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40대가 되어 가정을 이루고 아이가 있는 여자가 되면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을지..
이런 생각을 했던 나이가 20대 아니 30대였을까..
그 땐 막연히 무언가 가진 기분일 거라 생각했었던 것 같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위치에서 자리에서 내 가정, 내 아이들, 내 남편이 생겨
말그대로 기득권자, 기혼, 기성세대가 되어
손에 무얼 쥐고 있는 사람이 되어
그 어떤 것도 빠져나가지 않게 하려고 애쓰며 살아갈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정말로 40대의 아이들을 가진 결혼한 여자가 되어 버린 나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지 무슨 감정으로 살아가는지 잘 모르겠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모든 감정과 생각들을 마주할 여유도, 마주하기도 싫어서
그냥 내 감정이나 생각은 여기저기 내팽겨쳐두고,
꾹꾹 아무렇게나 구겨서 던져버린 비닐봉투들처럼
막 쑤셔박아두고 살아가는 기분이다.
그것들이 쑥쑥 튀어나오거나 몸을 아프게 하거나
원인을 알 수 없게 가슴을 답답하게 하거나
아무도 없는 방에서 꺼이꺼이 울게 만들때면
아 정리해야지, 내 마음을 내 생각들을 정리해봐야지,
내가 어떤 생각으로 어떤 감정으로 살아가는지
잘 알고, 그에 맞게 치료하며 살아가야지 하면서도
큰 병이 있을까봐 건강검진을 못 받는 사람들처럼
큰 문제가 발견되어서 내 인생에 큰 변화가 생길까 두려워
그냥 맥주 한캔을 들이키며,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사먹으면서
달달한 초쿄과자 한 봉지를 와구와구 먹으며
적당히 임시방편으로 또 다시 구겨넣어 버린다.
정말 신기한건 그래도 일상에선 어떻게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웃고 한껏 텐션을 올려
아이들과 신나게 뛰어다니며 하루를 보내는데
분명 지쳐 쓰러져 잠이 들었는데
내 무의식에 잠을 자고 있는 동안 내 꿈으로
내 눌러놓은 감정들이 침입한 느낌이다.
어떤 날은 너무나도 가슴 설레는 연애를 한다.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는 그에게
따뜻한 위로를 받으며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애타게 좋은
그 떨림이 꿈 속에서도 느껴진다.
정말로 깨고 싶지 않을정도로..
어떤 날은 학교에 돌아가서 시험을 보고 있다.
시험날인데, 모두가 시험 준비를 하고 있는데
나는 시험 범위를 그 날 알아서 엄청 당황하고 있다.
내가 왜 진작 준비를 하지 않았을까..
왜 시험날 시험범위를 알고 이리도 진땀을 흘리고 있나..
그 떨림이 그 긴장감과 죄책감이 나를 꽉 누른다.
그런 꿈을 꾼 날 새벽에 눈을 떠 검색창에 꿈풀이를 찾아보았다.
도대체 어떤 감정이 내 무의식에게까지 침입한 것일까
엄청난 궁금증이 일었다.
시험에 관한 꿈은 누군가에게 평가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라고 한다.
평가당하는 느낌에 심리적 압박감을 느끼고 있다고..
연애에 관한 꿈은 말 그대로 사랑받고 싶은 욕망의 표현이라고 한다.
말라붙은 줄 알았던 내 욕망들이 이리도 간절했던가..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혼과 육아 이외에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결혼과 육아를 하며 내가 이토록 사람에 대해 연구한 적이 있나 싶다.
그 사람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 그 사람의 말투를 이해하기 위해
그 사람들을 둘러싼 가족관계를 연구하고, 그 사람의 행동을 통해 성격을 분석해보고
입 밖으로 뱉어져 나오는 말을 그 말 그대로가 아닌
내가 파악한 그 사람의 번역기로 번역해서 들어보려고도 애썼다.
그러나 애를 쓰고 또 애를 쓰면서 깨달은게 있었다.
설령 그 사람의 일대기를, 그 사람의 행동과 말의 숨은 의미를 파악하고
성향을 파악해서 번역해보려 노력해도.
결혼이라는 관계를 통해 엮인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지극히 감정적인 관계라
설령 그 사람의 말투에 익숙해 진다고 해도, 그 사람의 가족관계를 통해 그 사람이 가진 성격이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해도
내 감정이 다치는 것은 막을 수가 없다. 중요한 것은 이해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내 감정을 무디게 하는 것이었는데 내 감정을 다치게 하는 것은 아무리 반복되어도 무뎌지지 않는다.
끊임없이 엄마 싫어를 반복하는 아이라면 그 아이의 그 말 뒤에 숨은
두려움, 불안함, 긴장감, 예민함을 헤아려 몇 번이고 안아 줄 수 있다.
그런데 신기한 건 결혼이라는 관계를 통해 맺어진 그 사람의 '나는 너랑 대화하기가 싫어'
라는 말은 어떠한 의미를 부여해 이해해보려 해도 도저히 안아지지 않는다.
도저히 무뎌지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내 감정을 함부로 내보일수가 없다.
원래 나는 감정의 결과가 어떨지 생각을 하지 않고 내뱉는 성격이 아니어서였을까.
내 감정을 내보여서 이루어지는 결과가
뜻하지 않는 결과와 상처로 이어질거라면
그냥 구겨서 넣어버리리라 삼킨다.
마구마구 구겨버린다.
나도 잘 모르겠다. 그래서 글을 쓰는 행위도 하지 않았었는데..
감정을 무디게, 이성만으로 살아가자.. 했었는데..
내 인생에 가장 힘든 시절은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겉보기엔 별거 없어 보이는 아이였는데..
그냥 공부에 지치고, 수능만을 위해 달려야 하는 현실이 버거운
고등학생의 숙명이 힘듦에 일부분 차지한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가장 힘든건, 그 시절 나의 마음 속에 꿈틀꿈틀 올라오던
감정들이었다. 혼란스러움, 궁금함, 두려움 등등
교과서와 다르게 진행되는 관계들, 교실 내의 권력 관계,
권력관계에 그대로 호응하는 교사들..
행동 뒤에 읽혀지는 이기심, 수험생은 이기적이어야 한다고 암묵적으로 부추기는 현실.
무엇보다 그 무엇도 느끼지 않아야 함을 잘 아는데.
왜 모든걸 느끼고, 감정에 동요되며 집중하기를 힘들어 하고.
또 그 집중하지 못함에 괴로워하며 마음을 다잡기 위한 시간들을
버리는지.. 그토록 애타게 감정이 동요되지 않길 바랐던 적도 없던 거 같다.
그 시절 내 노트와 내 책들에는 온통 유치환의 '바위'라는
시가 쓰여져 있었다.
'아예 애련에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쪽으로 깨트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이 시는 아마도 저자의 국가관과 맞물려
주제, 내용 등이 설명되었던 거 같은데..
사실, 나에겐 정말 간절히 바라는 모습 그 자체였던거 같다.
어떤 희로애락에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하루의 일과를 수행하는 삶.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수험생의 시간이 끝나고
나에게 수많은 시간이 허락한다면
이 마음의 동요를 한번쯤 진하게 느껴 보고, 생각해보고
싶다는 욕망도 잔존했던 것 같다.
그 가슴 속의 동요들이 때론 진짜 내가 누구인지
일깨워 줄 수도 있을 거 같았기에..
그러나..시간이 흐르고 흘러.
막상 평생 끝나지 않는 수험생처럼
매일 수많은 과제와 할일을 안고 살아가면서,
문득 문득 던져지는 돌에 끝없이 파문들이 일으켜지는
나의 동심원들을 볼때마다
또다시 그 시절 그 '바위'가 떠오른다.
나는 정녕 바위가 될 수 있을까..
혹은 바위 속 무언가 뜨거운 것이 언젠가
폭발하여 화산이 되어 버리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