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끝내고 현관문을 들어서는데, 흐트러진 신발들이 눈에 들어온다. 뭐가 너저분하다. 침대를 보니 이불이 아침에 일어나서 나간 그대로다.
‘아니, 왜 이거 하나 제대로 정리를 못하지?’
그런데, 잠깐. 그렇다. 나 혼자 산다. 내가 해놓은 짓이다. 내가 해놓고 셀프루다가, 무의식적으로다가 반응한다. 지난번에 얘기한 그 ‘시스템 1’이 작동한 게다. 시스템 1은 단순히 ‘무의식적’인 반응처럼 보이긴 하지만 실제 무의식은 아니다. 자주 반복하는 행동이나 판단이 자동화된 것이지, 노력하면 의식할 수 있는 부분이다. 우리가 자주 하는 행동과 사고 패턴이고, 그렇게 하더라도 큰 문제들이 없다 보니 계속하게 되는 일종의 ‘무의식적’ 행위들이랄까
반면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는 조금 더 깊은 차원, 심연에 깔려 있다. 우리가 인지하지도 못하는 와중에도 자기 성찰, 감정 졸더, 자아 형성 같은 내면의 일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백그라운드에서 돌아가는 앱 같은 거다. 배터리는 계속 닳는데 뭐 하는지 모르는.
시스템 1이든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든 작동하는 층위가 다를 수는 있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우리 안에는 내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일종의 자율주행모드가 장착되어 있다는 점이다.
지나치게 단순화한 감이 없지 않지만, 시스템 1과 시스템 2의 비유는 여기에 들어맞을 수 있다. ‘나’라는 자동차를 시스템 1이라는 자율주행모드로 세팅해서 운전해 가다가 어떤 예상치 못한 문제가 시스템 2가 짜잔 하고 나타나는 것이다. 자율주행모드로 차를 운전하고 있더라도, 갑자기 사슴이 뛰어들면 운전자가 개입해서 브레이크를 밟게 되는 것처럼.
자율주행모드의 성능이 똑같을 리가 없다. 자동차 회사마다 다르고 버전마다 기능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왕이면 좋아야 한다. 급정거와 급발진을 반복하면서 가고 있다면 피곤해진다. 내 안의 자율주행모드도 매한가지다. 뻑하면 욱했다가,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걱정하고, 사과하고, 화해하고. 아직 닥치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느라 잔뜩 진을 빼서, 막상 일이 닥쳤을 때는 제대로 대응도 하지 못한다거나…
내 안의 자율주행모드가 그렇게 짜여 있다면, 내 인생도 피곤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혹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깔려 있는 그것들을 자신의 의지로 수정하고 업데이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를 찾아보는 것. 그것이 ‘내 왜 모양인가?’를 알아가며 ‘내가 원하는 모양’으로 바꾸어 가는 과정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슬슬 들기 시작했다.
자율주행모드 프로그램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이건 두 가지 측면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역시나 구조와 내용의 문제다. 만들어지는 과정이 있을 것이고, 그렇게 만들어진 형식 안에서 작동하는 패턴, 혹은 알고리즘이 있겠지.
뇌에서 일어나는 신경세포들의 활성화 패턴을 설명할 때 흔히 배선(配線, wiring)이라고 표현한다. 전기 배선 작업이라고 할 때의 바로 그 배선. 이미 이 표현 자체에 일종의 비유가 들어 있다. 유전적인 부분이 있겠지만 어쩄거나 처음 인간의 뇌가 일종의 텅 빈 회로 기판이라고 가정해 볼 수 있다.
다만 이 회로 기판의 자유도는 아주 높다. (물론 뇌의 부위별로 특화된 기능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서 기판의 회로의 알고리즘 또한 뇌에 들어오는 정보와 데이터들에 맞춰서 일종의 패턴이 정해진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뇌 속에 있는 신경세포(뉴런)는 특이하게도 생후 8개월에 가장 많고 그 이후로는 서서히 감소하다고 한다.
신경세포를 연결해 주는 시냅스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시냅스의 150~200%까지 만든 다음, 사용하지 않는 시냅스를 제거하는 일종의 ‘가지치기’가 이뤄진다. 재미있는 건 저런 가지치기 작업이 생후 36개월이 지나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된다는 것이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신생아의 뇌는 통계적 학습이라고 불리는 패턴 학습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아기가 이 낯설고 새로운 세계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애매모호한 잡음성 신호가 세계와 아기의 신체로부터 폭탄처럼 쏟아진다. 그러나 이 대량의 감각 입력은 무질서한 것이 아니라 구조와 규칙성을 가지고 있다.... 아기는 통계적 학습을 바탕으로 세계에 관해 예측하고 이를 바탕으로 행동한다.”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리사 펠드먼 배럿
이러한 통계적 학습을 통해 아기의 뇌는 세상에 대한 나름의 모델을 구축하고 거기에 대응하는 일종의 행동과 사고 패턴의 프로토타입을 만들어낸다.
어떤 자극이 오면 우리의 뇌 속의 신경세포는 자극을 받는다. 이때 한 두 개의 신경세포가 반짝하는 게 아니라 이제 신경세포와 신경세포가 이어진 신경망들이 활성화된다.
문제는 똑같은 사건을 겪더라도 사람마다 활성화되는 신경망이 다르다는 점이다.
그 사건에 대한 경험지, 혹은 그 사건을 받아들이는 인식, 그로 인해 생겨나는 감정 등등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똑같이 공을 하나 던진다고 하더라도 프로야구선수와 일반인은 활성화되는 영역이 달라진다. 감정이나 기억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기억은 신경세포 안에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신경세포들 사이의 새로운 연결망 형태로 저장된다. 다시 말해 뇌가 보존하는 정보는 세포 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포와 세포의 연결망 구조로 존재하는 것이다”
<내면 소통>, 김주환
그러니까 이런 거였다. 내 머릿속에는 40여년 치 연결망이 깔려 있다. 누군가 나를 비판하면 '공격받았다'는 회로가 켜진다. 누군가 칭찬하면 '의심하라'는 회로가 작동한다. 같은 말을 듣고도 어떤 사람은 감사하고 나는 방어한다. 다른 회로가 작동하니까. 문제는... 이 회로를 만든 게 나라는 것이다. 그동안 살아온 방식이 지금의 회로를 만들었다.
신경세포와 신경세포 사이. 그 빈틈에 내 인생이 있었다. 어떤 세포와 세포를 연결했느냐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분노와 방어를 연결했고, 칭찬과 의심을 연결했고, 사랑과 두려움을 연결했다.
인생을 바꾸고, 관점을 바꾼다는 건 결국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연결망을 해체하고, 새롭게 이어 나가는 것.
내가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을 새롭게 구축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