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광이 부른 '긴 하루'다. 원곡은 이승철.
어제는 발렌타인 데이였고, 크리스마스에도 몰랐던 외로움을 느꼈다. 그래서 사진첩을 뒤적이다가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사진을 봤더니 그때도 눈이 내렸더라. 그래서 반복되지만 돌아오지 않는, 사랑에 대해 적어야겠다.
신형철은 말했다. '사랑은 능력이다'. 10년 전쯤 읽었을 땐 감흥이 없었다. 줄이 그어져 있지 않다. 나는 그때 사랑하고 있었을까? 진보는 결핍에서 자란다. 나는 거기서 멈췄다.
능력 없는 사람에게 세상은 가혹하고 어느 하나 저절로 되는 것 없다. 그래서 시도한다. 이제부터 실험이라고 하자. 실험에 들어가기 전 예비 보고서를 작성하듯, 우리는 사랑이라고 말하기 전에 떠올린다. 이 사랑의 목적과 의의를, 그리고 끌을.
언제부터 사랑하게 됐는지, 왜 사랑하는지,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 이유를 나열하고 방법을 고민한다. 그리고 실험을 할지 말지 결정한다. 그런데 이 실험에 허락이 필요한 것일까? 그래서 이 사랑의 실험이 정확하길 원한다. 두 번째 실험은 없기 때문이다. 다시 신형철의 글을 꺼낸다.
어떤 사람도 상대방을 정확하게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 이것은 장승리의 두 번째 시집 <무표정>에 수록돼 있는 시 '말'의 한 구절인데, 나는 이 한 문장 속에 담겨 있는 고통을 자주 생각한다.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한 이의 고통은 사랑한 자의 잘못이다. 실험이기에 정확할 수 없고, 그것 역시 사랑이기에 한 번으로 끝나야 한다. 같은 사랑은 없다. 생각 없이 사랑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생각은 태어난 다음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숨을 뿐이다.
그래서 오늘 퇴근길에는 사랑했다 이별한 사람처럼 홍대광이 부른 '긴 하루'를 들었다. "끝인가요 후회만 남은 사랑 처음으로 돌아갈 순 없나요". 후회는 사랑이라는 실험의 결과 보고서다. 이 실험은 성공한 것일까? 실패한 것일까? 무엇이었든 간에 정확한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사랑을 믿은 적이 있다는 고백이 어처구니없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