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잠 못 이루는 밤
난중일기[낳-은중일기]는 이제 막 10개월이 된 딸 단풍이를 키우고 있는 저의 육아일기입니다. 이순신 장군님의 난중일기를 업신여기는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으며, 매일 작은 일들까지도 일기로 적어가며 치열하게 살았던 장군님처럼 전쟁 같지만 행복하고 소중한 지금의 시간들을 매일 적어보자는 생각에서 지은 제목입니다. 육아일기에 관심이 없으시다면 조용히 지나가셔도 좋습니다. :-)
지금은 새벽 3시 23분.
자야하는데 말똥말똥하다. 2시 40분에 껬으니 벌써 40여 분이 지났는데 잠이 안 든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다가 결국 스마트폰을 집어들고 인터넷과 페북 눈팅을 했는데도 잠이 안 온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탓에, 눈팅용으로만 쓰고 있는 페북에 오랜만에 약한 소리 좀 할까 하다가 브런치를 켰다. 어차피 페북에 공유하니 그닥 다르지 않겠지만... 오랜만에 정말 할 말이 많아서다.
지금 잠이 안 오는 건 이유가 있다. 첫번째 이유는 너무 두통이 심해 저녁 8시 반부터 잠들었기 때문이다. 한달 가까이 나는 두통에 시달리고 있고, 최근에는 하루 정도를 제외하고는 일주일 내내 두통을 겪고 있다. 처음엔 급체 때문인 줄 알았다. 그런데 끼니를 걸러도 두통이 심한게 수상했다. 또다시 두통에 시달리던 어제 저녁, 나는 혹시나 편두통이 아닐까 싶어 검색에 돌입했고 긴장성 두통이라는 질환을 발견했다. 두통이 발생하는 부위, 증상이 일치하는 걸 보니 그 녀석이 맞는 모양이었다. 스트레스나 피로가 심할 때 오는 두통이었다. 생각해보니 잠을 자고 일어나면 두통이 사라졌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내 머리는... 통증 하나 없이 아주 후레쉬하다.
두 번째 이유는 아마도 두통을 유발했을, 스트레스 요인 때문이다. 이사를 결정하고 집을 내놓았는데 한달이 넘도록 집이 나가지 않고 있다. 한달이라는 시간이 짧은 건 아니지만, 집을 15번이나 보여준 나로서는 이제 정말 지쳤다. 사정상 옮기는 것이니 잘 부탁드린다고 그리 애원을 했건만 집주인이 말도 안 되게 높은 가격을 불러버리는 바람에 집이 나가질 않는다. 그런데 부동산은 꼭 자기가 원하는 부동산에서만 하겠다고 고집도 부린다.
어제는 부동산 중 한 곳에서 사과까지 했다. 하도 안 되니까 이젠 집 보여달라고 이야기하기도 염치가 없다고 했다. 부동산 잘못이 아니니 괜찮다고는 했지만, 속으로는 열이 났다. '그렇게까지 염치가 없고 죄송하실거면 집주인한테 집값 좀 내려달라고 하시던가요.'
집 봐도 연락 없는 게 이젠 하루이틀 일도 아니고, 말도 안 되는 가격을 가진 이 집의 샷시와 욕실을 보고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집 구경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는 것도 해탈했다. 거기다 두통까지 있으니 오늘도 집을 보여줬지만 거래가 성사되지 않았음에 마음을 상해하지 않으면서 정신없이 잠들었다. 근데 이 새벽에 깼는데... 생각할수록 자꾸 화가 난다.
계약 당시부터 호되게 겪은 집주인이다. 집값을 낮출 사람이 못된다. 그럴 사람이었으면 진작에 이 가격에 내놓지 않았을 거다. 그저께에는 이사날짜도 맞고, 수리조건도 큰 문제가 없었는데 집주인 때문에 계약 직전에 틀어졌다는 사람이 있다는 걸 들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좀 깎아달라고 했다가 집주인이 거절해서 그렇게 된 거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다.
거기다 집주인이 고집을 부려서 두 군데 부동산에만 내놓고 있는데, 한 부동산은 한달이 넘도록 타 부동산 소개만 해주고 이 집을 보러온 적이 한 번도 없다. 다른 부동산은 사장님이 병원에 입원하시는 바람에 그저께부터 이 집을 본 적이 없는 다른 분이 일을 진행 중이다. 처음부터 우리가 다른 부동산들에도 내고 세입자를 찾겠다고 했는데 자기 집이니까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고 못하게 하더니 결과가 이 모양이다.
누워있는데 별 생각이 다 든다. 나는 부동산이랑 싸워야 하나 집주인이랑 싸워야 하나. 집값을 낮추든, 그게 안 되면 우리가 다른 부동산들에도 내놓게 해달라고 요구를 해야 하나 아니면 계속 기다려야 하나. 내 나이 스물아홉, 내 마지막 20대의 연말을 세입자의 서러움으로 보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집주인이 너무함에도 불구하고 이리 미련스럽게 구는 건, 집주인 때문에 이미 남편과 나 모두 학을 뗐기 때문이다. 그냥 집주인이 아니라 이 부근에 세를 여러 채 놓고 있는 임대업자라 요만큼도 손해보지 않으려고 한다. 계약 당시에는 세입자들이 번호키를 자꾸 고장내거나 하나씩 잊어버리고 간다면서 번호키를 가져가려고 해 난리가 한번 났다. 신혼부부 집 열쇠를 왜 당신이 들고 가느냐며 시아버님이 강하게 나서자 결국 항복했던 집주인은, 혹시 몰라 내가 집 비번을 바꿔놓고 현관 방충망 설치 때문에 인테리어 사장님께만 알려준 걸 어떻게 알았는지, 일 때문에 미팅을 다녀오니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인테리어 사장님을 앞세워 집에 들어와 집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자신이 무례했다는 걸 잘 모른다.
거기다 남편은 직장에서 눈치를 보아가며 집주인의 전화를 받았는데(말이 많아서 한번 통화하면 거의 10분은 이야기한다), 본인이 건 전화면서 갑자기 자기 바쁘다면서 먼저 뚝 끊었단다. 남편은 그 이후론 집주인과 말도 섞기 싫다고 했다. 그러니 우리는 최대한 집주인과 트러블 없이 빨리 결론을 내는 게 최선이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집주인 때문에 우리의 에너지를 낭비하는 게 아까워서다.
쓰고나니 허탈하다. 육아일기에 부동산 얘기만 난무하다니. 그래도 한달이 지나서 이 정도에 그치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처음 2주 간은 정말 분노가 가득했다. 집주인한테 정나미가 떨어져서 이 집도 꼴보기가 싫었다. 안 그래도 문제가 많은 집인데, 얼른 떠나버리고만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지금은 그때보다 화가 덜 난다. 물론 잠 못 이루고, 해탈한 것 같아도 속병인지 어떤 건지 두통까지 겪고 있지만, 그래도 화가 덜 나는 건 전적으로 단풍이 때문이다.
사실 단풍이는 집에서 컨디션이 제일 좋다. 아기들은 모두 자기 집에서 제일 잘 논다. 익숙한 환경이기 때문이다. 속도가 붙어 가끔 순간이동하는지 착각할 만큼 빠르게 기어다니고, 주변 물건을 잡고 일어나며, 집안 곳곳에 있는 물건들을 전부 꺼내놓는 게 취미인 단풍이에게 집은 거의 일명 '내 나와바리' 수준이다. 외출했다가 집에 들어와 매트 위에 내려놓으면 박수까지 치면서 좋아한다. 그야말로 집순이다.
신기한 건, 우리 집보다 더 넓은 집을 가거나 장난감이 많은 집을 가도 집에서만큼은 놀지 못한다는 거다. 낯선 장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어느 정도 적응이 끝나도, 집에서만큼 옹알이를 하거나 신나게 놀지 않는 거다. 잠도 마찬가지다. 집에서는 낮에 침대에 눕히면 자는데, 밖에서는 아무리 푹신한 침대에 눕혀도 눈을 번쩍 뜬다.
10개월에 들어서면서 웃음이 더 많아진 단풍이를 보며 같이 웃고 있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단풍이는 이 집이 문제가 있건 없건, 그냥 집이라서 여길 좋아하는구나.'
그러고 보면 정말 그랬다. 단풍이에겐 이 집이 넓지 않은 것도, 샷시가 엉망인 것도, 욕실 타일이 평면이 아니라 불쑥 올라와있는 것도, 안방 벽에서 찬 바람이 나오는 것도 별로 신경쓸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 건 오히려 어른인 나와 남편이 신경쓰고 불편하게 느끼는 거였다. 문제가 많은 집이긴 하지만 단풍이가 놀고 먹고 자는데에 큰 지장이 없었다. 우리는 이 집에 낙제점을 줄지 몰라도 단풍이는 최고의 점수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나도 그렇다는 걸 금세 깨달았다. 나도 집이 제일 편하다. 이래저래 불만이어도, 집에서 쉬어야 푹 쉰다. 남편도 마찬가지. 문제가 많은 집에 안주하며 살아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니 남편과 나, 단풍이 이렇게 세 식구가 함께 자고 일어나서 뒹구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었다.
단풍이는 그렇게, 내게 아주 큰 깨달음을 선사한 것이다.
집은 그냥 '집'이어서,
좋다는 걸 말이다.
돌아보면 그리 나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이런 집주인을 만난 덕분에 부동산 문외한이었던 나는 이제 엄마아빠의 도움 없이도 부동산과 어렵지 않게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레벨에 도달했고, 집주인이 어디까지 고집을 부리고 어디까지 억지를 쓰고 있는지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생겼다.
또 짐이 많아보이면 집을 볼 때 매력이 떨어져 보일까봐 짐정리도 한바탕 했더니 청소할 일이 줄어서 집안일 스트레스가 많이 사라졌다. 설거지도 쌓여있으면 보기 안 좋을까봐 생겼을 때 바로바로 했더니만 내게도 좋았다. 텅 비어있는 싱크대를 볼 때마다 속이 후련했다. 늘 집안일을 하느라 단풍이랑 잘 놀아주지 못하고 우울함도 컸는데, 집안일이 줄어드니까 집에만 있어도 즐겁다. 단풍이처럼 나도, 집이 그냥 '우리 집'이어서 만족하고 즐거워하는 걸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단풍이를 키우면서, 단풍이에게 배운 가장 큰 깨달음인 것 같다. 단풍아, 너는 이제 10개월인데 엄마는 29년을 살아놓고도 아직 철이 없으니 어떡하면 좋니.
아직도 잠은 안 오지만(ㅜㅜ) 지금부터 자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단풍이가 일어나서 나를 깨웠을 때 엄청난 피로와 마주하게 될 거다. 이제 다시 자고 일어나면 또 집을 보러오겠다는 연락이 올 거고, 부동산에 실망할 수도 있고, 진짜 그냥 집주인이랑 싸울까 하는 생각도 들 수 있겠지만 너무 걱정하지 않으련다. 아마도 단풍이가 하루종일 온 집안을 헤집고 다니면서 잔뜩 웃어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