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임마담. Chai의 사진)
미쳤다. 그 돈 주고 이걸 샀다고?
포켓볼 차례를 기다리며 맥주를 마시던 H는 단추 집 덧단을 따라 자수 꽃문양이 새겨진 중고 7부 청 셔츠를 가리켜 황당한 어투로 물었다. 그럼, 돈 주고 샀지, 정 주고 샀겠어? 되묻고픈 말은 모가지 아래에서 맴돌 뿐이었다. 마치 모자란 막냇동생 대하는 듯한 강압적 어투를 감안하자면 올바른 대꾸가 아니었다. 누가 보면 내란음모라도 자백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극렬한 난색이 지나가고 다음이 이어졌다. 이리 줘보라고, 나 한번 입어보자고.
이게 어떻게 들어가? 재차 전해지는 물음은 이전의 위세를 상회했다. 아니 그럼, 들어가지도 않는 옷을 왜 샀겠어? 뭐 누구 목이라도 조이게? 그러나 이 역시 입 밖으로 내보내지 못했다. 소매도 목 끝도 잠기지 않고 어깨선도 일치하지 않는, 그야말로 불세출의 우격다짐으로 제2의 피부처럼 입혀지던 셔츠는 H에게로 가 본연의 매무새를 찾았다. 그즈음 임마담의 질문이 던져졌다. 그거 어디서 샀냐고. 워낙에 시크하시고 말 수가 적은 탓에 나를 못 마땅히 여기는 것 아닌가 싶기도 했던 임마담과의 소통은 거기에서 시작되었다. 여하간 예쁜 거 좋아하신다들.
“아, 나 너무 못 한다.”
몇 번의 볼이 돌아가는 사이 무장 해제라도 당한 양 이전의 태세가 무색하도록 맥 빠진 음성이 토해졌다. 좀처럼 풀리지 않는 게임에 H는 자신에게 투정한다기보다는 나에게 핑계하듯 한마디를 털썩 내려놓았다. 아냐, 열심히 하면 할 수 있어. 그럼 파이팅! 이라고 말했다간 한구탱이 얻어맞을 것 같았다. 자신 있게 나선 것도 그렇고, 또 공 돌아가는 모양도 그렇고 그리 형편없는 실력이 아니란 게 한눈에 보였으니 그날따라 어긋났을 일이다. 문제는 그리 뛰어나지 못한 내 실력이 그날따라 족족 만발을 기록하고 있었다는 것, 허나 그 푸념이 주문과도 같았을까. 그때부터 쭉쭉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들어갈 듯 들어갈 듯 절묘하게 안 들어갔다. 부러 그런 것이 아닌지라 달리 어색함도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았으나 H는 끝까지 그렇지 믿지 않았다. 감사한 오해였다.
“그대, 한 게임 더 하실래?”
“우리 그냥 술 먹자. 나 와인이랑 맥주 사왔어.”
유리와 사기, 재질 불문한 컵에 고봉으로 따라진 와인을 부딪치며 원샷! 당최 와인을 무슨 맛에 마시는지 납득하지 못하는 내 우직한 주법에 동의를 표하면서도 던지는 시선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에라, 촌놈아. 주변으로 두엇이 더해지긴 했으나 술을 축내는 건 전적으로 나와 H의 몫이었다. 취흥은 서슴없이 올라 주거니 받거니 헛소리의 삼라만상이 총망라되었다. 어두워지기까지의 잡설을 축약하자면 나는 무리에 어울리지 못하는 고독한 늑대, 그러니 넌 내게 반하라, 따위가 되겠다. 주야를 불문하는 음주습관이 모처럼 매력적인 상대를 만나 잔은 거푸 젖혀졌다. 가망 없는 미래에 가로막혀 막나가는 두 남녀의 파멸을 묘사하기에 제법 용이한 그림이었다. 오후는 누수 되는 것처럼 쭉쭉 사이즈를 줄여갔다. 대기 중이던 것 모두를 해치우고 보무도 당당하게 3차에 나섰다. 어둑신한 사위를 쫓아 우리는 람부뜨리로 발길을 잡았다. 감싸 앉은 어깨에 엷은 찰기가 느껴졌다.
전사가 있었기 때문, 사실 내키지 않는 곳이었다. 허나 매양 그러하듯 나 같은 것의 취향이 무에 중요하랴. 에어컨이 본연의 임무에 성실하고 있는 실내 좌탁에 자리를 잡았다. 이에 덩치가 크고 배가 볼록하고 짧은 머리카락이 새하얀 밥집 사장이 나섰다. 다시 바도 인민의 피를 빨거나 채권추심에 능력을 발휘하는 이미지로 적합했다. 이미 취했을까, 자중자애를 다짐했건만 초장에 성미가 꿈틀거렸다.
“뭐 줄까?”
뭐 줄까? 상식적으로 손님에게 적합한 말본새가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내가 씨발 공으로 얻어먹으러 왔냐? 카오산에서 밥 파는 게 벼슬이야? 표정이 굳었다. 고개가 삐딱이 올라섰다. 대꾸가 좋을 리 없었다.
“김치말이국수 둘에 소주 하나.”
대답은 차고 짧았다. 기대했던 형태의 어투가 아니었는지 일순의 정적, 그 가운데 시선이 공중에서 얽혔다. 뭐? 어쩌라고? 무음의 작은 교전이 체념과 즉발의 경계에서 빠르게 명멸했다. 당혹 서린 분노에 괘심 어린 합리로 맞섰다. 결국 이성에 따른 무위로 귀결되자 테이블 아래로 툭, 발길질이 들어왔다.
“말 이쁘게 안 할래, 진짜!”
억울하다는 듯 울컥한 숨이 터졌다. 아...... H야, 예쁜데다 섹시하기까지 한 H야, 너나 제발 말 좀 이쁘게 해라. 오빠 반말 적응 안 된다. 내가 너보다 나이도 훨씬 많잖니. 내가 많은 거 바라니? 배꼽 맞추자고 사정하는 것도 아니잖니.
두어 잔의 소주가 바삐 돌았으나 안타깝게도 H는 이제 그만, 한계주량을 선언했고 내심으로야 실컷 마시고 같이 동물적 본능의 회오리 바다로 함께 뛰어들었으면 했지만 짐짓 점잖은 척하느라 술을 권하지 않았다. 대신 그럼 내가 마시지 뭐, 헤헤거리며 거푸 마셔젖혔다. 이리 줘, 내가 따라 줄게. 제 나름으로 비위를 맞추려는지 어울리지 않게 양손으로 따라내는 소주는 족족 잘도 넘어갔다. 머릿속엔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어쩌니 하는 노래가 펼쳐졌다. 임계치가 빠르게 다가섰다. 그 자리를 H가 계산한 것이 뚜렷했다. 그리고......
그밤, 나는 카오산에서 길을 잃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