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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우 Mar 20. 2022

  오랜만에 학교 옆에 있는 호수공원을 걸었다. 걸음이 닿는 곳마다 추억이 서려있어서,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가장 좋았던 때를 떠올려 보라는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물어볼 때마다 달라지는데, 지금은 스무 살의 3월이라고 말하고 싶다. 아마 졸업 학점을 채우기 위해 1학년 전공 수업을 듣는 것도 한몫 크게 하는 듯하다. 수업이 끝나고 이제 막 친해지기 시작한 듯, '그래서 오늘 술 마실 거야?'라는 대화를 하는 새내기들을 보고 있으니 그때의 우리가 생각나서 마스크 안으로 미소를 지었다.


  '기숙사팸'이라고 부르던 친구들이 있었다. 어색했던 입학식 후 처음으로 기숙사에 사는 동기들끼리 기숙사 아래 카페에 모여 입학식보다 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나눴더랬다. 만나는 사람은 있는지, 이상형이 무엇인지 등 온갖 주제를 끌어 모아 이야기를 이어가려고 애들을 썼다.

  온갖 학과 행사에 참여하느라 정신없었던 3월 동안 꽤 많이 가까워진 넷은 선배들과의 술자리가 기숙사 통금 시간을 넘길 정도로 늦게 끝났던 날도 함께였다. 벌점을 피하기 위해 새벽 5시가 될 때까지 콩나물 국밥을 먹고 학생회관 복도에 있는 의자에 앉아 덜덜 떨며 이야기꽃을 피운 것이다.

  단과대학 전체 MT에서 죽을 때까지 술을 먹인다는 괴소문이 돌았을 때, MT 전날 밤에 처음 모였었던 기숙사 아래 카페에 모여 대책 회의를 했었다. 소문이 진짜일 리 없다는 둥,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냐는 둥 걱정을 쏟다가 숙취 해소 음료를 한 캔씩 사서 준비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 소문은 진짜였다.

  이런 큼지막한 사건들보다 더 기억에 남는 것은, 수다를 떨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린다거나, 학식을 과하게 먹어서 소화가 안 된다거나, 그냥 걷고 싶거나 할 때 '산책 갈 사람'이라고 단톡방에 말하면 최소한 1명은 'ㄱㄱ'라고 답장을 해주고, 기숙사 광장에서 만나 호수공원을 걸었던 시간들이다. 공원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가 울기도 웃기도 많이 했던 시간들이 참 그립다. 기숙사팸은 지금도 1명을 제외하고 종종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곤 한다. 무슨 일이 생기면 무조건 팔을 안으로 굽혀주는 사이가 됐다.


  흔들의자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술기운을 풍기며 기숙사로 재게 걸어가는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시간을 보니 밤 11시 40분. 통금 시간까지 10분이 남았다. 그렇게 해 보고 싶었던 자취를 몇 년째 하고 있는데, 문득 나도 저 무리에 껴서 기숙사로 향하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때가 어딨냐고들 하지만, 그 '때'에만 할 수 있는 것들이 생각보다 꽤 많은 것 같다. 내가, 혹은 우리가 종종 과거를 그리워하는 건 다른 게 아니라 지금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을 당연히 하고 있는 내가 있는 시간들을 그리워하는 게 아닐까.


  새로운 사람들과의 어색함이 싫어서 그것을 깨버리기 위해 먼저 다가갔었던 그때의 나. 그러다 23살 군필 신입생 동기 형을 동갑으로 착각해 '넌 어디서 왔어?'라고 반말을 했고, 마음씨 고운 형은 내가 무안하지 않게끔 침착하게 '전주에서 왔어. 넌?'이라고 대답해 줬다. 얼마 지나지 않아 3학년 선배가 그 형에게 존댓말을 쓰는 걸 보고 아차 싶어서 그 형에게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했었다.

  모든 게 서툴렀던 그때가 자꾸 생각나는 건, 때 묻지 않은 순수함도 물론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서툴러도 괜찮은 '때'였고, 그래서 안심하고 서툴렀던 '때'라서 그런 것 같다.


  우스운 망상이지만, 평행세계가 있다면 그 세계의 내가 바라는 내 모습은 어떤 모습인지, 그 모습이 지금 나와 얼마나 닮아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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