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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 Mar 12. 2024

명의와의 초진

엄마 울지 마. 산타할아버지가 선물 안 줘. 

진짜 웃긴 일이었다.

첫째가 4살 무렵, 그러니까 약 5년 전, 그러니까 둘째가 태어나기도 전에 첫째의 자폐 증상으로 예약해 두었던 서울대 소아정신과 김붕년 교수님의 진료가 한 달 후로 다가온 것이다. 세브란스 소아정신과 천근아 교수님께서 종결하셨으니, 굳이 또 첫째를 데리고 서울대에 갈 일은 아닌 것 같고, 서울대에 전화해서 혹시 첫째 예약한 자리를 둘째로 변경할 수 있냐고 문의했다. 문의하는 나는 간절하면서도 비참했다. 애 둘 다 소아정신과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 서글펐다. 


예약 변경을 하는 상담사는 첫째 예약을 취소하고 그 자리에 둘째를 넣는 건데 첫째 예약을 취소하는 순간 다른 상담사가 그 자리에 다른 아이 예약을 넣어버릴 수도 있으니, 실패하더라도 자기를 원망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절대 원망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상담사를 응원했다. 우여곡절 끝에 둘째가 첫째 예약 자리에 들어가는 것에 성공했다. 


그리고 한 달 후, 정년 퇴임 때까지 예약이 꽉 찼다는 우리나라 소아청소년 정신과 명의와의 진료일이 다가왔다. 나는 며칠 전부터 자료를 준비했다. 아이의 발달력에 대해 촤라락 쓰고, 현재 어떤 치료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나의 몇 가지 질문거리에 대해서도 A4 용지 한 장에 빼곡히 썼다. 


둘째 아이를 일찍 하원시키고 서울대 병원으로 향했다. 2시 예약이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 나는 이가 딱딱 떨릴 정도로 긴장하기도 했고, 둘째에게도 들어가면 '의사 선생님 안녕하세요'하라고 단속을 시켰다. 예진을 미리 보는데, 예진에서 작년에 임상실험 참여로 받아온 검사결과를 기록하셨다. 그렇게 하고 나와서도 20-30분, 대학병원 진료가 항상 그렇듯, 예약했던 시간보다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 진료실에 들어갔다. 


교수님은 검사 결과를 보고 이미 아이가 자폐라고 생각하고 계신 듯했다. 하필이면 맑음 이가 상당히 집착하는 세탁기 장난감이 진료실에 있어서 그걸 꺼내달라고 하더니 열심히 세탁기를 돌리며 세탁기 소리를 흉내 내고 있었다. 교수님은 우리 부부에게 아이에게 가장 시급 한 건 ABA 치료라고 하셨고, 우리가 근처에 있는 ABA 센터가 너무 기대 이하라 다니다가 그만뒀다고 했더니, 서울대 병원 행동발달증진센터에서 하는 ABA 온라인 부모교육에 참여하라는 처치를 내려주셨다. 결국은 부모가 배워서 해야 하는 거라며, 온라인 부모교육과 함께 본인이 공저로 집필하신 '자폐부모교육(첫 진단을 받은 아이)' 책도 추천해 주셨다. 앞으로 치료를 좀 줄이고 싶은데 어디에 포커스를 맞추면 좋을지 여쭈어보았더니 줄이지 말라 하신다. 1년 더 치료를 달려보고, 그 후에 장애 등록을 하라 하셨다. 여러 질문 중 딱 하나만 했을 뿐인데 진료시간이 끝났다고 하신다. 신나게 세탁기 장난감을 돌리던 둘째도 이제 그만이라는 말에 세탁기를 내려놓는다. '이거 건전지가 없어'라고 그제야 아이는 진료실에서 첫 한마디를 했다. 교수님이 '내가 빼놨어. 다음에 넣어 놓을게'라는 대답을 듣고, 우리는 축 처진 어깨로 진료실을 나왔다. 



진료실을 나와 수납을 하고 지하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자꾸만 눈물이 났다. 

도대체 얼마나 더하라는 것인가. 도대체 나에게 뭘 얼마나 더 포기하라는 것인가. 오늘 아침에 남편이 성과급 S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 말을 듣고 나는 더 화가 났다. 네가 회사에서 그렇게 몸 바쳐 일해서 성과급 S를 받을 때 나는 휴직을 하고 내 커리어는 완전히 내려놓고 온몸 바쳐 둘째 치료와 놀이에 신경을 썼는데, 왜 나는 성과급은커녕 그 어떤 성과도 없는가. 동시에 성과급 S를 받았다고 자랑하는 남편에게 이런 싸늘한 반응을 해줄 수밖에 없는 나 자신도 치가 떨리게 싫었다. 


차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운전하는 나에게 뒤에 가만히 앉아 있던 둘째는 '엄마 울지 마. 산타할아버지가 선물 안 줘'라고 했다. 나는 그 말에 눈물을 닦고, 웃어버렸다. 너 작년 초까진 말도 못 했는데,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진짜 많이 컸다! 엄마가 아직도 마음이 단단하지 못한가 봐. 아무리 명의라 한들, 아무리 케이스가 많다 한들, 너를 고작 10분 보고, 그깟 6개월이나 지난 검사결과를 보고 우리의 노력과 너의 찬란한 발달을 판단한 의사 선생님의 말에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린 엄마가 참 못났다. 


돌아오는 차에서 잠든 네가 깰 때까지만 조금 슬퍼하고, 다시 털고 일어날게.

오늘 교수님과의 만남은, 좀 더 힘내라는 쓴소리로 생각하고, 더 힘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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