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어느 글에도 썼었던 것 같은데, 의무경찰 복무할 때, 배울 게 참 많았던 93년생 소대장님께서 저녁점호 때 해 주신 말씀이 있었다. 평소에는 '고생한다.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된다. 몸 건강히 나가야 한다.'라고 하시며 최대한 점호를 짧게 끝내시던 분인데, 웬일인지 길게 훈화 말씀을 해 주셔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것 같다. 그 내용은, 세상만사가 다 똑같다는 것. 슬픈 일이 있어도 너무 슬퍼하지 말며, 기쁜 일이 있어도 너무 기뻐하지 말 것. 슬픈 일이 있으면 기쁜 일이 있을 것이고, 기쁜 일이 있으면 반드시 슬픈 일도 따라온다는 것. 그러니까, 매사에 크게 동요할 필요 없다는 것.
오랜만에 쓰는 글이라, 나 보자고 쓰는 글인데 긴장이 된다. 물론 꼭 봐줬으면 하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한 달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내 인생에서 있었던 수많은 일들 일부를 기록하려 한다.
나는 대학 생활이 재미없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재밌지는 않았던 것 같다. 크고 작은 오해들로 인해 나를 싫어했던 사람들이 싫었고, 더 나아가 내가 가장 오고자 했던 이 학과 전체에 공포를 느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휴학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휴학을 하는 바람에 졸업이 늦춰진 것이 얄궂기도 했다. 사범대 본관 4층에 올라가면, 미친 듯이 심장이 뛰던 때가 눈에 선하다.
'이렇게 졸업을 해야 하는구나.' 싶었는데, 어쩌다가 다시 꼭 붙어 다니게 된 동기들이 생겼다. 진규 형은 내가 워낙 좋아하고, 가끔 '저런 사람이 되어야지.'라고 우러러보던 사람이었다. 그런 진규 형이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해서 보니, 내겐 그리 좋은 기억이 아니었던 사람이라 조금 놀랐었다. 솔직히 진규 형이 이해가 안 됐지만, '진규 형이니까, 어련히 생각이 있겠지.'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둘은 그림체가 너무 비슷한 좋은 사람들이었다. 나도 모르게 지난 과거에 얽매여 현재를 사는 사람에게 큰 실수를 할 뻔했던 것. 다행이다.
진규 형이 자기 집이 빈다며, 저녁이나 먹자고 했다. 그래서 '세병회' 사람들이 모였다. 세병회는 세병호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틈만 나면 '세병호나 가죠?'라는 말을 남발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빈 손으로 진규 형네로 갔더니, 닭날개간장콜라조림, 크림파스타, 피자가 준비돼 있었다. 나는 제주도에서 사 온 키링을 하나씩 선물해 주며 반가움을 표했다. 참 즐거웠던 날. 그 시간 자체도 재밌었지만, 그 일정이 끝나고 밤 11시에 있을 일정 때문에 마음이 콩밭에 가 있던 날.
지형이와 둘이 151바에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1~2월에 부쩍 친해져서 둘이 칵테일바에 갈 정도의 사이가 되다니. 좋은 동생인가? 싶다가도 내 사심이 드러나는 모먼트가 너무 잦아지는 바람에 나도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그러다 내 마음을 확신할 수 있었던 건, 제주도에서 기념품점을 10개 가까이 돌아다니며 지형이에게 주고 싶은 선물을 샅샅이 찾아다니는 내 모습이었다. 여행을 하면서 기념품점을 들르기는 하지만, 남들이 많이 사는 듯한 물건만 사 봤지, 누군가에게 꼭 주고 싶은 것을 찾아 헤맨 적은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간들이 참 간절했고, 재밌었다.
마티니는 내가 살면서 먹어볼까 싶었던 칵테일인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칵테일이 됐다. 친구가 회사 사람들과 칵테일바에 가서, 괜히 있어 보이는 척하려고 마티니를 시켰다가 된통 당했다고 했을 때 '그러게 왜 그런 걸 먹었어. 맛있는 것도 많은데!'라고 했었는데, 이제는 마티니의 매력을 모르는 그 친구에게 다시 마티니를 먹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바 직원이 내가 화장실에 간 사이, 지형이에게 마티니를 진 베이스로 할 건지 보드카 베이스로 할 건지 고르라고 했는데, 고민하자 '남자친구 오시면 그때 말씀해 주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거기에 대고 지형이가 '남자친구 아니에요.'라고 했다고 해서 조금(많이) 서운했었던 날.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무자비한 플러팅을 하기 시작한다. 이 악물고 모른 척하며. 새벽 4시까지 2차를 하고 서로 각자 집에 가면서 '아닌가?'라고 생각했던 그날 밤은 아마 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아주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서 '그때 그랬지.'라고 오래도록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닌가?' 하면서 다음 날 밤바다를 보러 가기로 약속한 날.
아쉬운 마음에, 다음 날도 만났다. 밤바다를 보러 가자고 꼬셨다. 저녁으로 분위기 좋은 양식집에 가서 밥을 먹고, 춘장대해수욕장으로 향했다. 비록 바다는 간조였고, 바람은 태풍처럼 거세게 몰아쳤지만, 덕분에 너의 묶은 머리가 예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좋았다. 바람이 너무 거센 나머지, 5분도 못 버티고 차 안으로 들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오히려 좋았다. 따뜻한 차 안에서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은 정말이지 꿈만 같았다.
사실 나는 지형이를 제대로 알기 전에, ISTJ라는 MBTI를 듣고 나와 상극인 어떤 사람을 떠올렸었다. 좋은 친구지만 가지고 있는 결이 반대고, 그래서 대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얘도 비슷하려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잔나비를 좋아하고, 밤바다를 좋아하며, 침착맨을 좋아하는 등 주된 관심사를 공유함과 동시에 서로 깊은 호감을 느끼고 있는 상태였기에 모든 대화가 너무 재미있었다. 나는 늘 유머 코드가 잘 맞는 그런 사람과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 왔는데, 내게 지형이가 그런 사람이었다. 게다가, 나는 과하게 감상적인 편이라 늘 이런 점을 보완하고 싶다는 생각도 해 왔었는데, 지형이가 그런 나를 적절히 보완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차에서 얘기를 하다가, 칵테일 마시자고 꼬셨다. 전주로 출발한 지 1분도 안 돼서, 아까 내가 '말은 언제 놓을 거냐?'라고 물어본 것에 대한 대답으로 지형이가 대뜸 말을 놨다. '나 말 놓을래.'라는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내게 그렇게 설레는 순간이 살아오면서 또 있었나 싶다. 어리광을 부리듯 말을 놓는 마법 같은 화법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터질 듯한 심장을 부여잡고, '연하' 지형이랑 밤 도로를 달렸다.
전주로 돌아와 다시 151바에 갔다. 바 쪽 자리에 처음 앉아 봤는데, 나란히 앉으면 서로의 어깨를 맞닿은 채로 앉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서로 엄청나게 엇나갔지만, 결국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나아가고 있었음에 안심했고, 행복했던 밤. 너네 그거 다 플러팅이었던 거야~
지원청 발령인 줄 알았지 .. 아무튼 졸업식을 위해 전주로 다시 올라가는데 문자를 받았다. 쓰면서도 머리털이 곤두서는 것이, 트라우마로 자리 잡은 것 같아서 말을 줄이겠다 .. !
그리고 졸업식이 있었다. 정말 지긋지긋했던 대학 생활의 막이 내려가는 순간이었다. 나를 기쁘게도 했지만, 많이도 슬프게 했던 인고의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을 지형이와 함께할 수 있어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했다. 그 사이의 시간이 어땠든지 간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마침표를 찍어줘서 그 시간이 아주 잘 마무리된 느낌이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믿기지 않는데, 내가 뭐가 잘났다고 이런 큰 선물이 내게 온 건지 모르겠다.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고 있다는 건 슬슬 실감이 나지만, 얼떨떨한 것은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아무래도 좋다.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건 행복한 일이다.
올 때마다 혼자였는데, 그래서 너무 아쉬웠는데, 결국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오게 됐다. 수험 생활을 하며 힘들 때 Cigarette after sex의 Sweet를 틀어 놓고 안주도 없이 맥주를 마시던, 추적추적 비가 오던 밤이 생각났다. 울적할 때 나가서 걷기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무작정 걷다가, 수많은 커플들 사이에서 혼자 흔들의자에 앉아서 뭔가 커플들 자리를 강탈한 듯한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느끼며 바라보던 대운동장과 기숙사, 구름. 지형이와 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
차를 사고 나서, 언젠가 갈지도 모르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의 차박 캠핑을 떠올리며 시트 색에 맞춰 예쁜 트렁크 매트를 사서 1시간 동안 땀을 뻘뻘 흘리며 설치했었다. 그리고 단 한번도 사용하지 않아서, 그냥 뜯어버릴까 생각도 했었는데, 안 뜯길 잘한 것 같다.
사실 나는 햄버거를 먹을 때, 햄버거 라지 세트 1개에 프렌치프라이를 3개 추가해서 먹는 편이다. 그런데 내숭을 부리느라 세트 1개만 먹었다. 저 날은 꽤 배가 고팠다.
일 하느라 고생하는 지형이가 생각이 나서, 맛있는 케이크(현재 10일 가까이 숙성 중이다. 그만큼 먹기가 아까운가 보다. 새로 사줄 수 있는데 ...)와 휘낭시에, 래밍턴을 사서 줬다. 지형이는 내가 자기한테 해주는 것에 대해 표현을 잘해줘서 좋다. '해줄 맛 난다!'
지형이의 드라이기는 전원 버튼이 플러그였다. 플러그를 꽂으면 작동이 되고, 뽑으면 꺼졌다. 바람 세기 조절 스위치가 무용지물이 된 그런 드라이기를 쓰고 있었다. 그냥저냥 쓰면 되겠다 싶었는데, 아침에 준비하면서 고데기를 꽂기 위해 드라이기 플러그를 뽑는데 낑낑대는 걸 보고 '저러다가 언젠가 팔꿈치를 찧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몰래 하나를 주문했다. 그런데 주소지 입력을 전에 살던 원룸으로 하는 바람에 초췌한 몰골로 대학로를 통과해 이전 원룸에 잠입(?)한 후 택배를 가지고 왔다.
일 끝나고 서래 갈매기에 갔다. 탄수화물 중독인 나는 밥이 안 들어간 지가 오래돼서 그런지 현기증을 호소하고 있었고, 참지 못하고 밥 한 공기를 아주 빠르게 비웠다. 그랬더니 지형이가 좋아해서 기분이 좋았다. 나는 밥 한 공기를 아주 잘 비우는 사람인데, 그걸 좋아하는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게 행복하다!
나는 다 먹었는데, 지형이가 천천히 먹어서 20분 동안 기다리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굳이 밥 먹는 속도를 안 맞춰도, 먼저 먹고 재밌는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좋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지형이라서 더 좋다.
또 151바에 갔다. 상징적인 장소이기도 하고, 칵테일이 맛있다. 그리고 지형이를 보면서 처음 알게 된 것은 얼굴이 잘나면 주변 사람들이 친절해진다는 것이었다. 대충 알고는 있었는데, 실제로 보니까 신기했다. 맞아요 .. 제 여자친구예요 .. !
다음 날에는 진규 형과 수정이 누나와 카페에 갔다. 진규 형이 나룻배 위에서 객기를 부리다가 물에 빠지는 바람에 1년 치 웃음을 다 웃고 말았다(지형이랑 웃을 것은 논외). 그리고 이들을 구정문에 내려주고, 혼자 운전을 하는데 센티해지고 말았다. 내 인생에 몇 안 되는 정말 고마운 사람들. 내가 구렁텅이에 빠져 있을 때, 소방 헬기까지 띄워주며 나를 구조해 준 사람들. 이들의 은혜는 평생 잊지 못할 거다.
쓸 내용이 더 많이 남았지만, 이제 슬슬 지형이가 올 시간이라서. 아트박스에 가서 지형이가 예전에 말했던 '촌스러운 문양의 곱창 머리끈'을 구하러 가야 한다. 보자마자 '내가 사주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는데 다행히 그날 안 샀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온다더니,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이 환한 사람이 찾아왔다. 덕분에 웃음이 그칠 날이 없다. 비틀비틀 쓰러지려 하다가도 덕분에 버티고 일어선다. 'Better half'라는 표현이 자꾸만 생각나는 사람을 만나게 되어 영광이고, 앞으로도 오래도록 함께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