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밥상
“나 죽고 나믄 어떻게 해 묵고 살래? 걱정이다, 걱정이여.”
엄마는 오징어국에 넣을 무를 숭숭 썰며 오늘도 걱정이 한가득이다. 옛날이었으면 진작 제 가정을 꾸리고 아이 서넛은 거뜬히 낳고도 남았을 나이의 자식들이, 여전히 엄마의 둥지 안에서 새끼새마냥 입을 쩍쩍 벌린 채 떠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새들은 비상을 위해 일부러 새끼새를 둥지 밖으로 밀어내기도 한다지만, 천성이 모질지 못한 엄마는 그러지도 못하고 그저 부엌에서 한숨만 푹푹 내쉴 뿐이다. 입으로는 쉴 새 없이 잔소리를 쏟아내면서도, 두 손은 부지런히 오징어 내장을 제거하고 취사가 완료되었다고 말하는 밥솥을 열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잡곡밥을 주걱으로 휙휙 뒤집고 물기를 짜낸 오이장아찌에 고춧가루와 참기름과 깨소금을 슥슥 뿌려 맛깔나게 무쳐낸다.
새벽이면 엄마는 출근하는 자식들의 아침 밥상을 차려내기 위해 그들보다 일찍 방문을 나선다. 개수대와 조리대와 가스레인지가 있는 부엌으로. 엄마가 분주하게 아침을 준비하는 동안 우리 삼형제는 늘어지게 하품이나 하면서 헬스보충제를 물에 타 흔들어 마시거나 욕실로 들어가 벅벅 머리를 감거나 한가로이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은 채 미야모토 테루의 소설을 펼쳐 든다. 엄마가 끓이고 볶고 무치며 퍼트리는 음식 냄새야말로 프랑스 정식 만찬 코스의 오르되브르처럼 자식들의 식욕을 돋운다. 방문을 꼭 닫은 채 책에 열중하다가도 문틈으로 슬슬 그 냄새가 흘러 들어오면 난 푸아그라나 송이버섯을 먹은 것처럼 침샘이 흥건해지고 내 뱃속에 엄연히 위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꼬르륵 소리를 통해 인식한다. 급기야는 중화소바로 자꾸만 나를 붙잡으려는 고헤(미야모토 테루 소설 ≪등대≫에서 중화소바집을 운영하는 인물)를 뿌리치고 책을 덮은 채 방문을 나선다.
전라도 광주에서 태어나 절반 이상의 세월을 그곳에서 보낸 엄마는 외할머니에게서 남도의 손맛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식재료일지라도 엄마의 손을 거치면 오감을 자극하는 맛의 옷을 걸친 음식이 되어 식탁에 오른다.
아파트 텃밭에서 뚝뚝 뜯어온 상추는 여기저기 벌레도 먹은 데다 덜 자란 듯 잎의 크기도 보잘것없지만, 엄마의 두툼한 손길만으로 식탁 위에서 삼형제의 젓가락이 끊이지 않는 반찬으로 탈바꿈한다. 깨끗이 씻은 상추를 양푼에 담고 간장과 고춧가루와 다진 마늘과 참기름을 넣어 서벅서벅 무치다가 깨소금을 살살 뿌려주면 완성되는, 별다른 비법이라곤 없는 레시피인데. 고춧가루와 간장에 버무려져 조금은 칙칙해진 푸른빛 상추를 집어 수북하게 푼 밥숟갈 위에 올리고 입으로 가져가면 고소한 참기름 향이 침샘에 식욕이라는 커다란 돌덩이를 던진다. 입안 곳곳으로 파문을 일으키듯 퍼지는 침을 꼴깍 삼킨 채 입을 쩍 벌려 숟가락을 넣는 순간, 향은 맛으로 뒤바뀌어 미친 듯이 침샘을 펌프질하고 씹을 때마다 아삭아삭 몸부림치는 상추의 식감은 경쾌한 소리가 되어 고막을 울린다. 소박한 상추 겉절이 하나만으로도 엄마는 우리가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게 만들어 버린다.
지금은 다이어트를 한답시고 고기 위주의 식단을 고집하고 있지만, 원래 나는 채소를 훨씬 좋아하는 사람이다. 어릴 적부터 엄마가 텃밭에서 갓 딴 채소로 만들어 주는 반찬을 즐겨 먹고 자라서일까. 말캉하거나 쫄깃한 고기보다는 채소의 아삭하고 질긴 식감을 선호하는 입맛이 되었다. 기억을 떠올려 보면 어릴 적 밥상에는 제철 채소로 만든 반찬들이 한두 가지는 꼭 있었다. 냉이나물, 봄동무침, 고춧잎무침, 머윗대들깨찜, 고구마줄기무침 등등. 고기반찬이 나오면 거기만 공략하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어린 나는 채소 반찬이 담긴 보시기 하나만 있으면 얼마든지 밥그릇을 깨끗하게 비울 자신이 있었다.
불과 최근까지만 해도 엄마가 해주는 반찬을 일상의 맛으로 여긴 채 별 감흥 없이 먹어오다가 식단을 고기로 바꾸고 내가 먹을 음식을 직접 만들다 보니 부엌에서 분주히 생겨나는 냄새에 민감해졌다. 오늘 엄마의 밥상에는 어떤 채소 반찬이 오를까. 맛은 못 보더라도 얼마든지 눈과 코만으로도 그 맛을 즐길 수 있다고 자부하면서, 나는 아침마다 밥상을 기웃거렸다. 나물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콩나물을, 엄마가 보란 듯이 양념을 아끼지 않고 팍팍 넣어 새빨갛게 무쳐냈을 때 나는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는 것처럼 평온하게 지켜봤다. 이래도 맛보지 않겠냐는 듯 요염하게 몸을 구부린 꽈리고추와 녹녹하고 뽀얀 속살을 뽐내는 진미채를 한데 볶아 달달하고 매콤한 냄새로 내 후각을 공격했을 때는, 살짝 눈썹을 움찔하긴 했어도 꿋꿋이 견뎌냈다. 그만큼 다이어트를 향한 내 의지는 호두껍질처럼 단단했다. 그 어떤 산해진미가 눈앞에 차려져도 나는 의지라는 호두알을 손안에 쥔 채 굴리고 또 굴렸다. 닳고 닳은 호두알처럼 내 의지는 시간이 흐를수록 매끈매끈하게 다져졌고 앞으로도 손에서 놓칠 일은 없으리라 굳게 믿었다. 엄마가 무를 꺼내 들기 전까지는.
나와 동시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이라면 《인어공주를 위하여》라는 순정 만화의 제목을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릴 적 한동네에 살며 결혼을 약속했던 두 꼬마가, 부모의 이사로 오랜 세월 연락이 끊겼다가 고등학생이 되어 학교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다. 훌쩍 자라버린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채 타인처럼 스쳐 지나가려는 두 주인공, ‘푸르매’와 ‘이슬비.’ 그러다 푸르매가 늘 손에 쥐고 굴리던 호두 한 알을 실수로 바닥에 떨어뜨리고, 이슬비는 천진하게 호두를 집어 들며 묻는다. “이거 제가 먹어도 돼요?” 이쯤에서 당대 순정 만화계의 명대사가 하나 탄생한다. 과하게 반짝이는(인물들의 눈동자를 은하수처럼 표현하는 게 이미라 만화의 특징이었다) 눈으로 바라보는 이슬비에게 푸르매가 툭 던진 말. “난 한 번 내 손을 떠난 것에는 미련을 두지 않아.” 그야말로 소름이 돋는(당시에는 설렜지만 지금은 살짝 오글거리는) 대사였다.
푸르매처럼 호두알을 바닥에 떨어뜨리는(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다시 복잡하게 얽히게 된다), 그리하여 버터를 처덕처덕 바른 대사를 날릴 일이 내게는 다행히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그동안 잘 다져온 의지 한 알을 손에서 놓칠뻔한 위기가 있었으니 바로 엄마가 무생채를 만들었을 때였다.
어느 새벽이었다. 방문을 꼭 닫아두었는데도 교묘하게 문틈을 침입해 들어오는 소리가 있었다. 보나 마나 발원지는 부엌이겠지. 이번에는 또 어떤 음식으로 내 호두알을 노리려는 걸까. 발뒤꿈치가 들썩일 만큼 경쾌한 박자를 타고 고막을 두드리는 소리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엉덩이를 들멍이다가 결국 방문을 휙 열었다. 졸지에 적장이 되어버린 엄마가 아일랜드 식탁 앞에 서서 커다란 무를 숭덩숭덩 잘라 채 썰고 있었다. 균일한 모양으로 썰린 무들은 양푼(이 안에만 들어갔다 나오면 모든 식재료가 맛있어진다)으로 휙휙 들어갔다. 무 한 통을 다 써니 양푼 안에 뽀얀 무채로 쌓은 산이 솟아올랐다. 설마, 적장이 드디어 최후의 칼을 꺼내든 건가. 그녀가 뭘 만들려는지 나는 단번에 알아챘다. 간장게장 같은 녀석이 밥도둑의 원조인 척 행세하는 요즘같이 비린 세상에, 단단하고 알찬 식감으로 은근한 매운맛을 드러내며 묵묵히 반찬의 길을 가는 진짜 밥도둑의 원조. 바로 무생채를 무치려 한다는 것을.
무생채를 만들 때 소금을 뿌려 십여 분쯤 절인 뒤 무친다는 사람도 있지만, 엄마는 채를 썰자마자 바로 각종 양념을 넣고 버무린다. 진간장을 베이스로 고춧가루, 다진 마늘을 넣고 조물조물하다가 송송 썬 대파를 한 움큼 투척한 뒤 설탕과 깨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해가 갈수록 입맛이 변해간다며 간을 보는 데 자신감을 잃은 엄마는, 이쯤에서 우리 중 누군가를 불러 맛을 보게 하는데 대개 그 대상은 언니나 나였다. 다이어트 식단을 시작한 뒤로는 엄마가 간을 봐달라고 불러도 언니에게 일임했는데, 그날따라 무생채가 풍겨내는 매운 내를 뿌리치기 힘들었다.
무는 내가 코흘리개 시절 때부터 즐겨 먹던 뿌리채소였다. 시골에 살던 일곱 살 무렵에는 방천을 뛰놀다가 목이 마르면, 남의 텃밭에 들어가 훅 무를 뽑아 아삭아삭 베어먹곤 했다. 마을 아이들의 서리 정도는 귀여운 장난으로 취급받던 시절이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당시 하얀 무를 베어먹던 순간의 향과 맛이 고스란히 미각 세포에 남아있다. 대충 겉껍질을 이빨로 베어 벗겨냈다고는 해도 하얀 속살에는 소량의 흙이 붙어 있었다. 무의 알알한 즙과 풋내에 가까운 신선한 흙의 향이 한데 섞인 그 맛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무로 만든 음식만 보면 내 미각에는 서리의 맛이 되살아났고 절로 목이 말랐다.
엄마의 양푼 안에는 새빨갛게 양념 옷을 걸친 무생채가 소담히 담겨 있었다. 나는 홀린 듯이 다가가 “아~” 했다. 엄마는 별일이라는 듯 한 꼬집 집어 내 입에 쑥 빨간 덩어리를 넣어주었다. 새벽공기처럼 신선하고 차가운 무생채가 혓바닥에 닿은 순간, 마치 마중물을 부은 펌프처럼 입안 가득 침이 솟구치면서 알알한 맛이 미각세포를 마비시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차창으로 통과해 가는 무정차 기차역처럼 아린 맛은 금세 사라지고 무의 단맛과 깨의 고소한 맛이 은은히 퍼져 나갔다. 마치 매서운 겨울이 지나고(매운맛) 따스한 볕이 쏟아지는 봄이 된 것처럼 혀 점막의 맛봉오리가 활짝 피어난 느낌이랄까. 어금니 사이에서 아사삭아사삭 비명을 지르다가 침의 파도에 휩쓸려 목구멍으로 떠내려가며 최후를 맞은 무생채는 한동안 입안에 경이로운 맛의 여운을 남겼다. 나는 엄마에게 아무 말 없이 엄지를 척 들어주었다. 그리고 그날 나는 쌀밥 위에 무생채가 올라간 장면과 서서히 흰 밥이 빨갛게 물들어 가는 장면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재생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새벽이면 어김없이 차려지는 엄마의 밥상. 저탄고지 식단을 유지하는 동안에는 그 밥상에 내 수저가 오를 일은 없겠지만, 수십 년을 먹어온 맛이니 얼마든지 나는 기억만으로 엄마의 밥상을 내 머릿속에 차려낼 수 있다. 유네스코 무형 문화유산에 등재된 프랑스의 미식문화처럼 엄마의 밥상은 언제까지나 내 기억 속에 등재된 무형 문화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