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는 관객이다" 리뷰 2
다 큰 성인이 되고 나서도 우리 엄마가 나에게 한 번씩 내뱉는 말이 있다. "내가 너희를 너무 선생님처럼 딱딱하게 키워서 많이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 말을 볼모로 삼아서 내가 생각할 때 부족한 나의 어떤 점들에 대한 핑계로 갖다 붙이는 일이 많았다. 내가 소심한 것은, 남의 눈치를 많이 보는 것은, 자존감이 낮은 것은, 근심 걱정이 많은 것은, 내가 이러저러한 것은, 우리 엄마가 나를 그렇게 키웠기 때문이야,라고 말이다. 엄마 탓을 하고 나의 부족한 것들을 감싸고도느라 여전히 어른이 되지 못한 기분이다.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지금도 앞의 문장을 완성하면서 속으로 '나는 우리 아이에게 절대로 저런 말 하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하고 있다. 정말 재미있는 일이다. 엄마가 했던 것처럼 하지 않겠다는 그런 마음이 내게 가득하다. 나는 우리 엄마를 좋아하는데도 말이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엄마는 뭔가 교양 있고, 자기 생각이 분명한 반듯한 사람이었다. 나는 엄마의 그런 부분을 좋아했다. 그리고 또한 항상 '엄마가 나한테 조금만 더 따뜻하게 대해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이유로 혼이 나고 매를 맞을 때면 말할 수 없이 서글프고 세상에 나 혼자인 것처럼 외로웠다. 그래서 나는 나의 아이를 키울 때에는 따뜻한 엄마, 화내지 않는 엄마, 아이를 외롭게 만들지 않는 엄마, 즉 내 기준에서 '좋은 엄마'가 되기로 결심했었다. (그렇다고 우리엄마가 나쁜 엄마라는건 아닌데, 미안해 엄마!) 무던히 애쓰고 노력해야 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나의 육아는 일종의 역할극 같은 것이었다. 자녀 앞에서는 열심히 '좋은엄마'역할극을 수행하다가 자녀가 잠들면, 혹은 등원을 하면, 비로소 내 자신으로 잠시 돌아오는 안타까운 일상이 수없이 지나갔다.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역할극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면 아예 자녀의 눈에서 사라져버리기를 선택했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안타까운 순간에는 폭발했고, 정신이 돌아오면 자녀에게 사과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해야 했다. 아, 이걸 쓰면서도 너무 심적으로 힘들어진다.
차가운 사람이 따뜻한 척 옹색한 사람이 넉넉한 척을 하는데 아이라고 그걸 몰랐을까, 전전긍긍하고 자기 자신이 내키는 대로 행동하지 못했다. 그리고 '좋은 엄마'역할극을 하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비극이 있는데, 자녀에게 기대치가 생기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애쓰고 참으며 너를 대하는데, 너도 나에게 애를 좀 써야 되지 않겠니?' 이런 심리가 내 안에 가득해서, 아이가 나에게 기대한 것과 다른 반응을 해오면 내가 너무 당황해서 굳어버리거나 혹은 황당해서 화가 나는 상황이 발생했다. '좋은엄마'가 되려고 나름 애를 썼지만 사실은 부자연스럽고 위선적인 사람이 되고말았다. 싫지만 싫지않은 척, 어렵지만 어렵지 않은 척, 좋지 않지만 좋은 척, 힘들지만 힘들지 않은 척, 마음에 들지 않지만 마음에 든 척... 쓰면서 보니 말 그대로 위선자다. 하지만 어떻게 그렇지 않은 '좋은엄마'가 될 수 있는지는 도저히 알수가 없었다. 아니, 애시당초 내가 생각하는 '좋은엄마'가 도대체 어떻게 좋은엄마인지도 잘 모르겠다. 그저 내 아이에게 친절하고 따뜻하고 다정하고 상처안주고 화안내고..내가 다 감당하고.. 그게 과연 아이에게 좋은것일까? 도대체 내가 되기원하는 '좋은엄마'는, 아이에게 바라는 '좋은아이'는 뭐란말일까? 그러다가 이 책을 읽어보게 되었다.
... 다들 자기는 윗세대가 했던 나쁜 부모 노릇보다 나으니 자기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렇지만 정작 그걸 평가하는 아랫세대는 불평이잖아. 그래서 나는 '윗세대처럼 안 해야지.'결심하는 대신 '어차피 젊은 애들은 날 이해 못 할 거야.'그렇게 생각하게 된 거야. ...
어차피 나를 이해 못할 거야,라니 이게 무슨 듣도보도 못한 컨셉인가. 확 와닿지는 않았지만 일단 작가님의 많은 고민을 거쳐 나온 결과일테니 믿어보기로 한다. 내 머리가 설정해놓은 매뉴얼대로 가 아니라 아이가 어떻게 행동하고 말하는 것을 관찰하고 내 마음에 무엇이 우러나는 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아이가 내가 받아들이기 힘든 방식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폭발할 지경이 되도록 쌓아놓지 않고, 불편함을 느끼는 바로 그때 "너가 그렇게 하니까 화가 나기 시작했어. 엄마는 예의 없이 구는 걸 못 참거든."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언제 폭발할지 모를 엄마 앞에서 눈치 보던 나의 아이도 이제는 어떻게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지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된다.
며칠 전 잠잘 시간이 임박해서 생긴 어떤 일이 떠오른다. 어떤 일로 마음이 한껏 울적해진 아들이 불 꺼진 방에서 홀로 훌쩍거리고 있기에, 살며시 들어가 토닥토닥 안아주었다. "엄마, 내가 너무 슬퍼서 그러는데 오늘만 엄마 아빠 방에서 자면 안 될까?"라고 하기에 "안돼, 하지만 너가 잠들 때까지 엄마가 같이 있어줄게."라고 말하고는 곁에 한참 있어주었다. 아이는 벽에 찰싹 붙어누워서 훌쩍거리다가, 엄마에게 등을 붙이고 누워서는 떠오르는 생각들을 종알종알 말하다가, 또 벽에 붙어서 누워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다가, 졸리다고 말하며 이불을 포옥 덮고 잠들었다. 나는 그저 곁을 지키면서 훌쩍거리는 아이의 어깨를 어루만져 주다가, 종알대는 이야기를 듣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여주다가, 생각에 잠긴 아이의 머리카락을 쓸어빗어주다가, 졸렵다는 아이에 볼에 뽀뽀를 쪽 해주었다.
무엇이 아이의 정서상 좋은 행동이었을지 잘 모르겠다. 무엇이 아이에게 원칙을 지키도록 돕는 행동인지도 잘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좋은엄마'인지 잘 모르겠다. 그냥 조용히 내 생각을 비우고 아이를 관찰할 때 그 어떤 계산도 없이 엄마 노릇을 할 수 있었다. 그날 밤 이후로 우리는 조금 가까워지고 조금 편안해졌다. 진정한 정서적인 교류였던 것이다. 나의 아이는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사랑스럽고, 다양한 면면을 가진 놀라운 인격체였다. 내가 예상하지 못한 말과 행동을 당당하게 하는 것을 보면서 아이를 알아가고, 그에 따라 반응하는 나의 내면을 관찰하면서 나를 알아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나 자신인 채로 엄마가 되는 것, 아이에게 무언가를 제공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편안하고도 신나는 일이다. 하지만 여기까지도 많은 고민을 했다는 것, 그래서 이 책의 도움을 받아 여기에 도달했다는 것이 좋다. 그게 바로 '좋은 엄마'가 되는 것 아닐까. 앞으로도 지금은 상상 못할 많은 고민들을 하면서 골머리를 앓게 되겠지만, 그리고 또 어떤 책의 도움을 받게 되겠지만 말이다.
... 엄마가 된 후 나의 생각들은 어린아이 같이 단순한 질문들로 채워졌다. 가령, 아이가 즐겁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아이를 내버려둔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좋은 엄마와 이기적인 엄마의 차이는 무엇일까? 나는 좋은 엄마일까? 내가 아이에게 원하는 것이 아이에게 얼마나 이로운 것일까? 정답은 찾지도 못하고 질문만 끝없이 쌓여갔다.
그렇게 질문이 늘어나는 동안, 내 아이들은 무럭무럭 잘 컸다. ...내가 무엇을 잘해서 그렇게 잘 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아이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랬더니 내가 질문하고 아이를 관찰하는 것 자체가 아이의 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 (서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