고, 책등을 꺾을 때 나는 섬뜩한 소리에도 귀를 기울인다. 또 책꽂이의 나무 냄새, 가죽 장정의 은근한 곰팡내, 색을 잃어가는 문고본의 아릿한 냄새까지 맡고 나서야 나는 편히 잠잘 수 있다.
-알베르토 망겔, 《밤의 도서관》 중에서  

     

여행자들은 “밤의 도서관”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냄새에 점점 떠밀려 자기도 모르게 잠으로 가는 문을 스르르 통과한다. 잠든 이들의 머릿속에는 꿈이라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그 순간 도서관은 또다시 천사들의 신나는 독서 공간이 된다.


아무리 털어내도 끈질기게 생겨나는 서가의 먼지처럼 도서관 곳곳에는 유령이 둥둥 떠다니고 있을 거라는 괴담에 맞서, 사서로서 문방구 책 저자들에게 이 영화를 권하며 말하고 싶다. 낮이든 밤이든 도서관에 유령 따위는 없다고. 천사들도 매력을 느낄 만큼 세상의 무수한 이야기를 품은 책들이 조용히 서가를 지키고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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