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의 사후 세계>
김초엽 작가의 <관내분실>
한국과학문학상 대상을 받은 작품이다. 평소 팔로우하고 있는 트위터의 작가가 극찬을 하여 찾아서 읽은 단편소설인데, 그 소재도 글도 너무 마음에 들었다. 대략의 줄거리는 이렇다. 가까운 미래, 죽은 사람의 마인드를 온라인에 업로드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어 사람들은 육체적 죽음을 벗어나 영원히 산 자와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사람들의 영혼을 보관하고 있는 도서관. 산 사람들은 이따금씩 그곳을 찾아와 죽은 사람의 영혼과 대화를 나누고 상실의 고통을 치유하곤 한다. 죽은 엄마의 영혼 또한 도서관에 업로드되어 있었지만 가슴 아픈 과거로 인해 한 번도 엄마의 영혼을 마주하려고 하지 않았던 주인공. 어느 날 큰 결심을 하고 도서관에 찾아와 엄마의 영혼을 검색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돌아오는 건 당황하는 사서의 대답. “관내 분실인 것 같습니다…” 엄마의 영혼과의 대화를 통해 엄마와의 관계를 회복하려 했던 주인공은 분실된 엄마의 영혼을 다시 찾아내기 위해 추억을 더듬으며 물리적 단서를 찾기 시작한다.
이 소설을 읽을 당시만 해도 깊은 생각을 하지 못했다. SF소설이라고만 생각하고 가볍게 읽고 감탄하고 넘겼다. 그런데 이것은 머나먼 미래의 일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 나와 우리의 삶에 들어와 있는 문제였다. 나의 사후에 내가 온라인 상에 남긴 수많은 정보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나의 사후에 그 정보들이 나의 주변인,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이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가? 일레인 카스켓 박사의 책 <디지털 시대의 사후 세계>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깊은 고민과 조사와 연구 그리고 통찰을 담고 있다.
언젠가 당신의 물리적 신체는 공동묘지에 묻히거나 화려한 유골함에 보관되거나 바람에 흩뿌려지는 식으로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겠지만, 당신이 인터넷상에 남긴 가상 자아는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의 눈과 귀를 끌면서 활동을 이어갈 것이다. 선택이나 충동에 의해서든, 강요에 의해서든, 살아있는 동안 온라인 세상에 더 많이 참여하면 할수록, 죽은 뒤 당신이 남긴 디지털 발자국이 지니게 될 영향력도 그만큼 커질 것이다.
죽은자의 프라이버시
아마 당신도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가까운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후에 온라인 상에 남겨져 있는 그 사람의 정보로 인해 큰 충격이나 기쁨을 느꼈던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은 후에 남겨질 자신의 온라인 정보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는다.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단순히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정보의 주체인 나 자신이 없어지기 때문에 틀린 말도 아니다. 내가 죽었는데 남겨진 정보들이 무슨 쓸모란 말인가.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만약에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 어렵게 마음을 정리했는데 여전히 온라인상에서 떠도는 그의 사진을 보게 된다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악을 끼친 악인의 모습이 여전히 온라인 상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SNS 계정에 돌아다닌다면? 삭제하고 싶어도 그 계정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죽은 줄로만 알았던 사람으로부터 소름 끼치는 새로운 연락을 받는다면? 내가 남긴 정보들이 누군가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게 된다면? 결국은 내가 아니라 내가 남긴 정보들로 인해 상처를 받을 누군가가 생긴다는 것이 문제다.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가 죽은 후 남겨질 나의 인터넷상의 정보들을 한 번도 깊게 고민해 보지 않은 것은 수많은 SNS 플랫폼들도 마찬가지다. 어떤 플랫폼은 사용자가 죽으면 그 계정을 삭제할 수도 있고, 어떤 플랫폼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도 있다. 가입할 때 동의하는 이용약관에 표시되어 있을 수도 있지만 아무도 제대로 읽는 사람은 없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SNS인 페이스북은 추모 계정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사용자가 죽으면 그 계정은 추모 계정으로 전환시켜서 보관하는 것이다. 더 이상 새로운 친구를 맺을 수는 없지만 기존에 친구관계였던 사람들은 그가 죽은 후에도 그 사람의 계정을 보며 과거를 회상하고 기억하고 추모할 수 있다. 실제 육체가 묻혀있는 묘지에 가지 않더라도 온라인상으로 추모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만 문제는, 추모 계정으로 전환된 그 계정의 남편, 아내 혹은 아들, 딸 등 가족들이 이미 친구로 등록되어 있지 않았다면, 관련 자료들을 하나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가족임을 증명해도 개인의 프라이버시로 인해 페이스북은 가족에게 그 계정의 운영권을 넘겨주지 않는다. 가족이 그 계정의 패스워드를 알고 있지 않은 한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인다. 죽은 자의 프라이버시라니. 또 하나의 어려운 문제다.
디지털 이민자와 디지털 원주민
최근 두 세대만에 온라인 환경은 급속도의 변화를 겪고 있다. 10년 전과 비교를 해 보아도 수많은 SNS의 발전과 규모의 확대는 눈부시다. 그만큼 예전 세대와 지금 세대의 디지털 흔적은 그 양 자체가 다르다. 밀레니얼 세대인 나는 학창 시절 서서히 디지털 환경으로 옮겨온 디지털 이민자다. 손편지를 써서 주고받았던 펜팔의 기억이 있다. 특유의 접속음을 내던 하이텔을 사용한 경험이 있고 아직도 첫 컴퓨터에서 보았던 윈도우95 로고가 기억난다.
고등학교 시절에 사용했던 첫 폴더폰은 컬러 화면과 64화음을 자랑하던 최신 큐리텔 폰이었다. 대학생 때 사용하던 엘지 싸이언은 엉성하게 한발 느려 꾹꾹 눌러야 하는 감압식 터치를 사용했고, 대학교 2학년 시절 추운 겨울날 장갑을 벗고 처음 만져보았던 아이폰3gs는 그야말로 감동이었다.
지금의 90년대생이나 2000년대생은 디지털 원주민이다. 말도 제대로 하기 전에 태블릿, 스마트폰을 접한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는데도 화면을 이리저리 터치하며 스마트폰을 만지는 모습을 보면 놀랍기만 하다. 내가 남기는 디지털 족적보다 지금의 어린 세대들이 남기는 디지털 흔적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자신이 아이였던 시절부터 처음으로 걸었던 모습, 처음으로 말을 하던 모습 등 모든 것이 기록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어린아이들이 나중에 커서 그 모습들을 보면 어떻게 느낄까?
자신이 원한 것도 아니었는데 부모에 의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모습들을 그 아이들이 알게 된다면 뭐라고 말을 할까?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의 모습을 그들의 동의 없이 온라인에 공개해도 문제가 없는 것일까?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이 계속해서 떠오른다.
디지털 족적의 쓸모
디지털 흔적의 좋은 점도 많다. 내가 남긴 흔적들을 잘 정리해 놓는다면, 내가 죽은 뒤 나를 사랑했던,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쉽게 나를 기억하고 추억할 수 있을 것이다. 기술이 더 발전한다면 나의 모든 온라인 기록들을 수집해 나와 유사한 가상의 캐릭터를 만들어 내어, 내와 대화하듯 말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생각난다. 돌아가시지 전에 병원에 방문했었는데, 나를 보고 반갑게 웃으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기억난다. 평소와는 다르게 함께 셀카를 남기고 싶었는데 차마 그러지 못했다. 지금은 그것이 후회가 된다. 내가 간직하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은 없다. 적어도 온라인에는 말이다.
우리 부모님의 어린 시절이 궁금하기도 하다. 엄마 아빠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 집에 있는 오래된 사진앨범에서 부모님의 청년 시절의 모습을 엿볼 수는 있지만 지금 볼 수 있는 생생한 동영상은 하나도 없다. 그들의 젊었을 적 목소리가 궁금하고 어떤 생활을 했는지가 궁금하다. 내가 지금 볼 수 있는 그들의 디지털 흔적은 거의 없다.
디지털 시대에 소외되어 있는 축에 속하는 부모님의 사후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깨달은 사실은 나의 아들의 영상은 정말 많지만, 부모님의 영상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돌아가실 텐데, 그때 추억할 만한 디지털 흔적을 지금부터라도 잘 남겨야 하지 않을까. 그것은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닌, 그들의 사후에 나와 그들을 사랑했던 사람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예전과는 다르게 온라인으로도 부모님을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한 준비가 될 것이다.
우리가 매일매일 별다른 고민 없이 남기는 온라인상의 글과, 사진, 영상들은 생각보다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죽었을 때는 그 정보들이 어떤 방향으로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무심코 남긴 온라인 정보들이 누군가에겐 정말 아픈 상처가 될 수도 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도저히 온라인으로 글을 쓸 수만 없을 것 같다. 가볍게 소통하며 쓴 친구와의 메신저 대화, 이메일, 게시판 글들도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이 글들이 누군가에게 아픈 것이 되지는 않을까, 그 누가 보아도 부끄럽지 않은 것인가 하는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자기 검열을 철저히 할 수도 없고 온라인과 완전히 끊을 수도 없는 시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친절하게도 저자 일레인 카스켓 박사는 이에 대한 자신의 솔루션을 제공해 주고 있다. 이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나 나처럼 이 새로운 딜레마에 머리가 어지러운 사람에게는 훌륭한 지침이 될 것 같다.
1. 죽음에 대한 불안에 직면한다.
만일 당신이 디지털 활동을 삶뿐만 아니라 유산과도 연관시킬 수 있다면, 당신은 아마도 더 현명한 결정을 내리게 될 것이다. 당신이 내일 죽는다면, 뒤에 남겨진 디지털 유산에 만족할 수 있겠는가?
2. 항상 점검하고 결코 추정하지 않는다.
3.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
4. 죽음과 디지털에 관한 대화를 나눈다.
5. 디지털 시대에 걸맞은 유언장을 작성해둔다.
가능한 한 모든 계정에서 디지털 유언 집행자(페이스북 기념 계정 관리자, 구글의 휴면 계정 관리인 등)를 미리 임명해 두자.
6. 권리를 위임받은 사람이 접근할 수 있도록 마스터 패스워드 체계를 구축해둔다.
7. 당당한 큐레이터가 된다.
8. 더 많은 접속이 항상 더 나은 기분을 보장하는 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한다.
9. 오래된 방식을 존중한다.
10. 불멸 같은 건 잊는다.
살면서 남긴 디지털 흔적과 물질적 유물들이 우리를 알고 사랑하던 사람들에게 남겨줄 가장 중요한 유산이 될 것이다.
슬기로운 디지털 생활
온라인 기록을 남길 때마다 저자는 아래와 같은 질문을 던져 보라고 말한다. '이 일은 나나 다른 누군가에게 여전히 좋은 일인가? '
아무도 이 일을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이 활동이 금전적 이득이나 명성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해도, 이 일은 여전히 할 가치가 있는 일인가? 이 일은 나나 다른 누군가에게 여전히 좋은 일인가?
나 스스로 이 물음에 100퍼센트 맞는 답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온라인에 흔적을 남길 때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리고 그들이 이것을 보았을 때 당당할 수 있는 기록들이라면 아무 거리낌 없이 보람차게 흔적을 남겨도 되지 않을까? 그것이 더구나 제삼자에게까지 도움이 된다면 더 좋지 않을까?
저자의 결론은 이렇다.
가능한 한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라. 많이 사랑하라. 살아가는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감사하라. 세상의 선을 위해 힘쓰라. 이런 삶에 헌신하다 보면, 그 삶의 유산을 자랑스럽게 여이게 될 것이다. 유산의 형식과 지속 기간은 당신이 신경 쓸 바가 아니다.
나의 결론도 이와 같다. 나의 가족에게 부끄럽지 않은 디지털 정보, 유산들을 남기는 데에 주력하는 것.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고 나에게도, 세상에도 유의미한 것들을 남기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 하는 것.
언젠가 회사 교육활동 중에 자신의 원대한 꿈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이 있었다. 나는 그 질문에 '세상에 큰 획을 하나 긋은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답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평가가 주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나 스스로 당당하고 유익하고 가치 있는 정보들을 온라인에 계속해서 남긴다면, 나 스스로 세상에 획을 그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굵기가 얇고 길이가 짧을 지라도 온라인이라는 새로운 도구를 손에 쥔 우리는,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세상에 흔적을 남기고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이 참으로 소중하다. 이 글은 나에게도 유익하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당당히 내보일 수 있는 글이고, 먼 훗날 나의 아들에게도 마음 놓고 보여줄 수 있다. 이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책을 읽고 서평을 남기고 내 생각을 온라인에 남기는 이 활동을 지속적으로 할 것을 다시 다짐한다. 나만의 선, 얇고 짧을지라도 꾸준하게 그 선을 그어 보려고 한다. 계속 계속 선을 긋다 보면 언젠가는 세상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굵은 한 획을 그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