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순 어둠이 내리치고 불쑥 바닥이 일어섰다.
봄날에 시작한 소쩍새의 울음이 한 송이 국화로 피어나듯 아침 점심으로 차곡차곡 살뜰히도 모아둔 취기는 어디 하나 내빼지 않고 어느 시점 일시에 만개해 전신을 단숨에 장악했다. 나사 풀린 태엽 장치처럼 사방 간 무작위로 흔들리는 가운데 그게 그거 같은 거리는 도무지 그게 그게 아니었다. 유년 시절, 도저히 반대편 출구를 찾을 길 없어 다 내려놓고 마냥 울어버리고 팠던 서울의 혼돈한 지하철이 연상되었다.
과연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 이 나이에 만취해 길 잃어버렸다고 미아보호소 신세를 지기도 뭣해서 눈먼 본능에 의지한 채 무작정 걸음을 옮기자 생판 안면 없는 낯선 거리가 무표정한 얼굴로 이물스런 거부감을 조장했다. 여긴 어디지? 통상 그러한 상황에서 자연스레 돋아나게 마련인 의문문에 휩싸였으나 문답무용, 제정신과 별반 관계없는 상태에서 솟구친 물음엔 역시나 마땅한 해답이 제공되지 못했다. 결국 서울에서와 마찬가지로 얼마 되지 않는 지점을 향해 택시를 집어탔으나 이런 젠장, 기사와 손님 간 소통 불화로 인해 목표한 지점 인근에서 내려 아이를 어르듯 집중하여 골목을 되짚어야 했다. 무사히 침대에 눕는다면 내일부터 착하게 살겠노라고 분연히 다짐했다.
폐허처럼 아득하고 전설처럼 까마득한 수면을 부표하는 사이, 아침은 덥석 하고 버선발로 들이쳤다. 부릅뜬 시아에 다닥다닥한 침대가 들어왔으나 의식은 인근을 부유하는 유령과 닮아 쉽사리 손에 닿지 않았다. 나지막이 움직여 전선병사의 절망이 담긴 몸짓으로 Where is Chai의 입구에 앉았다. 담배를 빼어 물고 한캔의 맥주를 손에 쥐었다. 사물이 천천히 조준되었다.
맥주를 홀짝거리며 간밤의 곤란한 귀가를 회고해볼까도 싶었으나 삭신에 별다른 문제가 포착되지 않으니 무사통과, 쓰라린 속사정을 굽어 살피고자 해장에 동참할 작당을 꾀하는 가운데 애써 떠오르려는 기억을 딱 잘라 매듭짓듯 목울대가 휘청거리도록 한 모금을 크게 삼켰다. 크아...... 멜랑꼴리한 하늘빛이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평생 아니겠냐는 듯 낙락한 잔질을 부추겼다. 돌아갈 날이 고작 며칠을 앞두고 있었다. 쭉 빨아들인 담배연기가 체내 깊숙이 난무했다. 위태로운 심신을 잠재울 독한 알코올이 구원처럼 절박했다.
“닭도리탕에 소주한잔 안 할라요?”
은행털이를 모의하자는 것도 아니건만, 그저 뜨끈한 국물에 아침을 나누자는 거였건만 단가를 볼모로 동행은 쉽사리 섭외되지 않았고 따라오면 의당 손수 계산할 터였지만 굳이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아 묵묵하던 와중, 더불어 H의 출현을 고대하던 그 와중, 짧은 머리카락에 어깨가 야무진 두 부산 사내가 입장했다. 도발과도 같이 예고 없이 치고 들어온 제의에 크게 당황했는지 대답이 길었다.
아 저, 저희가 이제 막 도착해서...... 씻기도 하고 정리도 좀 해야 될 것 같아서...... 변명이 공손히도 길었다. 아니나 다를까 운동깨나 했다던 두 사내는 도미토리에 올라 저 행님 안 멋지나? 같이 한잔 했으면 좋겠는데...... 지금이라도 가서 한잔 하자 하까? 어쩌까 하는 대화를 나눴다던가 뭐라던가. 그들과 일잔을 나누게 된 것은 조촐히 찌개 한 사발을 떠넣고 돌아와 H와 재회하고서였다.
“어디 갔다 오는 거야?”
그들과 셋이서 입구에 앉아 잡담 중이던 H는 물었다.
“당신 없어서 내 홀로 쓸쓸히 끼니를 챙기고 왔지. 점심은 자셨고?”
“아니, 아직.”
“그럼, 가시게. 닭도리탕에 소주나 한잔 하게.”
그리곤 시선을 그들에게 돌렸다.
“안 바쁘믄 같이 가십시다.”
카오산에 신참으로 입성한 한인식당 동해는 맛이 나름 성의가 있었다. H는 닭도리탕 대신 단출한 분식 몇 가지를 주문했고 두 사내는 기다렸다는 듯 술잔을 돌렸다. 모난 데 없으나 날카로운 기색이 배인 인상과 다부진 체격으로 가늠하자면 지역사회의 지하경제 창출에 이바지할 것 같았으나 제법 있는 집 자식들이고 꽤나 배운 친구들이었다. 성격도 호탕해 더럽게 대범한 척하는 나와 꿍짝이 맞다고 여겼는지 술자리는 급속도로 활발해졌다. 그러던 중 의심하지 못했다는 듯 물었다. 아 그럼, 이 분이 여자친구가 아니세요?
하기야 H와 나의 외적 분위기를 감안하자면 연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외려 어려웠을 일이다. 이 아가씨 예쁘잖아, 안 그런가? 네, 정말 예쁘십니다. 그래서 예뻐하는 거야, 따위의 질의응답이 오가던 중 뭘 좀 드시라는 권유를 물리고 소주를 털어 넣자 고개도 돌리지 않은 상태로 쑤욱 다가서는 H의 손짓에 의해 김밥하나가 입에 들어왔다. 그야말로 쑤셔 넣어진 순간은 그냥 닥치고 먹으라는 듯 단호했고 또 미끈했다. 손목을 걸어둔 H의 어깨맨살엔 순도 높은 탄력과 매끄러운 찰기가 굳건했다. 오후는 과열되어 걸었다.
내 남자친구는 키가 183에 몸무게가 100킬로가 넘어. 그런 남자가 내 취향이야. 뭘 알고나 들이대.
어느 즈음이었을까? 어쨌거나 분명히 느닷없고 적잖이 뜬금없는 타이밍, 취기나 투정이라면 수긍하겠지만 회피나 다짐이라면 일종의 룰 위반이다. 그러나 생각은 나중에, 특유의 능글맞은 언동이 공백을 불허하고 뒤를 채우려했다. 근데, 당신은 내가 왜 좋은 거냐고......
출시 임박에 다다른 물음은 돌연 꿀꺽 삼켜졌다. 아무려면 어떻겠는가 하는 초월이었는지 낙락한 미소만이 무럭무럭 부풀었다. 두루 출렁거리던 충만이 코끝에 차올라 흔쾌히 시큰했다. 유유히 고개 돌리자 여전히 그녀의 어깨를 노니는 손목 너머로, 이따금씩 표면을 두들기는 손가락 끝으로 물기를 지우고 얼굴을 바꾼 카오산이 새하얗게 작열하고 있었다.
시간은 오지 않을 것처럼 흘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