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면 무엇보다 나도 몰랐던 '나'를 알게 된다. 알고 싶지 않는 나라도!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그냥 과거 속 한 장면일 뿐인 일들을 곱씹곤 하는 시간을 보내는 탓이다. 글은 소통의 도구라고 생각하는 편인데 타인과 대화하기 전에 나와 대화하는 시간을 먼저 보내곤 한다.
<출근하기 싫은 날엔 카프카를 읽는다>는 브런치북 <퇴사대신 여행을 다녀왔습니다>가 모세포이다. 이 브런치북은 출간되지 못할 운명인 것 같지만, 애정이 듬뿍 들어간 브런치북이다. 글을 쓰면서 틈만 나면 왜 그렇게 다른 나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는지, 과거의 나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내가 있는 좌표가 마음에 안 들었다. 겉으로 도드라진 문제는 없었지만, 나는 다른 나를 원했다. 막연히 작가를 하나의 직업으로 보았고 직업을 바꾸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어떤 일 하세요? 하고 질문받으면 작가예요라고 말하는 상상만으로도 다른 세상에 벌써 가 있는 거 같았다.
작가를 평생 책 읽고 글 쓰면서 돈도 벌고 여행도 다니는 직업쯤으로 상상했던 것 같다. 이제는 안다. 책을 쓰려면 여행은커녕 예약한 여행도 번번이 취소해야 하고, 인세로 여행은커녕 집필에 필요한 책을 사느라 허덕인다는 것을. 세상에 낭만만 가득한 직업은 없다는 것을. 한강 작가님의 노벨문학상 수상 결과 전에는 작가님 혼자 오롯이 겪은 고통이 있다. 상은 우리가 무심히 넘기는 타인의 고통 곁에서 그 고통에 자신을 던지며 살아온 시간에 대한 대가이다.
하지만 그때는 이 진리를 몰랐고, 그래서 괴로웠다. 그럴 때마다 작가, 화가, 철학가들의 이야기 중에서도 '존버'한 이야기에 끌렸다. 그들의 성취는 눈에 잘 안 들어왔다. 그들이 '존버'한 결과물보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존버한 이유와 방법이었으니까.
이들은 대체로 자기 자리를 지켜내느라 고군분투했다. 내가 특히 애정을 가진 작가는 서간문으로 유명해진 <채링크로스 84번지>의 작가 헬렌 한프,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현역으로 다양한 실험 영화를 찍은 감독 아녜스 바르다, 아무도 읽지 않아도 쓰고 또 썼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쓴 아고타 크리스토프이다.
독자가 보장되지 않은 채 읽고 쓰면서 '쓰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적 없는 이들에게 감정을 깊이 투영하고 위로를 받곤 했다. 쓰는 사람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는 독자가 필요하지도 않고 책을 출간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묵묵하게 쓰면 되니까. 요즘처럼 글쓰기 플랫폼이 발달한 시대에 누구나 쓰는 사람으로 살 수 있다. 쓰기만 한다면. 그러자 세상이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정말로. 마음에 내키는책만 읽고, 내키는 글만 쓰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다.
상상 속에서 만든 욕망을 내려놓자 정말로 책을 쓸 수 있었다. 걸작을 쓰겠다는 가당치 않은 결심도 하지 않고, 그저 읽었던 글들이 머릿속에서 팝업처럼 튀어나왔고, 내가 쓸 수 있는 글을 썼다. <출근하기 싫은 날엔 카프카를 읽는다>는 낯선 도시에서 만난 예술가들의 이야기에서 시작했다. 여행기로 쓰고 싶었지만, 출판사 대표님의 간결하지만 경쾌하고 단호한 조언. "여행 이야기는 빼세요."
써 놓은 글은 몇 꼭지 안 되지만, 목차는 신나게 적어서 보냈다. 목차 작업할 때는 저 세상 텐션이 솟구치고, 평소와는 다른 텐션을 감당할 시간이 곧 올거라고 상상하지 못한다. 현실적이면 출간 계약을 하지 못할 것이다. 대신 출간 계약 후에 바로 제정신이 돌아온다.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지? 자료 조사가 엄청난 책인데. 하지만 어른의 몫을 해 내려면 싫은 일도 하는 것이다.
8백 페이지나 9백 페이지 가까이 되는 평전이나 일기, 회고록 등을 다시 읽었다. 나는 직관을 주로 사용하는 편이라 초점을 맞출 일화를 못 찾거나 주제가 떠오르지 않으면 꾸역꾸역 읽었다. 페소아, 카프카, 쇼펜하우어, 비트겐슈타인 등의 전기와 일기를 뒤지면서 다시 한번 이들의 '흑역사'에 몰입이 되었고, 다시 한번 위로를 받았다.유행을 따르고 미슐랭급 식당에 드나들려면 돈이 필요해서 자신을 홍보하지만, 돈을 혐오했던 에곤 실레. 우리와 다를 게 뭐가 있나.
결점 없는 사람도 없고, 결핍 없는 사람도 없다.욕망 없는 사람도 없다. 이름만 들으면 다 아는 대가들도 말이다. 그들의 인생에 새겨진 결점, 결핍, 욕망의 부정성을 어떻게 일상에 끌어들일지 힌트가 들어있다. 부정성을 긍정으로 바꾸는 힘을 얻을 수 있기를 바라며 집필을 했다. 설령 현실에선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지라도. 내 마음, 가장 중요한 마음이 바뀌면, 세상은 버틸만한 곳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