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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진 Nov 30. 2021

당신을 건너 여기, 인디아 4

쾌조의 스트레이트!





 

뭔 날벼락인지 꿈자리가 뒤숭숭하다던 세바스찬은 모처럼 고향집에 안부전화를 넣었다가 뜻밖의 가정사로 말미암아 다급히 귀국길에 올라야 했고, 티켓을 예매하고자 인터넷을 붙들었으나 게임이나 하고 자빠져 있었던 건 아니었을 텐데 소득 없는 얼마간을 보내야 했고, 그에 여행사에 들렀으나 티켓 그까짓 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 여행상품에만 열을 올리는 여행사직원 덕분에 빡이 칠대로 쳐야 했고 결국 어울리지도 않는 쌍욕을 내뱉으며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내달려야 했다. 어디가 어딘지 도통 알 수 없는 지점에 난데없이 혼자 남겨진 나는 어디 굴러다니는 껀수 없나, 휘적휘적 인파를 뚫고 대로를 건너 용케 납치 감금 폭행당하지 않고 호스텔로 돌아왔다.

 


좀 자빠져 있자 싶어 숙소에 들어서니 로빈은 이튿날 아침 호주로 돌아간다며 액면으로 맞짱뜨자면 UFC선수에게도 밀리지 않을 자신의 등빨만큼이나 우람한 배낭을 풀어헤쳐 해지고 허름한 면면이 쓰레기와 이웃사촌 격인 가지가지를 개고 말고 쑤셔 넣고 열심이었는데 아따, 그 양이 실로 어마어마했다. 아니, 저 엄청난 걸 다 메고 다녔단 말이야? 종류와 부피에 경악하며 저건 여행자의 배낭이 아니라 외려 피난보따리가 어울리겠다 싶어 그만 1.4후퇴 적 14만 피란민들의 고난과 역경이 떠오르는 바람에 잠시 눈자위가 촉촉해졌으나 그건 생각이란 걸 하고 사는지 미역국에 말아먹고 사는지 대대적인 점검이 시급한 나란 인간에게서나 발생 가능한 백오십 원어치 지레짐작이었으니 얼핏 둘러본 다른 녀석들의 배낭 역시도 도드라진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세바스찬의 의아한 물음에 그제야 올바른 이해가 왔다.

 

“이게 전부야?”

아침나절, 자그마한 쌕 하나와 막노가다 한달벌이는 고스란히 때려 박아야 둘러맬 수 있는 고급스런 숄더백, 분위기와 사이즈를 감안하자면 여행이 아니라 쇼핑이나 맞선에 동반되어야 합당할 에르메스 에르백을 매고 등장한 모습에 사태의 진위를 캐묻던 녀석은 무슨 봅슬레이 타는 낙타라도 만난 것마냥 눈알을 부풀리며 이게 가능하냐고, 거긴 뭐가 들었냐고.

  

 

“다 있어. 담요, 흑백필름, 위스키 그리고 기타 등등.”

없는 것 빼곤 다 있었다. 다만 없는 게 상당히 많았다. 예컨대 정신머리라던가…….

 

 

불필요한 것은 분연히 소유하지 않는다는 무소유정신과 물질문명의 유혹을 감연히 거부하겠다는 자연찬미사상이 깃든 소박한 구성이었을 리 만무하고 사실 잘 몰랐다.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각종 예약예매 뭐 이런 건 그냥 말을 말고 파렴치한 환전율을 자랑하는 공항환전소에서 과감하게 500달러를 내밀었던 것이나, 숙소에서 수건은커녕 비누쪼가리 하나 제공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나, 돈 내고 먹는 밥이 돈 받고 먹어야 할 정도로 맛없을 수 있다거나, 전화 거는 방법은 물론 유심체계마저 전혀 고려하지 못해 전화기도 없으면서 전화카드는 뭐 하러 사러왔냐는 타박이 돌아왔으나 그럼? 전화기가 있으면 뭐 좆발났다고 전화카드를 사러왔겠냐고 당당히 응수하는 둥 장르별로 다채롭고 심도 깊게 몰랐고 여장을 꾸리는 것 또한 개중 하나랄 수 있으니 난 그렇게 필요한 게 많은 줄 생각도 못했지. 그쯤이면 될 줄 알았지…… 결국 어떻게 되긴 되더라마는. 덕분에 초짜라는 티도 안 나고.


 

바이올렛과의 거룩한 해후에 돌입하기까지 로빈과 맥주에 저녁을 먹으며 시간을 때웠다. 죽이는 데 알아놨다는 녀석은 먹거리 고발 프로그램에 소개되었을 법한 이름 모를 노점(의 이름은 알고 보니 바데미야 Bademiya)으로 안내했는데 교통을 마비시킬 정도로 북적거리는 인파에 빠직 신경이 올라서 아 쫌, 우아한 데서 먹으면 안 되냐 싶었으나 달리 알고 지내는 음식도 없고 녀석의 열의에 찬물을 끼얹을 만큼 치명적인 것도 아니어서 닥치고 뒤따른 탓에 다진 닭고기를 말아 숯불에 굽고서 채 썬 양파와 녹조를 연상시키는 찝찝한 때깔의 소스를 곁들여 로띠에 싸먹는 그 이름 모를 요리(는 알고 보니 시크 케밥 Seekh Kebab)를 두어 연신 죽여주지 않냐며 호들갑 떠는 녀석을 마주봐야 했다. 도대체 몇 인분이나 처먹는 건지 빨아들이듯 씹어 삼키며 그저 맛있고 단지 맛있다는 단순감탄사 외 어떤 유의미한 표현도 배출하지 못하는 녀석을 바라보고 있자니 생긴 것도 험한 놈이 험하게 자랐구나, 애잔한 마음에 목울대가 후끈거렸으나 안타까운 일이라면 그리 머지않아 녀석의 호들갑에 상당한 일리가 있다는 것을 깨치고 말았다는 것, 바데미아의 케밥은 양반이었다. 다른 태반의 음식들은 꿈에서라도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희한한 맛의 각축전이었다.

 

 

마침내 저녁 8시. 밤사이 자다 깨어 상상했고, 아침나절 맥주를 마시며 그려봤고, 시티투어 내내 걸으며 기대했고, 하루 종일 진정으로 바라마지 아니 하였던 바이올렛과의 재회가 약속된 시간, 빈틈없는 면도와 함께 스킨을 아주 들이부은 후 레오폴드로 향했다.

 




 



전날 밤, 아니 당일 새벽, 영혼을 담보로 젊음을 거래한 파우스트처럼 어디 남는 알코올만 있다면 뭔들 아깝겠냐며 뭄바이 곳곳을 쑤시고 다니던 우리 일당을 오냐, 너희들 마침 잘 만났다며 몹시 불량스런 품행으로 반겨주려던 두 명의 덩치로 인해 영혼은 팔아도 목숨은 못 팔겠노라며 술이고 나발이고 황급히 꽁무니를 빼야 했던 굴욕을 잊지 않고자, 이날의 치욕을 반드시 씻어 내리고 다가오는 새날의 희망찬 새 역사를 창조하고자 다시 꼴라바거리에 집결,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술을 마실 것인가에 대해 전격대담을 열었으니 일단 서둘러 만나자는 의견이 선두를 치고 나서는 가운데 어딜 다녀와야 한다네, 차라리 오후에 보자네, 그때는 너무 늦다네, 그리고 거기 볼 거 하나도 없다네 만다네 왈가왈부가 벌어지는 와중,

 

 

“진, 너는 어때?”

불쑥 의사가 타진되었다. 나? 나야 아무 생각 없지.

 

“언제 어디서나 좋아!”

거기에 알코올과 바이올렛만 있다면.

 

 

고대하는 순간은 느지막이 당도해야 제맛인 법. 금방 나타나겠지 긍정하는 시간을 지나, 뭔 일 있는 건 아니겠지 우려하는 시간을 거쳐, 에이 설마 아니겠지 부정하는 시간을 넘어, 그래 결국 현실이란 이 모양이지, 이상과는 늘 이따위로 비껴가게 마련이지 체념하는 시간에 봉착한 즈음 짜잔, 빛나는 오라를 두른 바이올렛 오연한 자태를 뽐내시며 등장을 알려주시니 그로서 본격적인 무대의 막이 오르는 바, 전날이 호프집에서의 음주수다였다면 당일은 클럽에서의 음주가무였다. 레오폴드의 2층에선 시끌벅적, 알아먹을 수 없는 음악들이 데시벨을 높이는 사이 거두절미, 이리저리 닥치는 대로 맥주잔을 부딪치며 국적불문, 너나없이 친구 먹는 상황이 연달아 벌어져 다섯에서 시작한 술자리는 열두서넛에 다다르며 배낭여행자라는 명분 아래 사해동포주의를 웅변하기에 이르렀다. 넘치는 아드레날린과 날뛰는 스테미너를 감당할 길 없어 위스키 더블샷을 한잔 꽂아볼까, 바에서 대기하며 분방한 음악에 사지를 흐느적거리고 있자니 낯모를 가인들의 야릇한 미소가 수시로 전해져 씨익, 낯짝에 나이키 로고를 새기는 것으로 일면 자연스레 한편 느끼하게 응대하는 와중 바이올렛이 다가와 더블 두 잔을 주문하고 값을 치렀다. 건배 후 쾌조의 스트레이트!


 

“이거 오리지널이야?”

 


칠렐레팔렐레 풀어헤쳐 허리께에 출렁거리는 머리카락을 두고 누군가는 물었다. 이런 옷은 어디서 샀냐고 또 다른 누군가는 덧붙였다. 결국 넌 뭐하는 놈이냐는 신상면담으로 이어졌다. 암사자가 본다면 아이고 서방님 하고 달려들 쌍팔년도 갈깃머리와 난분분한 색색의 문양이 최면의 세계로 안내하는 타이트한 꽃무늬 셔츠와 품이 살벌하게 넓어 치마로 오인되는 꽃무늬 나팔바지의 삼위일체는 한 눈 감고 봐도 올곧은 시대이념으로, 반듯한 역사의식으로 무장한 모범청년과는 지대한 괴리를 표명하며 남다른 정신세계를 전면에 선언하고 있었던 바, 제정신의 부재를 증언하는 곡절의 스타일은 뭇사람들의 귀추를 주목시키기에 부족하지 않았고, 저간의 궁금증을 빌미로 접촉을 시도해오는 이들이 잦아 별 수 없이 들이켜야 했고, 솟구치는 주흥과 범람하는 취기를 감당하기 어려워 겸손하게 심신을 상실하기에 이르러야 했다.

 

 

그렇지, 나는 이런 인간이지. 잠시 깜빡했던 존재의 본질을 일깨워주는 왁자지껄한 술자리는 모처럼 만의 스텐딩 주(酒)법을 기폭제 삼아 여행자들과의 최적화된 교류를 이끌어냈으며 필요이상으로 볼륨을 높인 사운드는 터는 입과 듣는 귀를 한 몸인 양 밀착시켜 에두름 없이 찔러드는 응답과 인류애 가득한 스킨십을 유도했다. 알코올에 코카인이라도 섞었는지 헤픈 웃음들이 왁자하게 요동했다. 나 또한 그와 다를 수 없었다.

 

 

당연지사 웅혼한 기운은 재차 새벽으로 치달았다. 시종여일 사뿐하게 굴러가는 바이올렛의 음성은 달콤한 몽환으로 피어올랐다. 어느새 불을 내린 이국의 어둠, 한 개비 담배에 시간을 거스르고 또 잇따르는 상념이 기꺼운 소란을 일으켰다. 꿈인가 싶은 하루의 막바지, 실감했다.

 


나는 지금 거기가 아닌 여기 이곳에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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