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에 아로새긴 스물일곱 가지 세상
글자풍경
발행일 2019년 1월 30일 초판 1쇄
지은이 / 유지원
펴낸곳 / (주)을유문화사 (서울시 마포구 월드컵로16길 52-7)
- 그 안에는 장인의 밀도 높은 시간과 삶의 에너지가 응축되어 있었다. 이 작품을 창조한 대가는 무명으로 남았다. 그 모습을 보며 든 생각이 있었다. 만일 그가 명예와 부에 눈을 떳다면, 마음이 조급해져서 이토록 열정적이면서도 고요하게 집중하기는 어려웠을지 모른다는 것. 쉽사리 조바심치는 현대인을 숙연하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밀도였다. [115p]
- 젊음이 꼭 나이나 연도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시대의 기술적인 요구와 감성을 민감하게 읽어 내고, 도전과 탐색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을 의미한다. [189p]
- 글자체의 아이디어는 여느 조형이 그렇듯 머리속에 있을때는 플라톤적이고 수학적인 세계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의 현실 속 물리 세계에 구현할 때는 도구와 재료, 힘과 움직임이 필요하다. 즉 물리학과 생물학이 관여하기 시작한다. [219p]
- 일본 도로 글자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아 감탄하느라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요인은 표준 디자인과 시스템의 측면을 넘어서, 칼 같은 마감으로 작업에 임하는 시공자들의 마음가짐이다. 작업을 대하는 이런 태도야말로 도로를 아름답게 만든다.
분필선으로 깨끗하게 밑그림을 제도한 흔적도 자주 보인다. 모서리는 깔끔하게 각이 잡혀 있다. 글자 너머로는 그 사회와 사람들이 보인다. 무명의 시공자들이 이렇게 빈틈없는 작업을 하는 배경에는 사회의 어떤 분위기가 있을까? 엄격한 내부 규율일까? 도시 미관과 시민들을 생각하는 배려의 마음일까? 정돈되고 꼼꼼한 것을 좋아하는 성품일까? 아무튼 작업자로서의 자부심과 그만한 보상 및 존중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저런 수준의 완결성에 도달하기 어려우리라 짐작됐다. 우리는 작업을 물리적으로 구체화하는 ‘인간’ 노동의 높은 질적 수준을 추구하고 그만큼 대우하는 데에 더 가치를 둘 필요가 있다. [252 ~254p]
- 손으로 쓴 글씨는 말끔하고 균질하게 인쇄된 글자보다 한층 많은 비언어적인 메시지들을 전한다. -중략 - 인간은 미세한 물리적인 자국과 흔적들 속에서, 놀랍게도 타인의 행동과 마음속 자취와 요동을 감지해낸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온 편지라도 마주할 때면, 같은 자국에서도 언어 너머 마음과 감정의 흔적을 더 필사적으로 해독하려 든다. 글씨를 써 내려간 이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특정 순간의 머뭇거림이나 흔들림을 느끼고 그 마음을 읽는다. [279p]
- 그림과 글자는 한 몸에서 분화했다. 한 폭의 그림 같고 한 수의 시 같은 글자들이 강물에 달 찍히듯 사람의 마음에 찍힌다. 자국으로 남겨지고, 그리움으로 그려지고, 기억으로 새겨지고, 여러 사람의 마음속에 각인되어 살아남아 생명처럼 생생한 심상과 이야기를 이어 간다. [29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