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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n Dec 10. 2020

금이빨 삽니다

3

전화가 왔다는 휴대전화의 진동이 영준을 깨웠다. 만약 받지 않으면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번엔 정말 어머니에게서 온 전화였다. 영준은 잠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영준아~ 택배는 받았니?”


순간 영준은 무의식적으로 택배기사의 통화연결음을 따라 흥얼거릴뻔했다.


“기사님한테 전화를 해봤는데 안 받더라고요. 이따가 다시 해볼게요.”


“내가 직접 해봐야겠어.”


“아니에요. 바쁘실 텐데 신경 쓰지 마세요. 뭐 금방 도착하겠죠.”


“아니다. 내가 직접 연락해서 확인해봐야 할 거 같아.”


“제가 지금 바로 다시 전화해보고 알려드릴게요.”


"그래... 근데 방금 일어났니? 출근 안 했어?"


"아... 요새 고생했다고 팀장님이 하루 쉬라고 그러셔서..."


"새로 오셨다는 팀장님이 좋은 분이구나. 저번에도 그렇게 쉰 날이 있지 않았니? 아이고 엄마! 거기다가 쉬하면 안돼요. 영준아 안 되겠다. 순희 할머니가 또 아무 데나 오줌을 누신다. 빨리 치우러 가야겠다. 이만 끊을게."


전화 너머로 누군가 어머니에게 욕지거리를 하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순희 할머니는 어머니가 돌보시는 치매환자 중 한 분인데 어머니 말로는 외할머니가 살아 계셨으면 지금 딱 그 연세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순희 할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며 딸처럼 살갑게 대하시는 것 같았다. 어머니의 ‘새’ 엄마는 다른 환자보다 상태가 좋으셔서 혼자서도 거의 모든 일상생활이 가능하셨다. 하지만 그걸 단번에 상쇄시키는 가장 큰 문제가 하나가 있었다. 바로 소변이 마려울 때면 아무 곳에서나 일을 보신다는 것이었다. 어렸을 적 영준도 동네에서 제일가는 오줌싸개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어머니는 지금도 노상방뇨 범들의 범죄현장을 수습하느라 고생이셨다. 어머니와 통화를 마치고 바로 택배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여전히 어제 들은 통화연결음만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어쩔 수 없이 택배회사 콜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영준은 보통 중요한 컴플레인이나 문의사항이 있는 게 아니면 고객상담센터 같은 곳에 전화하는 것을 꺼려했다. 그런 종류의 통화를 하는데 익숙하지 않기도 했지만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를 다그쳐야 하는 상황을 마주하는 게 싫었다. 하지만 서른이 넘은 아들을 대신해 어머니가 택배가 언제 오는지 문의하도록 알고도 내버려 두는 건 더욱 싫었다. ARS의 안내에 따라 4단계 절차를 거쳤지만 모든 직원이 다 상담 중이라 십여분은 더 기다려야 한다는 안내 멘트가 나왔다. 기다리는 동안 성난 고객님들의 기분을 차분하게 만들려는 듯 차분한 곡조의 클래식이 흘러나왔다. 영준은 화가 난 건 아니었지만 깊은 숲 속 연못에서 휴식을 취하는 기분이 들게 만드는 음악을 계속 반복해서 듣고 나니 오히려 자신이 상담원에게 상담을 해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언제나 행복과 사랑을 전하는 OO택배 고객만족센터 이지원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영준은 한껏 과장된 친절함이 묻어나는 상담원의 목소리가 ARS보다 더 기계음 같았다.


“아... 제가 엊그제 택배가 도착한다는 문자를 받았는데 아직 못 받아서요. 문자메시지에 있는 기사님 번호로 전화를 걸어도 안 받으시더라고요.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아보려고 연락드렸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고객님. 저희 서비스를 이용해주시는데 불편을 드린 점 너그러운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으신다면 고객님 성함과 운송장 번호 또는 주소 확인 가능하신가요?”


영준은 운송장 번호를 외우지 않았기에(운송장 번호를 외우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름과 주소를 불러주었다. 전화 너머로 상담원이 키보드를 따닥따닥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음... 저희 배송추적 시스템상에서는 배달완료로 확인되었는데요. 전산상 오류 일 수도 있으니 저희 쪽에서 직접 시스템관리팀과 기사님께 확인해 보고 다시 연락드려도 괜찮을까요?”


“네, 그렇게 해주세요.”


“다시 한번 저희 서비스 이용에 불편을 드린 점 송구의 말씀 전하며 상황 파악되는 대로 전화주신 이 번호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언제나 행복과 사랑을 전하는 OO택배 고객만족 센터 상담원 이지원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행복과 사랑을 전한다는 회사의 상담원은 감정이 전혀 없는 사람처럼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영준의 머릿속에 몇 해 전부터 콜센터 상담원들이 당하는 언어폭력에 대한 뉴스가 떠올랐다. 고객이라는 감투를 쓰고 마치 상담원들이 자신의 노예인 것 마냥 막대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 듯하였다. 남의 집 귀한 자식들이 매일매일 일면식도 없는 무례한 사람들에게 자신이 하지 않은 잘못에 대해 사과를 하고 있다. 어떤 이는 다 돈 받고 하는 일인데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지 않겠냐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매일매일 남의 불평불만을 받아내는 일을 하는 그들이 마땅한 대우받고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 영준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었다. 상담원에게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던 건 어쩌면 일을 하는데 자신의 감정을 차단하고 기계적처럼 반응해야 그나마 하루하루 버틸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방금 통화한 상담원은 이 제도권 사회의 회사들이 원하는 프로였다. 전화를 마치고 영준은 어머니에게 택배회사에 문의했으니 답이 오는 데로 알려드리겠다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잠이 싹 달아나버렸다. 영준은 샤워를 하고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집 근처 카페에 가서 공부를 할까 하다 문득 생각나는 곳이 있었다. 바로 5년 전에 살던 그 거리였다. 전에 살던 거리는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지하철 역을 중심으로 반대편이었는데 신기하게도 그쪽으로 갈 일이 없었다. 학교를 졸업한 뒤로 직장 때문에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갔었다. 하지만 서울 생활을 처음 시작한 동네라 그런지 알 수 없는 힘에(혹자는 우주의 기운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지만) 이끌려 다시 이 근처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돌아온 거리는 초입부터 전에 볼 수 없던 세련된 외관의 식당과 카페들이 영업 중이었다. 원래 이 거리는 여느 동네에서 볼 수 있는 주택가 골목시장이었는데 지금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명소로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영준은 자신의 기억을 의심하게 되었다. 도무지 영준이 살던 시절 거리의 남아있는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거리의 중간쯤 왔을 때 새로 지어졌다는 이 거리의 이름이 도로 한가운데 하얀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에 영준은 허탈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눈을 부릅뜬 채로 거리의 끝부분에 다다를 무렵, 허름한 점포가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가서 보니 분식점 같았다. 바로 그녀가 영준의 자취방에 놀러 올 때 종종 떡볶이를 사 오던 그곳이었다. 그녀는 이 동네에서 이 분식점 떡볶이가 제일 맛있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의 매대에는 먹음직스러운 새빨간 떡볶이도 갓 튀겨 기름이 반질거리는 튀김도 비닐을 들어 올리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순대도 보이지 않았다. 빛바랜 메뉴판만이 전에 이곳이 분식점이었다는 것을 알려줄 뿐이었다. 매대와 내부 홀을 구분하는 유리창문에는 얇은 하얀 종이가 한 장 붙어 있었다. 그 위에 한눈에도 바르게 쓰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임차인 구함’


유리창에 붙은 종이는 요새 구하기도 어려운 뜯어 쓰는 달력의 낱장인 것 같았다. 희미하게 비치는 날짜는 바로 엊그제였다. 영준은 막차를 놓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바로 근처였는데... 며칠만 일찍 왔다면 그녀와의 추억이 남은 곳을 마지막으로 직접 볼 수 있었다. 영준은 아쉬움 마음에 분식집 앞에 한참을 그 앞에 서있었다. 발길을 돌리려던 영준의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키가 훤칠한 청바지에 흰색 티셔츠를 입은 여자가 영준처럼 분식점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어제 로스터리를 찾아왔던 여자였다. 복장이 달라져서 인지 어제와는 분위기가 너무도 달랐다. 마치 성격이 다른 일란성쌍둥이 자매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낯선 이의 눈빛을 따가웠는지 자리를 피하려다 영준을 알아보고는 두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의 얼굴은 학교 다닐 때 사귀었던 동기를 십 년 만에 처음 만나는 듯 놀라는 표정이었다.


“어? 혹시 어제? 그 지하???”


“네! 맞아요. 어젯밤은 잘 쉬셨나요?”


“아... 네... 덕분에... 근데 이 근처 사시나 봐요?”


“아뇨. 예전에 8년 정도 살았어요. 지금은 역 건너편 쪽에 살아요. 어제 오신 사무실이랑도 가까워요.”


“정말요? 저는 그쪽에서 산지가 10년도 넘었는데 사실 어제 그런 곳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사실 저도 매일 지나가는 거리인데 일을 구하다가 처음 알았어요. 그 근처 사신다면 지나가다 몇 번 마주쳤을 수도 있겠네요.”


“음... 제가 워낙 야근이 많아서 아마 마주치지는 않았을 거예요.”


순간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기운이 흘렀다. 여자는 자신이 영준의 말을 끊은 것 같아 뜨끔하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다시 대화를 잇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여기 분식점 알고 있었어요?”


“아... 학교 다닐 때 자주 왔던 곳인데... 이제 닫았나 보네요...”


“며칠 전에 마지막 영업을 했대요.”


“자주 오셨나 봐요?”


“예전에 만나던 남자 친구가 이곳을 좋아했어요. 그 뒤로도 간간히 오다가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들어서 왔는데 한발 늦었네요. 저번 주말에 갑자기 클라이언트가 빅엿을 주셔서 그제까지 연일 밤을 새웠어요. 덕분에 오늘은 쉴 수 있게 되었지만 마지막 모습을 놓쳤네요. 근데 말로만 듣다가 진짜 이렇게 닫힌 걸 보니까 확실히 실감이 나네요.”


“원래 이 동네 출신이세요?”


“아뇨. 학교 때문에 올라왔죠. 말투에 사투리가 남아있지 않나요? 근데 뭐 이제 서울에 산지도 십 년 가까이 되다 보니까 이젠 여기가 제 고향 같아요. 그래서인지 쉽게 벗어날 수가 없네요.”


“이 근처 학교 다니셨나 봐요?”


“어? 그쪽도? 혹시 학번이?”


“전 07학번입니다.”


“선배님이시네요. 전 10학번이에요.”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긴 데요. 정말 작업 거는 거 아니고요. 괜찮으시면 같이 점심 드실래요?”


“걸어도 돼요. 어차피 제가 거절하면 되니까요. 농담이고요. 음... 그럴까요? 어차피 점심 먹으러 나온 거기도 하고”


“어떤 거 드실래요?”


“순대국밥 어때요?”


“그래요? 이 근처에 정말 괜찮은데 하나 있는데”


그녀가 이끈 곳은 영준이 자주 다니던 단골 순대국밥집이었다.


“순대국밥 먹자고 한 것도 신기했는데 여기로 오게 될 줄은 전혀 생각도 못했어요.”


“그래요? 제가 순대국밥을 좋아할 것 같아 보이는 스타일은 아니긴 하죠.”


여자는 확실히 어제와 달리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옷차림 하나로 하룻밤 사이에 사람이 저렇게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 신기했다. 여자는 자신을 구속하고 있던 껍데기를 뚫고 나온 하얀 나비 같았다.


“오! 정말 대단해요!”


“에이 뭘요. 퇴사 한번 한 게 뭐 대수인가요. 근데 왠지 전문직이실 것 같은 느낌을 받긴 했는데 변호사님이실 줄이야.”


“그냥 일개 어쏘 변호사인걸요. 내일 출근하면 화장실 앞에 책상이 옮겨져 있을 수도 있어요. 농담이에요. 여하튼 전 그쪽이 부럽네요. 퇴사도 그렇고 하고 싶은 일도 하고 있고.”


“그런가요? 전 그냥 현실도피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갑자기 어깨가 으쓱해지는 기분인걸요.”


“전 지금까지 마음 가는 데로 살아본 적이 없어요. 그냥 남한테 인정받을 수 있는 선택들만 하면서 살아왔어요. 정작 제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네요.”


“변호사님은 뭘 하시더라도 성공하실 것 같은데요.”


“사실하고 싶은 게 없어요. 이제 곧 서른인데 이렇게 무식하게 살아왔다니... 바보 같죠?”


웃으면서 말하고 있긴 했지만 그녀의 씁쓸한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 여자는 어제 커피에 대한 감사인사로 자신이 밥값을 내겠다고 하였다. 그녀 손에 들린 지갑이 영준의 눈길을 끌었다. 닳고 닳은 빨간 합성 방수포에 청테이프를 비스듬히 붙인 것 같은 디자인이었다.


“혹시 프라이탁?”


“어? 이 브랜드를 알아요?”


영준은 몸을 돌려 자신의 백팩을 여자에게 보여주었다. 그제야 여자가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실례가 안된다면 지갑 한번 구경해도 될까요?”


"지갑 안을 다 뒤져봐도 제가 변호사라는 증거는 없을 거예요."


여자는 입꼬리가 올라가게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지갑을 영준에게 건넸다. 영준이 신기한 듯 지갑을 두 손으로 들고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여자는 영준의 그러한 천진난만한 표정이 재밌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여자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전화가 온 것 같았는데 그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누군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에게 달가운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여자는 전화를 받아 짧게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바로 끊었다.


“죄송한데 급한일이 생겨서 가봐야 할 것 같네요.”


“괜찮아요. 얼른 가셔야죠. 쉬는 날인데도 제대로 맘 편히 못 있으시네요.”


여자는 영준에게 미안한 표정을 짓고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탔다. 택시가 막 출발하려는데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여자가 창문을 내리니 영준이 웃으며 서있었다.


“혹시 두고 가신 거 없어요?”


영준이 여자의 지갑을 흔들었다. 여자는 놀라는 눈빛과 함께 감사하다고 말하며 지갑을 받았고 택시는 곧바로 출발하였다. 영준은 가만히 서서 택시가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았다. 발걸음을 떼려고 하는데 문자메시지가 왔다.


‘내일 오후 1시에 괜찮을 것 같습니다’


후배가 소개해준 헤드헌터였다. 어제저녁 늦게 연락을 했는데 이제 답장이 온 것이다. 내일 뵙겠다는 답장을 보내고 근처 카페로 향했다. 평일 낮시간인데도 사람들이 가득했다. 자리를 잡고 책을 폈지만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아까 전화를 받던 여자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전에 딱 한번 다른 이에게서 그런 표정을 본 적이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주겠다고 말하며 갑자기 사라졌다. 하지만 영준은 지금까지 그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아마 영영 듣지 못할 것 같다. 찌릿하는 통증이 또다시 찾아왔다. 영준은 가방에서 약봉투를 꺼내 봉지 하나 뜯어냈다. 약을 입안에 넣고 커피를 마셨다. 다시 책을 붙잡았지만 배불리 점심을 먹어서인지 약 때문인지 나른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카페 안에 앉아있을 수가 없을 정도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영준은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와 큰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오래간만에 미세먼지가 없는 하늘을 보니 가슴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가뿐 호흡도 진정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한강공원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보였다. 영준이 서울에서 제일 좋아하는 곳 중 하나가 바로 한강이다. 가끔 답답할 때는 혼자서 따릉이를 타고 한강공원을 찾았다. 쉴 새 없이 흐르는 강에 버리고 싶은 것들을 던지는 상상을 했다. 그러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영준은 방금 걸어온 길을 종종 그녀와 함께 걸었다. 왠지 그녀와 함께 했던 기억들은 저 강에 던져버린다고 해도 절대 바다로 흘러가지 않을 것 같았다. 그 기억들은 닻이 달린 부표처럼 순간순간 사라진 듯하더라도 항상 같은 자리에서 불쑥 튀어나와 영준에게 그녀를 떠올리게 만들 것이다. 그날, 그녀는 누굴 만나러 갔던 것일까? 수년이 흘렀지만 영준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평소와 다른 사람 같은 얼굴로 사라져 버리고 그 뒤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영준은 아무리 연인 사이라 할지라도 서로에게 말 못 할 이야기가 있다고 믿었고 그걸 캐묻는 건 상대를 다치게 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야 그녀가 사라진 뒤로 먼저 연락을 하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강변 산책로를 따라 꽃봉오리에서 막 터져 나온 갖가지 색의 꽃들이 바람에 흔들거렸다. 이 형형색색의 친구들은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다. 계절이 바뀌면 완전히 사라졌다가 다시 자신의 시간이 돌아오면 짠! 하고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영준은 한두 번 당하는 게 아닌데도 또 바보같이 당해버렸다. 하염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2호선 동쪽 끝까지 다다랐다. 봄이 한창인 데도 해가지고 나니 살갗에 스치는 바람결이 차가웠다. 집으로 걸어 돌아가기엔 발바닥이 너무 욱신거렸다. 영준은 근처 가장 가까운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열차에 몸을 싣고 자리에 앉았는데 전화가 왔다.


“영준!!! 어디야~~~?”


전화로도 술냄새가 확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사장이었다.


“네? 저 지하철인데.”


“어디 갔다 왔어?”


“그냥 한강 따라 걷다 보니까 너무 멀리 와서 지하철 타고 돌아가고 있죠.”


“가만 보면 영준 씨는 생긴 것과 다르게 참 감성적인 구석이 있단 말이야. 술 약속 없으면 사무실로 와서 나랑 한잔해요. 축하할 일이 생겼어!”


“설마... 로또 당첨되신 거 아니죠?”


“됐다면 내가 영준 씨한테 연락했겠어?”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았다. 사장이 로또 1등이 당첨됐다면 아마 영준에게 사무실을 맡기고 카리브해의 이름 모를 한적한 해변에 칵테일 바를 차릴 것이다. 영준의 머릿속에 매일매일 전 세계에서 온 근육질의 구릿빛 미남들과 파티를 즐기며 행복해하는 사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왜 말이 없어? 아무튼 얼른 오세요~  30년 산 스코틀랜드 싱글몰트 위스키 다 마셔버리기 전에.”


그렇게 사장은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영준은 로스터리에서 두 달 넘게 일하면서 사장과 술을 마신적은 없었다. 사장은 보통 영준보다 먼저 퇴근했는데 이유는 딱 두 가지였다. 하나는 유치원이 마칠 시간에 아이를 데리러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친구들과 술 약속이었다. 사장은 2년 전에 이혼해서 지금은 혼자 5살짜리 여자아이를 키우고 있는데 가끔 영준에게 아이와 얽힌 웃긴 이야기를 해주었다.


“엊그제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들이랑 저녁 약속이 생겨서 아이를 봐달라고 엄마를 불렀어. 목욕을 시키고 저녁을 먹인 다음에 일찍 재웠어. 내가 나가는 거 보면 따라간다고 떼를 쓸까 봐.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하고 결혼 전에 자주 입던 착 달라붙는 청바지도 다시 꺼냈어. 예전보다 몸이 불어서 조금 타이트하긴 했지만 그래도 못 봐줄 정도는 아니어서 조금 뿌듯하더라고. 준비를 마치고 막 나가려는데 방에서 자고 있어야 할 아이가 현관 앞에 서있는 거 아냐? 순간 야자 튀다가 교무주임한테 걸렸을 때랑 비슷한 기분이 들었지 뭐야? 여하튼 나가기 글렀구나 생각하는데 얘가 나를 보를 보고 뭐라고 했는지 알아?”


“뭐라고 했는데요?”


‘엄마 남자 친구 생겼어?’


“내가 거기서 뒤로 나자빠질 뻔했지 뭐야. 5살짜리 아이가 엄마한테 남자 친구 생겼냐고 물어보다니! 내가 사실 우리 아기한테 이혼이란 걸 설명하기 어려웠어. 그래서 아빠한테는 여자 친구가 생겨서 더 이상 함께 살 수 없는 거라고 그랬거든. 남자 친구나 여자 친구가 생기면 원래 가족과 함께 못살게 되는 거라고 말이야. 그런데 그날 내가 밤늦게 나가려고 하니까 나한테 남자 친구가 생겼는 줄 알았나 봐. 아이 아빠가 예전에 밤늦게 그년을 만나러 나가는 일이 많았거든. 그래서 내가 그런 게 아니라고 친구들 만나러 간다고 말하려는데 갑자기 애가 울기 시작하는 거야. 이제 엄마랑도 같이 못 사는 거냐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엉엉 우는데 얼마나 귀여운지. 나중에 애가 우는 소리를 듣고 자다 깬 엄마가 자초지종을 듣고 내 등짝에 스매싱을 날리는데 정말 아프더라. 엄마는 너는 어떻게 네 딸이 우는데 거기서 웃음이 나오냐고 야단치시면서 본인 뱃속에서 나왔지만 아직도 네 아빠처럼 너는 이해할 수 없다고. 뭐 엄마한테는 예전부터 그런 딸이었으니까 상관없는데 영준 씨가 보기에도 내가 우리 아기한테 이상한 엄마일까?”


영준은 대답 대신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분명 평범한 엄마는 아니다. 어린 나이에 가정을 꾸려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아직 즐기고 싶은 것들이 많아서 일수도 있다. 사장이 영준과 같은 나이라는 걸 떠올리면 충분히 그럴 만도 하다. 어쨌든 혼자서라도 아이를 키우겠다고 결심하고 지금까지 잘해오고 있는 걸 보면 이상할 수도 있지만 충분히 좋은 엄마라고 생각되었다. 사무실에 도착하니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평소에 바닥을 비추는 조명들이 죄다 벽이나 천정을 비추고 있었다. 같은 공간이었지만 마치 전혀 다른 같았다. 진공관 앰프가 연결된 스피커에서는 빌리 조엘의 <Just the way you are>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장은 종종 유튜브로 빌리 조엘의 노래를 틀었다. 영준은 당장 사장을 설득시켜 라운지 바로 영업하면 지금보다 매출이 두배 이상 뛸 것 같다고 말하고 싶었다. 확실히 로스팅만 하기에는 아까운 곳이다. 영준은 입구에 서서 감미로운 음악과 함께 술잔을 앞에 두고 불타는 눈빛을 주고받는 남녀 커플들을 상상해 보았다. 그때 주방에서 사장이 프라이팬을 들고 나왔다.


“오! 타이밍 딱 맞췄네? 저녁 먹었어?”


얼굴이 약간 달아오른 사장이 뒤집개를 흔들었는데 기름이 사방으로 튀었다. 영준은 저 기름 자국을 닦는 자신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아뇨 아직...”


“잘됐네. 혼자 먹기엔 좀 많이 했거든. 내가 우리 엄마 닮아서 손이 크걸랑.”


사장은 바 테이블 위에 코르크 받침을 깔고 그위에 프라이팬을 올렸다.


“이게 뭐예요?”


“맞춰봐!”


“기름탕에서 반신욕 하는 새우들?”


“뭐야~ 진짜 술이 확 달아나네. 이거 몰라?”


“네 몰라요.”


“감바스 알 아히요! 보통 감바스라고 부르는데 진짜 한 번도 안 먹어봤어?”


“전 새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근데 이런 요리도 하실 줄 알아요?”


“이건 스페인에서 5살짜리 아이도 만들 수 있는 요리야. 연애하면서 이런 것도 먹으러 안 다녔어?”


“전에 사귀던 여자친구랑은 떡볶이를 좋아해서...”


“아... 내가 오지랖이 심했나? 얼른 앉아.”


“근데 먼저 그 귀한 위스키부터 한번 마셔보고 싶은데요.”


“그래~ 근데 치료 중인데 술 마시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조금만 마시면 괜찮데요. 그리고 쉽게 마실수 없다는 위스키인데 맛이라도 봐야죠.”


사장은 신이 나서 탕비실로 들어가 반 정도 남은 위스키와 얼음통을 가지고 나왔다. 영준이 오기 전에 사장은 혼자서 반 병이나 마신 것이 분명하였다.


“샷? 온 더 락? 하이볼? 미즈와리?”


“온 더 락으로 주세요.”


“오~ 온 더 락! 소주만 마신 건 아니네.”


사장은 빙하가 떠다니는 금빛 액체가 담긴 잔을 영준에게 건네주었다. 아까 문 앞에서 영준이 상상한 것처럼 이곳이 멋진 라이브 바로 바뀌었다. 마침 스피커에서 <Piano Man>이 흘러나왔다. 역시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위대하다. 사연이 있는 듯한 여사장과 젊은 남자 손님 그리고 빌리 조엘... 지나간 90년대 한국 로맨스(aka 불륜조장) 영화의 한 장면에 있을 법한 클리셰다.


“근데 축하할 일이 뭐예요?”


“아... 전남편이 재혼했어!”


사장은 마치 자신과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일인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샷잔에 위스키를 가득 따라 스트레이트로 마셨다. 사장의 얼굴에 위스키가 목을 타고 넘어가는 게 그대로 나타났다. 영준은 그 모습이 귀엽다고 느껴졌다.


“전남편을 정말 사랑했나 봐요?”


“한때 그랬지... 안타까운 건 그게 다 부질없었다는 걸 불장난에 생긴 애가 5살이나 돼서야 알게 되었다는 거야. 엄마가 전 남편이랑 연애할 때부터 별로 안 좋아했었는데... 애가 생겼다는 얘기를 듣고는 나를 완전히 포기하시더라고. 그때 엄마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그건 그렇고 얼마 전에 전 남편한테 연락이 왔어. 혹시나 하고 기대를 안고 만나러 갔지. 근데 그이가 재혼한다고 하더라고. 그 얘기를 듣자마자 화가 났어. 내 인생 이렇게 만들어놓고 어린 계집애 만나서 새 출발한다고 하니 말이야. 내입으로 이런말 하긴 그렇지만 그이가 외모도 되고 돈도 잘 벌고 하니까 이혼남인데도 그 여자애도 확 넘어간 거지. 근데 오늘 그이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니까 갑자기 마음이 편해졌어. 다시 합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으니까. 마치 수년 동안 앓던 이가 빠진 것 같은 기분이야. 결국 빼지 않으면 잇몸을 망가트릴 이를 그 사람이 빼준 거야. 요새 임플란트도 많이 저렴해졌다는데 가성비 괜찮은 걸로 하나 새로 심을까? 이미 그 사람은 반짝반짝 빛나는 신제품으로 새로 했으니 그 정도는 괜찮겠지?”


영준은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잇몸뼈가 녹아내리면 임플란트조차 어렵다고 하였다. 잇몸이 시린 것이 느껴졌지만 영준은 잔에 남은 위스키 비워냈다. 눈을 감으니 식도을 타고 용암이 흘러내리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그런데 그때 용암은 아니지만 따뜻한 감촉의 무언가 입술에 닿았다. 영준이 눈을 뜨자 사장이 그에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영준이 화들짝 놀라 두 손으로 사장을 밀쳐냈다. 뒤로 넘어질 뻔하다 중심을 잡은 사장은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 채로 웃었다.


“미안...”


“갑자기 뭐예요?”


“입 맞춰 달라고 눈 감은 게 아니었어?”


“네?”


“취해서 실수한 거라고 변명하지 않을게. 사실 영준 씨를 처음 만난 날부터 입 맞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다른 남자들 그리고 전 남편에게서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라 나도 놀랐어. 매일매일 영준 씨를 볼 때마다 불쑥 튀어나오는 욕망을 다스리려고 노력했지만 정말 쉽지 않더라고. 그런데 오늘 같은 날은 자연스럽게 영준 씨가 나에게 먼저 다가와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부풀었어. 근데 영준 씨가 눈을 감은 순간, 나도 모르게 먼저 해버렸네. 정말 미안해. 이제 그만 돌아가도 좋아. 혹시 불편했다면 다시 안 나와도 괜찮아. 월급 정산은 걱정 말고...”


사장은 다시 위스키를 따라 원샷을 하였다. 그리고 테이블에 고개를 파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곧이어 바닥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때 누군가 사장을 뒤에서 껴안았다. 영준이었다.


“울지 말아요. 사장님이 잘못한 거 없어요. 만약 있다면 타이밍이 정말 형편없었다는 거예요.”

사장은 뒤를 돌아서 영준을 바라보았다. 사장을 바라보는 영준의 눈빛이 아까와는 달리 따뜻했다. 사장이 고맙다고 말하려는 순간, 영준이 먼저 입술을 들이밀었다. 사장은 아주 천천히 영준을 따라 입술을 움직였다. 영준도 사장을 처음 본 순간, 비슷한 끌림을 느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해보려고 하지는 않았다. 지금보다 어린 시절처럼 그저 지나가는 욕정에 휩쓸리려 본능적인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자신이 그대로 나가버린다면 사장이 어떻게 될지 걱정되었다. 사장이 눈물을 떨구는 걸 보았을 때 영준은 오늘 밤은 사장의 곁에 있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부둥켜 앉은 채 소파로 향했다. 그리고 천천히 서로의 몸을 덮고 있는 옷들을 벗기기 시작했다. 빌리가 감미로운 목소리로 <She’s Always a Woman>을 부르고 있었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미끄러져 들어갔다.


꿈속에서 영준은 치과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큰길과 골목이 이어지는 길목에서 용달 탑차가 갑자기 튀어나온 그를 발견하고 핸들을 꺾었다. 차의 한쪽 바퀴가 공중에서 크게 헛돌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빠른 속도로 달려오던 고급 외제 SUV가 탑차를 들이받았다. 도로에서 두세 바퀴 구른 뒤에야 탑차가 멈췄다. 충돌로 인해 탑차의 뒷문이 활짝 열렸고 안에 들어있던 상자들이 도로 위에 튀어나와 나뒹굴었다. 달려오던 차들이 멈춰 섰고 사고 현장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탑차 운전석 옆에서 누군가 주위 사람들에게 다급하게 무어라 외쳤다. 사람이 너무 많이 모여 운전사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기 어려웠다. 영준은 좀 더 가까이 가서 보기 위해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중간 정도 뚫고 들어가는데 영준의 발에 무언가 걸렸다. 탑차에서 뛰어나온 상자들 중 하나인 듯하였다. 스티로폼 상자에 붙은 운송장 쓰인 이름이 익숙하였다. 그 상자는 바로 어머니가 보내신 것이었다. 영준이 상자에 손을 뻗으려는데 누군가 영준보다 먼저 집어 들었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그 사람을 확인한 순간, 영준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영준아~ 늦었지? 엄마가 미안해.”


얼굴에 피가 흘러내리는 그의 어머니가 상자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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