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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langPolang Jan 13. 2019

내 인생의 영화

심장이 시들어버렸어, 꽃처럼

챕터 1. 벤노와 체리코크의 북유럽 여행 이야기 - 에세이 중에서 


내 인생 최고의 영화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흑백 필름에 슬픈 자줏빛을 덧입힌 듯한 색감의 영상이 머릿속에서 필름처럼 돌아가면서

그때 느꼈던 그 전율이 출렁출렁 심장을 타고 돌아다닌다.  


취학 전이었으니까 아마도 내가 여섯 살 무렵이었다.

유럽 영화였고 영화의 배경이 파리였던 것은 기억하지만, 아쉽게도 영화의 타이틀은 기억하지 못한다.


영화는 두 소년의 어머니, 한 남자의 아내 - 그녀의 죽음으로 시작했다.

남자는 어느 유럽 국가의 파리 주재 대사였고, 두 아이의 아버지였으며, 아내를 목숨처럼 사랑하는 한 남자였다. 그는 막 아내를 잃었다.


엄마를 잃은 두 소년의 모습이 기억이 난다.

공원처럼 아름다운 대사관저의 정원에 서 있는 십 대 초반의 남자아이와 이제 갓 서너 살쯤 된 남자아이.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는 어린 막내는 형 주변을 맴돌며 아이답게 장난을 치고 있었고, 그런 동생에게 내색하지 않으려고 슬픔을 안으로 삭히는 장남의 눈에 가득한 상실감과 슬픔, 먹먹함,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강렬하게 내리쳐서 순식간에 내 심장이 바닥에 내려앉았던 그 순간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나는 이 소년을 보면서 '사람이 시들어 죽어가는' 모습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불현듯 <미녀와 야수>가 떠올랐다. 야수가 정원에 누워 시름시름 죽어가며 했던 말, 

"You didn't come back, so now I'm dying."   

그게 실제라는 걸 절절히 느꼈다.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니었어. 가슴에서 나온 말이었어. 사실이었어. 

심장이 시들어버렸어, 꽃처럼.


소년의 아버지는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아내를 잃은 후, 그는 머리 끝까지 차오른 슬픔 속에서 익사하기 직전이었다. 자신의 슬픔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버거워서, 바로 곁에서 깊이 더 깊이 가라앉아가는 아들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조차 없었다. 그는 살기 위해서 '일'이라는 지푸라기를 붙잡고, 발버둥을 치며 뭍으로 헤엄쳐나갔다.


그러나 

어머니의 죽음을 모르기에는 너무 자랐고, 

상실감과 슬픔을 다루기에는 아직 너무나 어린 

소년은 고스란히 그 아픔을 혼자 마주했다. 잔인한 슬픔에게 아무 저항도 하지 못했다.    


하루하루, 그의 호흡이 짧아져갔다. 

시간을 타고 변화하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마치 탐스럽던 꽃이 눈에 띄지 않게 시들어가는 것처럼, 소년은 소리 한번 내지 않고 시들어갔다. 


대사도, 설명도, 화면 전환도 거의 없었지만,

사람이 시들어가는 모습은 별다른 설명이 없어도 너무나 알겠더군.  


그냥 누군가의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연출이었지만, 

소름 돋는 이야기? 어린 나의 눈에도 시간의 변화와 그 안에서 시들어가는 어린 소년의 생명이 손에 잡힐 것처럼 생생했다는 것. 


바람이 불고, 추운 기운이 감돌고, 자연의 질감이 바뀌고,,,

소년의 눈빛과 표정, 생기도 자연과 함께 조용히 사그라져 갔다.

그렇게 소년은 사랑하던 엄마에게로 여행을 떠났다.


마음은 시드는 거로구나. 
생명은 시들어서 사라질 수 있는 거구나. 
마음이 시들면 꽃처럼 지기도 하는구나.
내 슬픔이 커다란 바윗 덩어리처럼 내 등을 누르면, 바로 곁에서 아파하는 너의 손을 잡아주지 못하는 것, 인생의 어느 시점에는 그와 같은 때가 있을 수도 있겠구나. 
같이 앉아서 아픔을 나누었다면 견디기가 조금은 덜 힘들었을 텐데, 몸은 곁에 있어도 마음의 거리는 한없이 멀 수도 있는 거구나. 어쩌면 미녀와 야수의 이야기도 사실은, 몸의 거리가 아니라 마음의 거리가 멀었던 것일 수 있겠다. 
나의 손안에 어떤 생명이 맡겨진다면, 그렇게 시들어서 떠나게 두는 것처럼 가슴 아픈 일은 없겠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 내 품에 생명이 맡겨진다면, 마르지 않도록 부지런하게 사랑으로 촉촉하게 적셔주어야지. 

영화에서는 설명하지 않았지만, 그저 아무것도 모르고 철없이 장난하는 아이로 보이는 막내. 그것이 엄마를 잃은 충격과 슬픔을 표현하는 그 아이의 언어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이도 버둥거리며 슬픔과 싸우고 있겠지. 

눈 앞에 가득하던 아름다운 풍경, 아름다우면서 아리고 슬픈 소년의 모습, 색감, 시간과 함께 변하는 소년의 생명, 그런 영상들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아서 한동안 기억들을 되뇌고 되뇌며 보냈다.


이것이 내 기억 속에 살고 있는 내 인생의 영화다. 

여섯 살에 만난, 내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첫 이정표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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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반려견과 대화하고 있나요?>의 저자

    국내 최초/국내 유일의 국제 인증 반려동물 행동심리 전문가  

    반려동물의 감정(Feeling)과 니즈(Needs)에 공감하는 교육을 알리며 

    반려동물 교육 문화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는 

    동물행동심리연구소 폴랑폴랑의 대표로 

    동물과 사람이 서로가 서로를 치유하는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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