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진우 Feb 20. 2023

겨울비와 제주도

  첫째 날

  이른 시간 기상을 해야 해서 일찍 자야 했다. 강인이랑 1시간만 통화하고 자려고 했는데, 눈은 피곤한데 정신은 말짱해졌다. 그래서 그냥 자는 걸 포기하고 놀다가, 지형이가 알려 준 4초 들숨 7초 날숨 호흡을 해 봤다. 공기의 총질량이 안 맞아서 그런지, 점점 숨이 가빠져서 이게 맞는 건지 의아해하다가 어느새 잠에 들었다. 결과적으로는 효과적인 호흡법이 아닐 수 없다.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서 씻고 짐을 챙기고 나왔다. 하이패스 충전을 해야 했는데, 다른 편의점 갔다가 안 된다고 해서 빙빙 돌았다. 그리고 뒤늦게 인공눈물을 두고 온 걸 눈치채고 집으로 갔는데 도통 보이지 않았다. 눈이 건조하면 그냥 슬픈 생각을 해서 울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그냥 출발했다.


  2시간 30분여를 달려 녹동항에 도착했을 때가 6시 20분이었다. 너무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1시간 정도 기다려야 했다. 7시 20분쯤 차량 선적이 시작됐다. 처음 해 보는 거라 긴장했지만, 무사히 해내 뿌듯했다. 그때는 몰랐다. 제일 먼저 도착한 차량은 선박의 맨 안쪽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도착하면 가장 늦게 나온다는 사실을 ... 매표를 하고 멍하니 있다가 탑승을 했다.


  12시 50분경, 자다 깨다를 5번 정도 반복하니 제주항에 도착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가장 나중에 차량을 뺄 수 있었기 때문에, 밖으로 나오니 2시가 됐다. 일단 한라산을 오르기 위해 예약한 등산 장비 렌털 업체에 가서 장비를 받았다.


  그리고 월정리에 있는 고기국숫집으로 향했다. 사골 육수 베이스라서 되게 산뜻하고 담백했다.


  먹고 나서 월정해변에서 사진을 찍고, 게스트하우스 체크인을 한 후 카페에 갔다.


  처음부터 끝까지 낭만이 가득한 카페였다. 게하에서 가장 가까운 카페가 어딘지 찾다가, 조금 걸어보기로 했다. 그러다 끌리는 곳에 들어간 게 이 카페였다. 수많은 메뉴 중 커피를 마시려다가, '당근 주스'가 눈에 띄었다. 안 그래도 아까 오는 길에 당근밭을 봤었는데, 혹시 그 당근으로 만든 주스인가? 그렇다면 이 카페의 시그니처 메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동벨이 울려 받으러 가니, 사장님께서 먹는 방법을 설명해 주셨다. 그 방법은 위 사진에 나와 있다.

  어렸을 때, 자기 전에 엄마가 항상 읽어주던 '두더지 아가씨네 꽃밭'이라는 동화책이 있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무척 좋아했다. 매일 듣는 이야기였지만, 들을 때마다 재밌고 새로웠던 것 같다. 그런데 사장님께서 당근 주스 먹는 방법을 설명해 주실 때 그때의 감정이 아주 조금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내러티브가 있는 음료라니.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게다가 카페 안에서는 지브리 피아노 소곡집이 은은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한창 공부할 때 들었던, 그리고 앞으로 공부할 때에도 들을 지브리 피아노 플레이리스트가 떠올랐다. 행복한 기억을 파는 상점 같았다. 그래서 나갈 때 사장님께 '당근과 사랑에 빠진 토끼, 너무 잘 먹었어요. 있는 내내 너무 행복했습니다.'라고 하고 나왔다.


  그리고 파티 참석을 위해 게하로 향했다. 7시에 시작된 파티에서, 함께 앉은 테이블 사람들과 어디서 왔는지, 며칠 있는지, 내일 일정이 어떻게 되는지 같은 질문들을 주고받았다. 사실 막 재밌지는 않았다. 슬슬 기가 빨리기 시작해서 멍을 때리거나, 핸드폰을 하기 시작했을 무렵 옆에 있던 분께서 "MBTI I죠?"라고 물었다. 그 친구의 MBTI는 ENFJ였다. 듣자마자 '뭔가 통하겠구나.'라는 느낌이 왔다. 그러다 그 친구가 학과를 물어봤고, 국어교육이라고 하니 교생실습 어땠는지, 인기 많았는지 등등 여러 가지를 물어봤다. 수많은 질문을 받고 나니, 평소에 '나는 I랑 E 성향이 51:49 정도라서 그냥 ENFJ라고 봐도 돼.'라고 하고 다니던 오만방자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나는 INFJ가 확실하다.

  아무튼, 질문 세례를 받고 나니 너무 내 얘기만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 친구가 전에 카지노에서 일을 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궁금한 것들이 너무 많았어서, 여러 가지를 물어보기 시작했다. 일은 어땠는지, 어떤 점이 괜찮았는지, 다른 일이랑 비슷한 점은 어떻게 비슷하고 다른 점은 어떻게 다른지 등등 ... 대답을 듣고 알 수 있었던 건, 그 친구는 졸업하기 전부터 취직에 성공했고, 젊은 나이에 중간 관리 직책을 맡은 능력자였다. 본인은 운이 좋았다고 말하지만, 결국 실력과 운인 세상에서 오로지 운으로만 결정되는 건 없지 않은가? 그리고 그 친구는 청자로 하여금 어떻게 하면 흥미를 끌 수 있을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의 약점도 가감 없이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약점을 드러내도 결코 약해 보이지 않고, 오히려 당당해서 건강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건 타고나는 게 크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모로 감탄했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가 내 마음에 들면 하는 '꿈이 뭐예요?'라는 질문을 했다. 분명히 이 사람이라면, 멋들어진 꿈이 있을 거라고 확신을 하고 물어본 거였다. 돌아온 대답은 역시나였다. '너무 많은데 지금 …'으로 시작되는 대답을 한 사람은 지금까지 한 명도 없었다. 사업, 책 쓰기, 자신과 닮은 이모티콘 만들기 등.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텐데 모든 게 너무 잘 어울렸다. 글 쓰기 얘기가 나온 김에, 내 브런치도 보여줬다. 그 친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을 하나 골라서 보여주라고 했다. 신기하게도, 그 친구는 내가 그 글을 쓸 때 '힘을 줘서' 쓴 부분마다 멈칫하며 옅은 미소를 띠며 글을 읽어 내려갔다. 관심사를, 그리고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다는 건 실로 엄청난 일이다.

  오버하는 게 아니라, 이번 제주 여행 동안 이 친구 한 명을 알게 된 것 하나만으로도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부디 이 친구의 말처럼 '자주는 아니어도 오래 보는' 사이가 될 수 있기를. (제발 예비 1호 팬이란 말이에요)


  둘째 날

  오늘 일정이 한라산 등반이었기 때문에, 파티가 마무리되기 전에 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저런 문자가 와 있었다. 잠깐 고민을 하다가, 그래도 올라가 본다는 것에 의의를 두자고 생각하며 출발했다.

  성판악 주차장에는 주차 자리가 없다고들 해서, 제주국제대학교 환승주차장으로 향했다. 주차를 하고, 안개를 뚫고 오는 성판악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등산객이 많을 줄 알았는데, 버스 안 분위기를 보니 나만 관광객이고 다른 분들은 전부 현지인 같았다. 등산 스틱을 들고 어리바리 탑승하는 승객은 나뿐이었기 때문.

  성판악에 도착해서, 바로 아이젠을 착용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을 보니까 아무도 아이젠을 차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혼자 고민했다. '저 사람들도 처음이라 모르나? 근데 한 명도 안 하고 있는 거 보니까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고민 끝에 나도 아이젠을 벗기로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 아예 1시간 정도 오르면 나오는 대피소부터 아이젠을 착용하는 분들도 계셨기 때문이다.


  처음 10분 정도 올랐을 때, 내 저질 체력에 가히 경악을 금치 못했었다. 이게 한라산인가? 싶었는데 시작도 안 한 거였다. 괜히 초반에 등린이인 거 들킬까 봐 성큼성큼 올랐는데, 그거 때문에 아직도 발목이 시리다.

  오르다 보니 슬슬 이런 눈길이 나오고, 아이젠을 착용하는 사람이 많았다. 나도 이쯤에서 눈치껏 아이젠을 착용했다. 생각보다 경사가 심하지 않아서 갈 만했던 것 같다. 물론 중간중간 나오는 경사로에서는 '여기서 혼자 쓰러지면 누가 구해주지?'라는 생각 때문에 이를 악 물고 앞에 보이는 등산객들과 최대한 붙어서 가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그 등산객 분들이 내가 본인들을 추월하고 싶어 하는 줄 알았는지, 자꾸 먼저 지나가라고 길을 터줬다. 그럴 때마다 '아, 저 선생님들 따라가고 있는 거예요.'라고 하면 너무 이상할 것 같아서 머쓱하게 웃으며 빠르게 지나갔다. (빠르게 지나갈 때마다 체력 소모가 훨씬 심해서 너무 힘들었다 .. !)

  물론 다 오르지는 못했지만, 등산이랑 트레드밀이랑 산책이랑 달리기랑 다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다음에는 반드시 정상까지 올라봐야겠다. 여담이지만, 내려올 때 나는 넘어질 것 같아서 뒤뚱뒤뚱 내려오는데 등산 고인물 분들은 진짜 달려서 내려가는 걸 보고 말았다.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또 여담인데, 저 사진을 보면 등산 스틱 마개가 보인다. 저 마개를 뽑고 써야 하는데, 난 마개가 있는 줄도 모르고 저대로 등반을 했다. 장비 반납할 때, 직원 분이 '어? 마개를 끼우고 쓰셨어요?'라고 하길래, '어? 마개가 있어요?'라고 했을 때 직원 분의 표정을 아직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내려와서,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제주 현지인들이 추천해 준 해장국 집에 가서 밥을 먹었다. 식당에서 제주도 방언들만 들려서 너무 신기했다. 우리 학과 문법 교수님이 있었더라면 어떤 반응일지 궁금했다.


  그리고 구좌 쪽에 있는 카페에 가서 잠깐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앞에 보이는 바다가 예뻐서 사진을 찍으러 나갔다.


  그렇게 시간을 때우다가, 제주시에 있는 호텔 체크인을 했다. 그리고 등산을 다녀온 복장 빨래를 하기 위해 근처 코인 세탁방에 갔다. 1시간 정도 앉아 있으면서, 흑돼지를 먹을지 그냥 방에서 뭘 시켜 먹을지 고민을 했다. 후자를 선택하고, 건조기 20분 정도 남았을 때 피자를 시켰다. 탄수화물이 너무 당겼기 때문. 배달팁이 없는 곳이 꽤 많아서 신기했다.


  그리고 방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면서 푹 쉬었다. 등산을 하면서 입었던 회색 패딩은 비를 맞아서 그런지 .. 더 이상 입을 수 없게 됐다. 다른 사람들이 우비를 안 입길래 나 혼자 입으면 호들갑을 떠는 것 같이 보일까 봐 안 입었는데, 생각해 보니 그 사람들은 고어텍스 재질의 등산복을 입었기 때문에 그러지 않았을까? 정말 우당탕탕 한라산 등반이었다.


  셋째 날

  푹 자고 일어나서, 일단 충동적으로 예약한 족욕을 하러 용두암 쪽으로 갔다. 이날 날씨가 너무 좋았다. 제주 여행을 하면서 처음 본 푸른 하늘이라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제주 공항에서 육지로 날아가는 비행기들이 짧은 간격으로 계속 보여서, 여행 온 느낌이 물씬 났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예약 시간을 기다리다가 족욕을 했다.

  가족 단위로 온 사람들뿐이었는데, 나만 혼자라서 직원 분들께서 '왜 혼자 계세요?'라고 물어봤다. 아마 가족이랑 왔을 텐데 왜 너만 떨어져서 있냐고 물어보는 것 같았다. 아무튼 향긋한 아로마 향기도 좋았고, 박하향도 좋았다. 어제의 피로가 어느 정도 풀리는 듯했다.


  족욕 끝나고, 점심 먹을 만한 곳을 찾다가 갑자기 햄버거가 당겨서 그냥 맥도날드 DT를 했다.

  그리고 애월해안도로를 달리다가, 그냥 마음에 드는 곳에 차를 세우고 벤치에 앉아 바다를 보며 햄버거를 먹었다. 너무 좋았다. '놀러 가면 거기에만 있는 음식을 먹어야지'라고 생각해 왔는데,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여행은 어디로 가느냐보다는 누구랑 가느냐가 더 중요한 것처럼.


  그리고 다시 해안도로를 달려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장소로 향했다.


  너무 보고 싶었던 협재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다음 날 9시쯤 게스트하우스를 나섰다. 배 시간이 오후 5시였어서, 뭘 할지 고민을 하다가 기념품점을 돌아다니기로 했다. 내가 찾는 게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에. 예쁜 협재 바다가 그려진 그런 기념품을 사고 싶었다. 여행 내내 그것만 찾았는데, 마지막 날에 간 기념품점에서 찾을 수 있었다. 다 사고 나서도 11시밖에 안 됐을 때, 아찔했다. 그래서 예약한 배편을 취소하고, 1시 30분에 출발하는 배편을 새로 예약했다. 다행히 자리가 있었다. 항구 근처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배를 탔다. 그렇게 내 첫 홀로 여행이 마무리가 됐다.



  너무도 소중한 친구와 함께했던 마지막 여행지였던 제주도. 우리는 21살의 오늘을 이곳에서 보냈었다.

  2016년 2월 15일에 보았던 풍경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협재. 자주 찾아드는 기시감 덕분에 그때 생각이 자주 났다. 그때는 여행 첫날이었고, 생각보다 거센 바람에 다들 어쩔 줄 몰라하며 웃었고, 가려고 했던 식당 문이 굳게 닫혀 있어서 당황했고, 되는 대로 근처 식당에 가자고 했지만 전부 닫혀 있어서 웃었다. 그리고 결국 먹은 게 맘스터치였다는 것도 재밌었다. '뚜벅이' 여행을 해 보자며 호기롭게 시작한 여행. 처음부터 끝까지 서툴렀던, 그랬기에 기억에 많이 남는, 그때만 할 수 있는 여행이 아니었을까?

  협재를 떠날 때에 잠깐 이슬비가 왔던 것은 아마도 네가 잠깐 찾아왔던 게 아닐까. 얄궂게도 여행하는 내내 비가 오다가, 집에 도착하니 맑아진 제주도의 날씨를 보고 옅은 웃음이 나는 건 왜일까. 겨울비가 왔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생긴 친구가 한 말이 귀에서 맴돈다. 부모님에게도, 친구들에게도 할 수 없는 나만의 이야기를 제주도는 오롯이 들어준다고. 그래서 나는 제주도가 좋다고.

  여행 내내 제주도는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줬다. 일정에 차질이 생길 때 부리던 응석도, 발길이 닿는 대로 들어간 카페가 마음에 들었을 때의 기쁨도, 혼자 여행하며 느낀 외로움도, 그 밖의 모든 감정들을 다 받아줬다. 너무 행복했다. 여행 중 만난 모든 인연들에게도, 감사하다. 어떤 길을 가든지, 가시는 길 응원하겠다.

작가의 이전글 동네 뜰 준비를 하면서 느끼는 것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