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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n Dec 14. 2020

금이빨 삽니다

5

영준은 날카로운 통증을 느끼며 잠에서 깼다. 곧장 화장실로 가서 가글로 입을 헹궜다. 거울에 비친 얼굴에는 뭔가 흐른 자국이 보였다. 꿈 때문인지 통증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눈물을 흘린 것 같았다. 더 이상 먹을 약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어금니를 붙잡고 있을 수 없는 상황 같았다. 영준은 오후에 치과 예약을 잡았다. 오늘도 자정까지 제출해야 하는 이력서가 하나 있어 밖으로 나왔다. 사장님이 취미로 하는 카페는 문이 닫혀있었다. 카페 앞에 있던 자전거가 보이지 않았다. 역시 장식용이 아닌 듯싶었다.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이 북적북적한 근처 브랜드 카페에 들어갔다. 지원하는 회사에서 이력서를 보고 군침을 흘릴만한 이야기를 잘 버무려야 하는데 아직 영준에게 그런 손맛이 부족하였다. 여전히 졸업학기 학부생들이 쓸만한 공상과학 이력 소설을 반복해서 쓰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 인터넷으로 뉴스를 찾아보았다. 언제나 원색적 비난이 난무하는 시끄럽고 어지러운 정치섹션은 건너뛰고 경제, 사회 관련 페이지를 클릭했다. 헤드라인들을 훑어보다 한 기사 제목이 영준의 눈울 사로잡았다.


‘늘어나는 새벽•당일배송 보장, 택배기사 안전은 누가 보장?’


최근 몇 년 새 급속도로 성장 중인 이커머스 시장의 온라인 배송 서비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택배기사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는 뉴스였다. 택배기사의 임금은 배달 건당 수수료를 받는 시스템이라 본인이 원하면 얼마든지 많은 물량을 할당받을 수 있는데 최근 업체들이 새벽•당일배송과 같은 특급 서비스를 보장하면서 택배차량의 교통사고 건수가 늘어나고 있다는 추세라고 하였다. 그로 인해 택배 운송노동자들의 안전이 위협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종 민원과 문제들이 발생하는 현실이므로 관련 업계와 정부의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전했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주위에서 밤이고 낮이고 새벽이고 가릴 것 없이 택배차량이 오고 가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어떤 택배기사의 연수입은 1억이 넘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허튼소리가 아닌 것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받으려면 분명 엄청난 배달량을 소화해야 할 것이다. 식사도 제때 챙기지 못하고 휴식이나 잠도 충분히 누리지 못한 채 하루 종일 택배 상자를 나르는 고강도의 노동이 교통사고 확률을 높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설마 어머니가 보내신 택배는 별일 없겠지? 영준은 택배기사의 통화연결음이 떠올랐다.


한걸음 더 천천히 간다 해도~


점심시간이 지난 치과는 한산하였다. 접수를 하고 대기실 소파에 앉자마자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 같은 앳된 얼굴의 치위생사가 영준을 이름을 불렀다. 진료실로 들어가자 치과 특유의 약품 냄새가 코를 찔렀고 한쪽에서 들리는 모터 소리는 영준의 다른 멀쩡한 이를 시큼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대기시간이 길어질수록 영준은 초조해졌다. 그는 긴장할 때마다 항상 그렇듯이 앞니로 아랫입술 안쪽을 질겅질겅 씹어댔다. 다행히 아랫입술이 뜯겨나가기 전에 의사가 나타났다.


“미안해요. 앞의 환자 보는 게 좀 길어져서. 저번에 치료한 곳은 이제 어때요?”


“많이 안 좋은 거 같아서 급하게 왔어요...”


“아! 그렇군요. 어쩐지 뭔가 금방 오셨다는 느낌이 들긴 했어요. 일단 한번 상태를 좀 볼게요.”


의사는 영준이 앉은 진료의자를 뒤로 젖혔다. 영준이 입을 벌리자 의사는 어금니가 잘 보이도록 무영등을 조정하였다. 치경과 집게가 어금니를 주변을 신중하게 탐색하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의사는 중간중간 영준의 얼굴에 와 닿을 정도로 길게 콧바람을 내뿜었다.


“음... 육안으로만 봐도 상태가 별로 좋아 보이지 않네요. 아무래도 더 이상 이대로 두면 안될 거 같아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잇몸뼈가 다 녹아버리면 뼈 이식해서 임플란트 해야 되는데 엄청 고생하실 겁니다. 될 수 있으면 빨리 선택을 하셔야 할 것 같아요.”


며칠간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최종 선고를 듣고 나니 오히려 담담해졌다. 어쩌면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아무 말 없이 마음을 정리하던 영준에게 의사가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빼주세요, 선생님.”


“잘 생각하셨어요. 최근에 새로 들어온 브랜드가 있는데 제품들이 전반적으로 좋더라고요. 다음에 오실 때 그 브랜드뿐만 아니라 저희 치과에서 취급하는 다른 브랜드 제품들도 보여드리죠. 그럼 준비를 좀 해야 하니까 입 헹구고 잠시 기다려주세요. 이선생님 여기 익스트렉션 세팅 좀 해줘요. 아, 그 최근에 새로 구입한 포셉이랑 엘리베이터도 준비해 놓고요.”


의사는 세팅을 준비하는 동안 다른 환자를 보러 갔다. 적어도 동시에 네 명 이상의 환자들이 진료의자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의사는 계속해서 환자들을 번갈아가며 쉴 틈 없이 진료를 보았다. 간단한 치료나 시술은 치위생사에게 맡겼다. 대략 직원수가 6명 정도 돼 보였는데 못해도 인건비로만 한 달에 최소 1,500만 원이 나갈 것 같았다. 임대료, 관리비, 계속해서 사용하는 소모품과 할부로 구입했을 값비싼 기기 비용까지 합하면 순수하게 매달 숨만 쉬어도 나가는 돈이 3,000만 원 가까이 될 것이다. 거기에다 각종 제세공과금과 부대비용까지 생각하면 원장의 인건비를 제외한다고 해도 병원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최소 매출액은 못해도 웬만한 고급 중형 세단 값은 되어 보였다. 영준은 어린 시절 치과에만 오면 치료로 인한 통증이 무서워서 긴장한 채로 아랫입술을 피가 날정도로 심하게 씹어댔다. 하지만 지금은 영구치를 뽑아되는 상황에서도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는 자신이 신기하였다. 이젠 제법 어른스워진걸까? 새로운 환자가 옆 진료의자에 앉았다. 뒤에서 부스럭거리던 간호사가 세팅을 마무리하였고 어느새 돌아온 의사가 어금니 주변에 마취주사를 놓았다. 마치 벌에 쏘인 것처럼 따끔하였다. 마취약이 퍼지는 동안 의사는 영준 옆에 새로 온 환자를 보러 갔다. 젊은 20대 여자였는데 래미네이트를 받고 싶다고 하였다. 영준도 몇 번 들어본 적 있는 단어였는데 정확히 어떤 치료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가 아파서 받는 치료는 아닌 것 같았다. 의사는 최근 새로운 래미네이트 기법을 도입하여 치아삭제량을 최소화할 수 있으며 그 위에 씌우는 비니어도 전에 쓰던 재질에 비교하여 잘 깨지지 않는다고 설명해주었다. 듣기만 해도 영수증의 숫자의 단위가 영준의 것과는 다를 것 같았다. 치과를 운영하는데 일반적인 충치치료를 받으러 온 사람보다 영준의 옆 여자처럼 래미네이트 같은 걸 받길 원하는 사람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의사는 여자에게 상담실에서 실장이라고 불리는 사람에게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다시 이야기하자며 옆에 있는 치위생사에게 안내를 맡겼다. 다시 영준에게 돌아온 의사는 어금니를 몇 번 두드리고는 마취가 잘 되었는지 물었다. 영준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집게 같은 기구로 이를 잡고는 몇 번 크게 좌우로 흔들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분명 뭔가 뜯어지는 소리를 들렸다. 곧이어 의사가 집게를 잡아당기자 어금니는 백사장에 박힌 오래된 말뚝처럼 쉽게 빠졌다. 함께한 시간에 비해 이별은 순식간이었다. 영준은 오래된 연인과의 헤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금니 빠진 자리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어쩌면 여러모로 고생한다는 뼈이식이라는 걸 받아야 될지도 모를 것 같았다. 의사는 지혈과 소독 치위생사에게 맡겼다. 영준이 감사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의사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치위생사는 익숙한 듯 의사가 남긴 뒤처리를 마무리하고는 영준에게 작은 캡슐을 건네주었다. 투명한 플라스틱 통 안에는 방금까지 영준의 잇몸에 붙어 있던 어금니와 반짝이는 금이 보였다. 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새것처럼 반짝거렸다. 이만 괜찮았다면 십 년 이상도 영준의 입안에서 빛날 수 있었을 것이다. 영준은 캡슐을 챙겨 진료실 밖으로 나왔다. 아까 영준의 옆에 앉아있던 여자가 상담실에서 의사와 컴퓨터 모니터를 함께 보고 있었다. 치아가 훤히 드러난 사진 두장이 떠있었다. 왼쪽은 마치 파충류의 이처럼 뾰족했고 오른쪽은 그나마 보통 사람의 이와 비슷해 보였다. 의사는 펜으로 두 사진을 번갈아가며 설명을 했고 유심히 설명을 듣던 여자가 결정을 내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어라 말했다. 시술을 받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수납 데스크에서 영준의 이름을 불렀다. 오늘 치료비를 결제하고 다음 예약 가능한 날짜를 살펴보았다. 역시나 저번처럼 선택지가 많아 보이지 않았다. 치과 밖으로 나오자 뭔가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가 영준을 스쳐 지나갔다. 고개를 들어보니 배달대행 오토바이였다. 라이더는 뒤를 돌아보며 영준에게 욕지거리를 해댔다. 위험할 텐데도 몇 마디 더 붙이고 나서야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얼마 전에 비슷한 경험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억이 잘 나지는 않았다. 이를 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영준은 정신이 얼떨떨했다. 근처 약국을 들어가려고 문을 잡아당기는데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약국은 불이 꺼져있었다. 영준은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유리창에 얼굴을 들이 밀고 양손을 눈썹에 갖다 댔다. 바닥에는 약통, 박스, 선반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아무리 봐도 도둑이 들었거나 빚쟁이를 피해 도망간 듯한 분위기였다. 순간 이곳이 저번에 왔던 그 약국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곧이어 약사인 중년 남자의 눈빛이 생각났다. 마치 바로 앞에서 그를 본 것처럼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벽에 걸려있던 액자들이 부서진 채로 바닥에 떨어져 있었는데 안에 들어있던 자격증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약사가 사채를 끌어 쓰다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도망간 것으로 영준은  결론 내렸다. 하는 수 없이 영준은 조금 더 떨어진 약국으로 향했다. 한눈에도 붙임성이 좋아 보이는 중년의 여자 약사가 영준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영준이 처방전을 건네주며 생각 없이 약사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저기 위에 있는 약국에 무슨 일 있나요?”


조제실로 가기 위해 몸을 돌리던 약사가 마치 영준이 던질 미끼에 낚인 듯 몸을 되돌렸다. 약사는 마치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반짝이는 눈으로 말하였다.


“며칠 전부터 문을 안 열어서 이상했는데 옆에 있는 분식점 사장 말로는 갑자기 도망갔다네요.”


그 말을 들은 영준은 자신의 추측이 맞아 들어간 것 같아 묘한 뿌듯함을 느꼈다.


“무슨 일 때문인데요?”


약사는 손님은 영준 밖에 없는데 마치 남들이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를 전하듯 영준에게 몸을 기울이고 두 눈으로 영준과 약사밖에 없는 약국 내부를 좌우로 굴렸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사실 그 아저씨 아내가 몇 개월 전 자궁암으로 돌아가셨거든요. 둘 사이에 자식이 하나도 없어서 아저씨 혼자 남게 됐는데 힘들어서 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나 봐요. 약사로서 이런 말을 하기 좀 그렇지만 약이라는 게 조금만 손쓰면 얼마든지 손대면 안 되는 것들을 만들어 낼 수가 있거든.”


여자 약사는 음흉한 미소로 영준이 물어보지 않은 직업적인 비밀까지 말해주었다.


"원래는 혼자만 쓰다가 나중에는 손님들한테도 좀 나누어줬나 봐요. 어느 약국이나 단골손님 중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자신처럼 불쌍해 보였나 봐. 근데 최근에 그 사람 중에 하나가 약에 취해 공공장소에서 난동을 부리다 경찰에 잡혔어요. 경찰이 조사를 하다 보니 약의 출처가 그 약국이라는 걸 알게 되었죠. 그 아저씨를 체포하러 형사들이 약국을 급습했는데 문이 닫혀있었고 집에도 가보았지만 이미 사라진 뒤였다고 하더라고요.”


영준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에 입이 딱 벌어졌다.


“그러고 보니 가끔 그 아저씨가 사별한 이후로 자기 부인이 살아 돌아왔다고 이야기하고 다녔다던데 아무래도 약에 취해 죽은 아내의 환상을 봤나 봐요.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 약사가 도망가기 며칠 전부터 남은 약을 처리하기 위해 손님들 처방약에 몰래 섞어 넣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괜히 멀쩡한 사람들 약쟁이 만들려고 그러나... 여하튼 약이 문제야 문제!"


영준은 그제야 그 약사의 눈빛이 이해가 되었다. 그때도 약에 취해 있던 것이었다. 갑자기 영준은 그 약이 자신의 것에도 섞여 들어가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 약을 먹고 난 뒤로 그녀가 나오는 생생한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 그저 우연이라 하기엔 도망간 약사의 이야기가 사라진 퍼즐의 마지막 조각처럼 그림을 완성시켜주었다. 영준이 잠시 생각하는 동안 약사가 조제를 마치고 약봉투를 건네주었다.


“아유... 내가 좋은 일도 아닌 걸 너무 길게 얘기해서 미안해요. 원래 남 얘기하는 게 제일 재밌잖아요? 여하튼 이 뽑은 데가 아물 때까지는 당분간 음주나 흡연하시면 안 되고 식후 30분 내로 약 잘 챙겨 드세요. 양치 후에는 봉지 안에 함께 넣어드린 가글로 입안 꼭 헹구시고.”


영준은 약값을 결제하고 밖으로 나왔다. 봉투에서 줄줄이 붙어있는 약봉지를 꺼냈다. 한 봉지만 뜯어서 햇볕에 비춰 보았다. 기억력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전에 처방받은 약과 비슷하게 생긴 것은 하나도 없어 보였다. 영준은 이상하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며칠 전 보았던 구두수선소가 눈에 들어왔다. 수선소 벽에 붙은 ‘금이빨 삽니다’라는 표지를 보자 영준은 무의식적으로 수선소 문을 열었다. 한평 남짓도 안되어 보이는 좁은 내부 공간 한쪽에 체구가 작고 구릿빛 피부에 주름이 가득한 어르신이 앉아 있었다. 어르신은 ‘A Happy Day’라는 글자가 박힌 모자를 쓰고 있었다. 영준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어르신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아... 그게 밖에 붙은 스티커를 보고 들어왔습니다.”


“무슨 스티커?”


“금이빨 산다고 적혀있는...”


그 이야기를 듣자 어르신은 드디어 이해가 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봐도 영준이 구두를 닦으러 온 것 같은 행색이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어르신은 주머니에서 검은 뿔테로 된 두꺼운 돋보기안경을 꺼냈다.


“어디 한번 줘봐요.”


영준은 주머니에서 캡슐을 꺼내 금 조각을 어르신에게 건넸다. 어르신은 금 조각을 작업대 한편에 올려두고는 몸을 돌려 뒤편 구석을 이리저리 뒤적이다 주섬주섬 뭔가를 꺼냈다. 예상치도 못했던 전자저울이 나타났다. 구두수선소에서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짐작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어르신은 헝겊 같은 것으로 저울 위를 한번 쓰윽 닦고는 버튼을 눌렀다. 저울 화면에 '0'이 뜨자 어르신은 작업대 위의 금 조각을 핀셋을 집어 저울 위에 올려놓았다. 영준은 금은방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1.86g’


어르신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무언가 찾은 다음 계산기를 두드리고 영준을 쳐다보았다.


“이거 딱 보니까 크라운 A타입인데 요새 시세가 1g당 만 오천 원 정도 돼요. 이거 학생 거예요?”


“네... 제 어금니에 있던 거예요.”


“새로 씌워서 필요 없는 건가?”


“아뇨. 어금니를 뺐어요.”


영준은 어금니를 뽑은 쪽 턱을 가리키며 말했다.


“에효... 젊은 친구가 상심이 크겠어요... 제가 좀 더 쳐줘서 그램 당 이만 원에 해줄게요.”


“정말이요? 감사합니다.”


어르신은 바지 주머니에서 현금으로 4만 원을 꺼내 영준에게 건네었다. 영준이 거스름돈을 드리려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자 어르신이 손사래를 쳤다.


“잔돈은 안 줘도 되니까 맛있는 거 사 먹어요. 이제부터 이 관리 잘하시고!”


영준은 다시 한번 고개 숙여 감사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다. 방금 팔아버린 금 크라운은 씌울 때 40만 원 넘게 들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되팔 때는 십 분의 일밖에 건지지 못한 것이다. 그것도 어르신이 잘 봐주셔서 그 정도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머니께 용돈으로 드리기엔 부족한 금액이었다. 영준은 사장에게 다음 달 월급을 당겨 달라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영준은 로스터리로 출근하기 전에 잠시 쉬기 위해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 앞에는 하얀 스티로폼 박스가 하나 놓여있었다.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 고생한 듯 군데군데 검은 스크래치 자국들이 선명하였다. 그런데 스티로폼 위에 박스와 전혀 어울리지 않은 연분홍빛 편지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다가가서 보니 바른 손글씨로 영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무리 봐도 택배회사에서 보낸 것 같지는 않았다. 영준은 조심스레 봉투를 집었다. 손에 느껴지는 감촉만으로도 꽤 좋은 재질의 봉투라는 것이 느껴졌다. 봉투 안에는 손편지와 함께 만 원짜리 도서상품권이 한 장이 들어있었다. 영준은 편지지를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이영준 님.


 저는 OO택배 배달기사였던 OOO의 어머니입니다. 제가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된 것은 우리 아이가 못다 배달한 물건들을 대신 전하며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제 아들은 며칠 전 배달 중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날은 우리 아이가 택배기사로 일하는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제가 못난 탓으로 우리 아이는 군 제대 이후로 복학하기 위한 등록금을 모으려고 온갖 아르바이트를 해왔습니다. 그러다가 택배일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일은 고되지만 아들과 저의 생활에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결국 등록금도 다 모으게 됐고 가을부터 다시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아들은 일을 그만두기 전에 그동안 자주 택배를 이용해주시는 분들에게 감사함을 전하기 위해 도서상품권을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해 직접 전하지 못한 채 하늘나라로 가버렸습니다. 정신없이 상을 치르고 나니 문득 아들이 못다 한 감사인사를 대신 마무리하는 것이 제가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인 것 같아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불편하실 수도 있겠지만 제 아이가 이영준 님께 전하려던 마음을 받아주시면 엄마로서 여한이 없겠습니다.

그럼 언제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OOO드림


영준은 머리를 세게 한방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리고 저번에 치과를 나오면서 보았던 사고가 떠올랐다. 설마 그럴 리가 없을 거라고 머리를 흔들어보았지만 자꾸 차에서 쏟아져 나온 택배 상자들 중에 지금 자신의 발 밑에 있는 스티로폼 박스가 있었을 것 같으 느낌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영준은 박스를 들고 집안으로 들어가 뚜껑에 봉해진 테이프를 뜯었다. 시큼한 냄새가 터져 나왔다. 플라스틱 용기에 든 김치 국물이 새어 나와 박스 안이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침 그때 휴대전화가 진동하였다. 어머니였다.


“영준아, 택배는 받았니? 반찬들 중에 새어 나온 건 없고?”


영준은 갑자기 가슴이 울렁거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여보세요? 영준아! 엄마 목소리 안 들리니?”


영준의 입에서는 대답 대신 울음이 터져 나왔다. 아들이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어머니가 계속해서 영준을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꿈속에서 그녀와 헤어질 때처럼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금니 빈자리에 물고 있던 솜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솜은 충분히 흥건해져 피가 굳어가고 있는 듯 검붉었다. 어금니가 있던 자리에 블랙홀이 생긴 것 같았다. 영준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휴대전화 너머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져 갔다. 영준의 눈물 사이로 한 사람의 실루엣을 나타났다. 하지만 누군지 알아보기도 전에 계속해서 흐르는 눈물에 씻겨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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