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모르는 나
이왕 ‘뇌 탓’을 하기로 하였으니,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 보자. (녀석에 대해 많이 알 수록 녀석의 탓으로 돌릴 수 있는 게 많아질 게 아닌가.)
사실 그렇다. 가끔 내가 하고도 왜 이러나 싶을 때가 한두 번인가. 그러니 나의 뇌는 애초의 나의 의지와 무관한 자신만의 시스템이 있는 듯하다. 그 시스템에 대해서 최소한의 이해라도 하고 있으면, 가끔 ‘내가 왜 이 모양인가’에 대해서 자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조금씩이나마 늘어나지 않을까.
인간의 뇌는 항상 당대의 최첨단 기술에 비유되어 왔다. 그만큼 뇌는 인간이 발견한 것 중에서 가장 놀라운 복잡계이고 신비로운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그런 시도는 대부분 실패했다. 아무리 당대 최첨단의 기술을 비유로 들어 보았자 뇌의 신비로움에는 턱도 없이 부족하기 마련이었다.
17세기에는 태엽으로 이루어진 기계 장치, 18세기에는 전신망으로 비유하였으며 20세기 들어서는 컴퓨터에 비유하고 있다. 지금은 이것 꽤나 적합한 비유라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100년 후의 후손들은 "세상에, 옛날에는 뇌를 컴퓨터라고 생각했대. 개 웃겨"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유혹을 피할 수는 없다. 모든 비유가 가지고 있는 한계가 있지만, 이렇게 복잡한 녀석을 그나마 이해할 만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그런 식의 비유이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서는 AI가 그 자리를 차지한 듯 하긴 하다. 근데 이건 좀 앞뒤가 안 맞긴 하지. 애초에 인간의 뇌를 흉내 내려고 만든 게 AI인데, AI를 가지고 뇌를 이해하려 든다는 건. 그렇다고 도움이 안 되는 건 아니다. 그나마 인간 뇌의 한 단면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건 사실이니까.
우리는 현재를 감각하고 경험한다. 뇌는 끊임없이 현재의 정보들을 나에게 주입한다. 뇌는 그 수많은 정보를 처리한다. 1000억 개 가까운 뉴런(신경세포)들이 있고, 이 하나의 신경 세포에도 수많은 가지가 뻗어 나온 시냅스가 있다. 시냅스의 개수는 100~150조 개에 가깝다고 한다. (인간의 뉴런 개수나 시냅스 개수 같은 건 그냥 추산일 뿐이다. 우리는 그 숫자조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사이를 소위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 세로토닌, 에피네프린 등이 오가며 끊임없이 다양한 전기화학적 신호를 주고받는다.
현재까지 인간이 만든 AI 중에 가장 많은 매개변수(파라미터)를 가진 LLM 모델은 최근에 나온 GPT-T인데, 1.5조 개의 매개변수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흔히 이 매개변수를 인간 뇌의 시냅스에 비교하니, 우리의 뇌는 단순 비교만 해도 100배는 더 크고, 그 네트워크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따지면 비교도 할 수 없다.
AI 기술이 발전하면서 전력이 부족하다고 난리다. 인간의 뇌도 마찬가지다. 뉴런은 전기화학적인 신호들로 움직이며 어마어마한 정보처리를 한다. 그러니 에너지를 그만큼 쓸 수밖에 없다. 뇌는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하면서 20%의 에너지를 소모한다. 하지만 생명은 언제나 효율적이길 원한다. 우리의 뇌가 작동하는 방식도 그렇다.
앞에서 운동하기 싫은 건 뇌 탓이라고 했다. 그런데 생각하기 싫은 것도 매한가지다. 신체 예산을 관리하며 서서히 영역을 넓혀온 뇌가 이제 인간의 공감과 이성까지 담당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하지만 본질은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영역을 넓히면서 또 하나의 뇌가 관리하게 된 예산이 ‘인지적 예산’이다. (뇌가 어떤 관리자라는 느낌을 주기 위해 신체 예산, 인지 예산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그냥 체력과 멘털 정도로 생각해도 큰 상관은 없다.)
심리학자로는 최초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행동경제학’의 창시자인 대니얼 카네먼. 그는 인간이 사고를 하는 데에는 두 가지 모드가 있다고 한다. 그는 이걸 ‘시스템 1’과 ‘시스템 2’라고 부른다. 그에 따르면 시스템 1은 저절로 빠르게 작동하며, 노력이 거의 또는 전혀 필요치 않고, 자발적 통제를 모른다. 시스템 2는 복잡한 계산을 비롯해 노력이 필요한 정신 활동에 주목한다. 특히 주관적 행위, 선택, 집중과 관련해 활동한다.
“시스템 2는 대개 즉흥적으로 일어나는 주의 집중과 기억을 조정해, 시스템 1이 작동하는 방식을 바꾸는 능력이 있다.”
“우리 생각과 행동 대부분은 시스템 1에서 유래하지만, 상황이 복잡해지면 시스템 2가 임무를 넘겨받는다. 최종 발언권은 보통 시스템 2의 몫이다. 시스템 1과 시스템 2는 매우 효율적으로 역할을 분담해서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성과를 올린다. 이런 방식은 대개 효과가 좋은데, 시스템 1이 제 몫을 잘 해내기 때문이다. 시스템 1이 익숙한 상황이라고 정해 놓은 모델은 정확하고, 단기 예상도 대개는 정확하며, 어려운 상황을 만났을 때 초기 대응도 빠르고 대체적으로 적절하다. 그러나 특정 상황에서는 체계적 오류인 편향을 보이기 쉽다.”
“시스템 2의 결정적 특징은 그것이 작동하는 데 노력이 들어간다는 것이고, 주된 특성 하나는 게으르다는 점, 그래서 꼭 필요한 만큼의 노력만 쏟는다는 점이다. 이러다 보니 시스템 2가 자신이 선택했다고 믿는 생각과 행동이 사실은 이 이야기의 중심인물인 시스템 1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때가 많다. “
즉, 우리의 의식은 24시간 내내 무언가에 주의 집중하지 않는다. 일상을 모니터링하며 일종의 자동주행모드로 움직이다가 가끔씩 주의를 기울여서 대처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인간이 인지에 들어가는 노력을 최소화하면서도 일상을 영위해 나가는 데 큰 문제가 없도록 하는 시스템이랄까.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시스템 1은 일종의 휴리스틱 한 의사결정 과정(어림짐작)을 따르고, 시스템 2는 보다 분석적인 사고를 기반으로 한 판단을 한다고 보면 된다.
“정신적 과부하에 대처하는 방법은 선별적이고 엄격해서, 시스템 2는 가장 중요한 활동에 주목해 그것에 필요한 에너지를 우선적으로 공급한 뒤 '여유분'을 초단위로 다른 작업에 할당한다… 일반적으로 '최소 노력 법칙'은 육체 활동뿐 아니라 정신활동에도 적용된다. 이 법칙에 따르면,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이 여럿일 때 사람들은 가장 힘이 덜 드는 방법에 끌리게 마련이다…. 그리고 게으름은 인간 본성에 깊이 뿌리내린 습성이다.”
<생각에 관한 생각> 中 대니얼 카네먼
얼마나 좋은가.
게으름 또한 내 탓이 아니다. 뇌 탓이다.
시스템 1과 시스템 2는 심리학적인 개념이다. 한편 뇌과학 분야에서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활동하는 뇌의 작동들을 포착해 내었다. 2001년 미국 워싱턴 대학교 의과대학의 마커스 레이켈 Marcus Raichile 교수팀은 PET 스캔을 활용하여 우리 뇌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때에도 활성화되는 영역이 있는 것을 발견해 내었다.
소위 말하는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이다. 후방대상피질, 내측전전두엽피질, 측두두정연접 부을 비롯하여 시상하부, 편도체, 중심회색질 등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하니 뇌의 전체적인 부분에 조금씩 발을 거치고 있는 셈이다. 이 영역들은 휴식 상태이거나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을 때에도 활동하고 있으며, 오히려 특정한 과제를 수행하거나 어떤 일을 하려고 하면 활성화 정도가 떨어지는 부분들도 있다고 한다.
“신경과학에서는 어떤 자극에 집중하거나 과제를 수행하는 등의 활동을 하지 않고 쉴 때 활성화되는 뇌의 영역을 디폴트모드네트워크라고 한다. PET와 fMRI의 발달로 뇌를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면서, 어떤 과제를 수행하면 오히려 혈류와 대사가 감소하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디폴트모드네트워크는 몸 안팎의 자극을 뇌로 받아들이며 감정과 동기부여를 조절하고 스트레스에 대한 여러 내부 작용 반응에도 영향을 주는 머릿속 인터페이스 또는 사고방식으로 기능한다. 또 과거의 경험, 기억과 함께 개인의 무의식적 사고체계를 형성하기도 한다. 그래서 인식의 주체를 의미하는 자아, 에고 ego를 신경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실체이기도 하다.”
<당신도 느리게 나이들 수 있습니다> 中 정희원
자아성찰이나 자전적 기억 등 자신과 관련된 정보를 처리하는 자기 참조적 과정(Self-referential thinking), 다른 이들과의 사회적 관계를 위한 감정의 처리, 과거 경험에서 얻은 정보를 장기 기억으로 통합시키는 등의 작업을 진행한다는 것이다.
‘시스템 1’이나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에 대한 학문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여기서 하나 생각해 둘 건, ‘나’라는 인간의 행동에는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어떤 자동화된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백그라운드 프로그램이 지속적으로 작동하면서 나의 감정과 행동들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일종의 자율주행모드가 항상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아니라고 우겨도.
뇌는 그렇게 인지적 예산을 아끼기 위해 알아서 돌아가는 루틴 프로그램을 돌려놓는다. 애초에 그걸 만든 건 내가 맞지만, 사실 그걸 만들었다는 걸 나조차도 잘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