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도 역시 만오천보를 넘게 걸었다.
어제는 발이 너무 아파서 휴족시간을 붙이고 잤더니
그게 붙여본 사람은 알겠지만
파스같이 화~하면서 차갑다.
발을 차게 하면 악몽을 꾸기 쉽다는 연구에 대해 전에 언급한 적이 있는데 내가 몸소 입증했다.
엄청난 악몽에 몸부림치다 깨서 휴족시간을 떼어서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다시 잠을 청하며 그 내용이 꽤 기발하니 시나리오로 써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아침에 일어나니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2. 누군가가 갑자기 떠오른다는 것은 그 사람도 내 생각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순전히 내가 편리한 쪽으로 해석하는 거겠지.
3. 좋아하는 사람은 굳이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이해가 안되는 면까지 좋아하니까. 어쩌면 이해가 안되는 점이 더 매력적이기도 하고.
문제는 "아니 상식적으로 그 상황에서 왜 그렇게 행동해? 정말 이해할 수가 없네" 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여기서 '상식'이라는 것은 당신 기준의 상식일 가능성이 농후하고 설령 이 상식이 정말 길을 막고 물어봐서 백이면 백이 다 고개를 끄덕이는 '상식'이라고 해도
그게 포인트가 아니다.
포인트는 사실,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속내는 사실
"나는 네가 내 기대와 다르게 움직이는게 못마땅해지기 시작했어."니까.
4. 내가 여행을 하며 왜 그렇게 열심히 걷는지를 상식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내 남자친구인 적이 있었다. 그는 처음엔 그 다름에 끌렸을 것이다.
그의 주변 사람들과는 사뭇 다른 나에게.
그러다 어느날 부터인가 이해가 안된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돈으로 쉽게 할 수 있는 일들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것을 낭비라 생각했고 나는 돈으로 너무 쉽게 해결해버려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소소한 기쁨들을 잃는 것은 인생의 낭비라고 생각했다.
내가 어렵게 어렵게 얻어낸 성취를 그는 고생이라 불렀고 그럴수록 나는 어렵게 살고 싶었다.
나와 다르게 살아왔으니, 다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귀여웠다. 온실속 화초처럼 곱게 자란 도련님이.
가끔 보이는 세상을 대하는 건방진 태도도.
어떤 상황에서도 흐트러지지 않고 나오는 체화된 에티켓과 기품.
'천박하다'는 단어를 쓰는 사람들 특유의 우월주의마저도 그냥 우습고 귀여웠다.
이건 내가 반쯤 훽 돌아서 그라는 인간 자체를 너무 사랑하니까 가능한 거였다.
그도 그랬어야 했다.
내가 길거리 음식을 먹자는 얘기를 꺼내려면 눈치를 보게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
내가 낯선 여행자들 9명과 한 방을 나눠쓰며 여행한다는 말을 했을 때 그런 표정을 짓지 말았어야 했다.
내가 여행하며 함께하지 못한 그를 내내 -그리워했으면서도 그에게 줄 선물을 결국 고르지 못했을 때- 내가 마음으로 고른 선물을 그에게 내밀기 초라하다고 생각되었을 때. 그가 좋아할 만한 선물을 사는 것은 나에겐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도 그를 이해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렇게까지 드라마틱할 필요는 없는데
어째 그 사람이 좋아져버리고 나면
아무것도 상관없게 되어버리고
그게 또 쭉 상관없는 채라면 좋을텐데
상징적 의미의 '보통의 연애'를 할 수 없는 상황이 거듭되면 그 연애는 신파로 흘러가는 수가 많다.
그러니까, 너 내 배경보고, 돈 보고 접근했지?
라는 말은 한가한 소리다.
그렇게라도 접근해서 잘 버텨낸다면
그 자괴감을 다 딛고 알량한 자존심, 상대적 박탈감 다
던져버리고 올인한다면
그것 자체가 벌써 숭고하다.
나는 결단코 이번 생애엔 이루지 못할 것이다.
5. 함께 있을 때 마음이 편안한 사람이 좋다는 이야기가 점점 와닿는다.
여행을 하면서도 내가 하는 행동에 눈쌀 찌푸리지 않고
그의 행동이 내 마음에 크게 거슬리지 않는 그런
비슷한 정서와 비슷한 가치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이건, 사랑은 모든 것에 우선한다, 사랑으로 모든 차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을 전면 부인하는 것은 아니고 나는, 계속 그 좁은문으로 들어가려다 실패했기 때문에 좀 넓은 문, 쉬운 길을 가고 싶어졌음을 고백하는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