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란 무엇인가
단풍이를 낳고 나서, 얼마나 여러 번 말했는지 기억도 잘 안 나지만 늘 남편에게 결연하게 선언했더랬다.
"둘은 못하겠어. 단풍이만 잘 키우자."
임신이나 출산이 힘들었던 건 아니다. 난 임신도 출산도 하드하지 않은 편이었다. 토 한번 하지 않고 오히려 너무 먹어서 17키로의 살을 얻은 입덧같지 않은 입덧, 비록 조산기로 5일 입원했지만 그건 다른 조산기 산모들에 비해 매우 양호한 수준이었고, 집에서 누워지낸 한달을 제외하면 일주일에 2번 발레를 했고, 막달엔 그야말로 '쏘다녔다.' 출산예정일을 4일 남겨놓고 지하철 왕복 2시간 거리도 다녀왔다. 하이라이트는... 물론 병원이 너무 가까워서 그랬지만 진통이 왔을 때 집에서 병원까지 걸어갔다.
그렇게 걸어서 분만실에 들어갔는데 3시간 동안 진행이 1도 안 되었다. 촉진제를 맞고 나서야 진행이 너무 빨라서 마취과 선생님이 출근하자마자 제일 먼저 무통주사를 놔주었다. 무통주사 덕분에 나는 힘을 주다가 계속 잠이 들어 남편이 깨웠고(심지어 코까지 골았다고 한다), 무통주사 맞은지 1시간 13분만에 단풍이를 낳았다. 후처치가 끝나고 대기하는 동안 나는 신나게 카톡과 전화를 했고, 병실에 올라간지 1시간 만에 혼자 씩씩하게 걸어가 단풍이를 면회했다. 다들 오늘 아이 낳은 산모같지 않다고 했다. (물론 영양제 효과가 떨어진 다음날에 앓아누웠다.)
여튼 이렇게 임신과 출산이 험난하지 않았다. 왜 엄마들이 임신과 출산이 힘들어도 다시 아이를 갖는지 알 법했다. 진짜 힘들긴 한데, (무통주사를 맞을 수만 있다면) 한번 정도는 더 할 수 있을 것 같아. 이런 느낌?
그럼에도 둘째는 내 삶에 없을 거라는 결심을 하게 한 건 단풍이가 백일 때 아파 중환자실에 들어가고 오래 입원해서도 아니었다. 내게 너무 자주 찾아왔던 우울증 때문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는 사람같고, 이렇게 애나 키울 거였으면 공부는 왜 그리 열심히 했었나 싶고, 여행도 원없이 다니고 노는 것도 원없이 놀았으면 좋았을 걸 후회하고, 다신 일을 하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에 시달렸다. 그런데 난 좋은 엄마도, 좋은 주부도 못되었다. 육아도 못하고, 살림이나 요리는 더욱 못했다. 급기야 깊어진 우울증은 '단풍이가 이 세상에 안 태어났으면 좋았을텐데. 결혼하지 않았으면 좋았을텐데. 그냥 나 혼자 살걸 그랬다. 다 버리고 혼자 해외로 떠나버리고 싶다.'라는 생각까지 들게 했다.
온갖 애교를 부리며 엄마한테 활짝 웃어주는 단풍이를 보면서도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겠단 생각을 하는 나를 발견한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단순한 우울이 아니라 심각한 우울증이 맞다는 깨달음이 확 왔다.
우울증은 단풍이의 돌이 지나도 계속되었다. 조금씩 나아지긴 했지만 아예 떨어져나가진 않았다. 그러다 단풍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많이 편해졌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살림 실력을 늘렸다. 어린이집에서는 내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다양한 활동들을 단풍이에게 제공했고, 필요할 때는 선생님께 단풍이의 발달 상태나 문제점에 대해 의논하거나 상의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단풍이의 성장과 발달을 돕지 못하고 있는 나쁜 엄마라는 돌덩이 같은 마음의 짐에서 벗어났다. 이대로만 산다면, 단풍이가 커갈수록 나는 더 자유로워지고 행복해질 것 같았다. 그러니 단풍이만 잘 키우자고 했다. 심지어 애 하나만 키우는 게 결코 흠이 아닌 시대 아닌가.
그런데 이천에 와보니 웬걸, 애가 셋인 집이 왜 그리 많은지. 애가 넷인 집도 적지 않았다. 서울에서는 둘째 계획이 있는지 다들 조심스레 물어보는 분위기였는데, 여긴 대체적으로 만나는 사람들마다 둘은 기본이고 진짜 행복은 셋부터라며(!) 얼른 서두르라(?)고 재촉했다. 알고보니 초등학교에 8반까지 있는 다산의 도시였다.
이런 분위기가 한몫 했는지, 그런 말을 계속 듣다보니 미동조차 없던 굳건한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했다. 늦둥이를 키우는 사람들은 나이 터울이 적어야 서로 잘 논다고 했고, 그나마 엄마가 갓난아기 육아를 덜 까먹었을 때 키워야 덜 고생한다고 입을 모았다. 생각해보면 연년생인 둘째 동생과는 완전 친구처럼 지냈는데, 6살 차이인 막내 동생과는 은근 벽이 있었다.(그나마 같이 20대가 되면서 벽이 좀 없어졌다) 그리고 단풍이를 백일 때까지 어떻게 키웠는지 벌써부터 기억이 안 난다.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터울이 적은 아이 둘을 키우고 있는 사람들은 초반엔 힘들지만 나중에 너무 편하다고 했다. 외동일 땐 엄마나 아빠 둘 중 한 사람이 아이와 계속 놀아줘야 하지만, 곧 둘이 어울려 놀기 시작하면 엄마아빠가 좀 자유로워진다는 이야기였다. 어린이집도, 유치원도, 학교도 비슷한 시기에 같이 다니게 되어 적응도 빠른 편이라고 했다. 이것도 맞는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외동을 원하지 않는 이유로 남편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이것 하나를 강하게 꼽았다. 혹여나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서로 의지할 수 있는 형제자매가 있는 것이 좋다는 것. 남편은 외동으로 자랐기 때문에 꼭 단풍이에게 형제자매를 만들어주고 싶다고 했다. 삼남매의 첫째로 살아온 터라 나도 여기에 고개 끄덕.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쓸쓸해보이는(?) 단풍이의 뒷모습도 한몫했다. 그렇게 혼자 노는 단풍이를 볼 때마다 둘째가 숙제처럼 머릿속에 떠오를 것 같았다.
그래서 이게 과연 내 인생의 중요한 숙제인가부터 시작해 내가 이 숙제를 꼭 해야 하나, 꼭 해야 할 숙제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남편에게도, 단풍이에게도 좀 미안하지만 사실 이 고민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나"였다. 또 다시 그 우울증, 어쩌면 더 심하게 올지도 모를 우울증을 버텨낼 수 있을까? 심지어 연고가 없고 시댁친정까지 모두 먼 이곳에서 애 둘을 잘 키울 수 있을까?
결국 나는 단 하나만 보고 결정을 내렸다. "나"에게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기로 한 것이다.
'만약 올해 둘째를 가진다면 내년에 낳고, 1년만 고생해서 돌이 되면 어린이집에 보낸다. 그러면 나는 32살에 숙제(?)를 끝내고 자유에 접어들 수 있다. 그때부터는 부담없이 하고 싶은 일이나 공부를 시작해볼 수 있다. 둘째를 언제 갖게 될지 몰라 망설이던 취업 도전도 해볼 수 있을거다. 40살이 되기 전에 애 둘이 초등학생이면 진짜 많은 걸 도전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둘째에 대한 아주 강력한 거부감은 좀 사라졌다. 완벽하진 않지만 그래도 무조건 둘째는 없다던 내 마음이 변하자 남편은 기뻐했다.
그런데 배란일도 아닌 전혀 생뚱맞은 날에 생긴 단풍이에 비해 둘째는 막상 가지려고 하니 잘 안 생겼다. 여기다 상황이 이래저래 바뀌면서, 아무래도 둘째는 나중에 갖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상하게도 그런 결론을 내리고 나서부터 단풍이와 셋이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 행복했다. 셋이 한 침대에 누워서 뒹굴거리고 웃다가 잠드는 것도 좋고, 단풍이의 손을 하나씩 잡고 계단을 내려가는 것도 좋고, 셋이 나란히 앉아 밥을 먹는 것도 좋았다. 둘째 생각은 점점 저 멀리로 사라져갔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주변 지인들에게 "아이는 안 가져도 돼"라고 말하고 있었다. 물론 단풍이는 너무 예쁘지만 선뜻 권하고 싶지 않을 만큼 육아는 힘들고 고된 일이었다. 아무리 아름답게 생각하려고 노력해도 부부만 살다가 아이가 생기면 그만큼 돈이 많이 들어가고, 엄마는 자신의 자유는 물론 직장도 잃기 쉬우며, 부부만의 오붓한 시간을 갖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그냥 부부가 둘이 알콩달콩 살고, 자유롭게 자기 하고 싶은 일이나 취미를 즐기고, 1년에 한번 해외여행 다녀오고...(정말 육아에 드는 돈을 모으면 해외여행을 다녀오고도 남을 돈이다) 애엄마이지만 난 아직도 이게 더 좋아보인다.
무엇보다 30살에 애엄마로 살아가는 게 힘들었다. 친구들이 직장에서 커리어를 쌓고 휴가 때 해외여행을 떠나는 게 너무 부러웠다. 우울증이 심각할 때는 카페 사진만 봐도 부러웠다. 아기를 데리고 카페에 앉아있을 수가 없어서 늘 아기띠를 맨 채로 테이크아웃만 하던 시절이었다. 왜 이렇게 가고 싶은 카페도 많고, 좋아하는 전시회도 많이 열리는 걸까. 아이만 없어도 활동반경이 몇 배는 차이가 나니 나는 정말 진심과 정성을 다해 아이 낳는 것을 말렸다.
비단 나만 이러는 것이 아니었다. 포털 사이트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거나 맘카페에만 들어가도 "둘째 꼭 가져야 하나요" "아이 안 낳고 둘이 지내는 게 좋네요" 등등 하나는 키우겠지만 둘은 못 키우겠단 사람들이 많고, 아이 없이 부부끼리만 사는 게 행복한 사람들도 많다. 오히려 아이 낳기를 적극 권하거나 아이는 많을수록 행복하다는 댓글을 남기는 사람이 희귀할 정도다. 그래, 요즘 같은 세상에 둘째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이제 마이너한 생각이야. 마침내 나는 둘째 생각을 접었다.
그런데 세상사가 다 그런가보다. 취업이 그랬듯, 상품 당첨이 그랬듯, 연애가 그랬듯, 오히려 너무 간절하게 원하면 잘 안 되고 마음을 비우면 느닷없이 찾아오더니만 둘째도...... 마음을 접었더니 갑자기 찾아왔다. 럴수럴수이럴수.... (이런 건 안 똑같아도 되는데!!!!!!!)
단풍이도 그랬지만 정말 느닷없는 등장이었다. 일단 기쁘다는 느낌보다 얼이 빠져서 그저 당황스럽기만 했다. 내 삶의 스케줄이 전부 뒤흔들렸기 때문이다. 뿌리염색이 시급한 내 머리는 이대로 몇달 동안 투톤으로 지내야 하고, 하려고 계획한 일들이 있었는데 반도 못하게 생겼고, 둘째는 없다고 확신하며 그동안 육아용품을 많이 갖다버려서 다시 사야 할 물건이 많을지도 모른다.
거기다 이제야 겨우 일반인 옷을 입을 수 있게 되었는데 다시 임부복을 사야 하고 튼살크림도 다시... 다이어트도 끝났다. 단풍이 임신 때 찐 살이 다 빠지기도 전에 둘째 임신이라니... 여기에 어지럼증으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 하늘을 찌르며 끝판왕으로 업그레이드된 단풍이의 떼와 고집을 받아내면서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사실 참 이상한 일이다. 한 생명이 세상에 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고 기쁨이며 축복인데, 나는 단풍이 때도 그렇고 둘째도 그렇고 내 삶에 갑자기 나타나 모든 것을 뒤흔들어버리는 걸림돌로 여겨지니 말이다. 이렇게 머릿속이 복잡하다가도 지금 내 몸 안에서 열심히 세포분열하며 사람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을 둘째를 생각하면 금세 미안한 마음이 든다. 첫번째든 두번째든 임신은 역시 기쁘면서도 우울하고, 설레면서도 아쉽고, 결연해지면서도 다 놓아버리고 싶어지는 일인 것 같다.
결국 나 자신에게 세뇌시킬 목적으로 둘째의 태명은 "쁘미"로 지었다. 단풍나무 태몽을 따라 태명을 지었던 단풍이와 달리 아무도 태몽을 꾸지 않아 고민하던 차에 "둘째는 기쁨이다"라는 의미를 담아 "기쁨이"로 하자고 제안했는데, 남편이 이름이 귀엽지 않으니 "(기)쁘미"로 부르자고 해서 이렇게 결정되었다.
다행히 이번에도 토덧은 없었으나 울렁거림과 미식거림 속에 살던 입덧지옥을 지나자 생각이란 걸 조금씩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단풍이 때는 몸이나 호르몬 변화에 당황하기에만 바빴는데, 그래도 한번 겪은 거라 그런건지 아님 내가 2년차 엄마가 되어서 아주 조금은 자랐는지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중 가장 큰 깨달음은 비로소 '둘째의 삶'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자라면서 내가 동생들에게 양보한다는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었다. 대학 마지막 학기 때 대학원 진학을 알아보다가 내 아래로 줄줄이 있는 동생들을 생각하며 포기했을 때 더 그렇게 생각했다. 나중에 돌아보니 그때 대학원에 진학할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어서 도전해도 안 됐을 거지만(타 대학원에 타 전공 진학이었다), 일단 도전 자체를 그렇게 포기했다. 이것이 내가 책임감이 투철한 첫째로서 우리 집안을 위해 내릴 수 있는 아주 중대하고 좋은 결정이라 여겼다. (써놓고도 민망하다. 왜 이렇게 혼자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지?)
하지만 사실 부모님은 첫째인 내게 거는 기대가 컸고 그만큼 특혜를 많이 누리게 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졸업 후 출판일을 배우겠다며 취업을 오랫동안 미루고, 취업 후에는 갑자기 결혼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부모님의 기대와 특혜를 과감하게 부셨다. 막내는 막내여서 부모님이 살뜰하게 챙겼다. 그 틈에서 자기 미래를 열심히 준비하며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은 둘째가 먼저 취업을 하고 잘되는 모습을 보며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많이 들었다. 내가 결혼해 가정을 꾸려 친정과 꽤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지금은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과 맛집 투어를 다니며 꼼꼼히 챙기는 둘째를 보며 반성도 많이 한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 삼남매 중 제일 잘 나가면서 부모님까지 잘 챙기는 둘째가 살아온 삶(?)이 슬프다. 이게 가장 잘 드러난 부분은 바로 앨범 사진의 양이다. 첫째인 나는 처음이라서 부모님이 사진을 많이 찍었다. 막내는 늦둥이이기도 하고 아들이라 사진이 많다. 그런데 나와 연년생으로 태어난 둘째는 사진이 정말 눈에 띄게 적다. 어릴 때 앨범을 펴면 둘째가 자기 사진은 왜 이렇게 없냐고 불평했던 기억이 난다. 나도 부모님이 좀 너무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2년 터울 둘째를 가져보니 그게 부모님도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단풍이 때는 진료 갔다온 날 초음파 영상도 몇번씩 돌려보고 사진도 계속 봤는데, 쁘미 초음파 영상이나 사진은 집에 돌아와서 다시 본 기억이 거의 없다. 그저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으면 그걸로 끝이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단풍이 때는 일부러 토요일로 예약을 잡아 남편과 무조건 같이 진료를 봤는데, 지금은 평일에 그냥 혼자 다닌다. 집에서도 쁘미 초음파 영상을 같이 본 적이 없다. 쁘미에게 관심이 없는 건 아닌데 우리에겐 쁘미 생각을 할 만한 틈을 조금도 주지 않고 몰아닥치는 단풍이 육아가 있었다. 태명을 불러줄 틈도 없었다. 다행히 단풍이가 <한글이 야호>나 <수학이 야호>를 볼 때 나오는 문어 캐릭터 이름이 "뿌미"여서 그걸 따라하면서 불러보는 게 거의 대부분이다.
단풍이 때는 태동하면 태담도 하고 노래도 불러줬는데, 쁘미가 단풍이보다 훨씬 활발하고 센 태동을 선보여도 일단 눈앞에 있는 단풍이와 놀아주는 중이니 대꾸할 틈이 없다. 그저 속으로 "그래, 건강하게 잘 있어줘서 고맙다."라고 생각할 뿐이다. 아무래도 엄마가 반응이 없어서 더 세게 배를 두드리고 차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럴 때면 마음이 뭉클하면서 미안해진다. 하지만 미안해할 틈도 없다. 미안해의 ㅁ을 떠올리고 있는 그 순간 단풍이가 우유를 엎지르고 있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별 걱정이 다 든다. 단풍이는 남편이 태담을 많이 해줘서 그런지 태어났을 때 남편이 "단풍아~"하고 부르니 울음을 뚝 그쳐서 너무 신기했는데 쁘미는 아마 "쁘미야~"라고 부르면 낯설어서 더 울 것 같아 불안하다. 내가 "쁘미야~"라고 해도 목소리를 낯설어할 것 같다.
그리고 쁘미는 태어나면서부터 엄마아빠를 독차지한 경험이 있는 첫째 단풍이와 달리 엄마아빠, 장난감 등등을 누군가와 공유해야 한다는 걸 처음부터 받아들이면서 자라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짠했다. 그런 상황을 받아들이는 건 둘째보다 첫째가 더 힘들다고 하지만(혼자 다 가졌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울어도 첫째 때문에 둘째에게 바로 달려가지 못하는 둘째 엄마들의 경험담을 들으며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벌써 미안함이 한가득이다. 그렇게 둘째들은 아기일 때부터 알아서 적응해나가는(=살아나가는) 힘을 기른다고 한다. 어른들이 보통 둘째들이 야무지고 생활력이 강하다고 하는 게 괜히 있는 말이 아니다. 우리 집만 봐도 둘째가 제일 야무지다.
첫째에게 관심 면에서 밀려 자라나면서도 알아서 척척 야무지게 해내고 부모님 호강시켜드리는 둘째를 보며 얼마 전에 부모님께 말했다. "둘째한테 잘해~ 둘째 갖구 보니까 둘째가 제일 불쌍해."
둘째 예정일을 100일도 안 남긴 지금, 곧 넷이 될 미래를 생각하면 첫째 단풍이도 불쌍하고 둘째 쁘미도 불쌍하다. 자기 두고 어디 가지 말라는 건지 엄마 멱살(ㅜㅜ)을 잡고 잠드는 단풍이는 가끔은 아빠랑만 잘 수도 있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쁘미는 엄마가 필요할 때 언니를 돌보느라 엄마가 바로 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첫째로 살아본 나는 단풍이에게도 마음이 가고, 둘째의 삶을 오랫동안 지켜보고 이제 둘째에 대해 배우는 중이라 쁘미에게도 마음이 간다. 두 아이를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게 똑같이 사랑하고 아끼고 품어주는 것도 이제 배워야 한다. 끝인 줄만 알았던 "엄마"의 새로운 스테이지가 눈앞에 있는 것이다.
자녀는 모두 예쁘다지만 그렇다고 치우치지 않고 똑같이 사랑하고 품는 것은 얼마나 어려울까. 둘이 싸울 때 한쪽의 편만 들어주지 않고 둘 모두에게 좋은 쪽을 결정해주는 중재자의 역할은 또 얼마나 어려울까. 이렇게 한 겹 더 어른이 되어가는 나는 어떤 모습일까. 아직은 실감도 안 나고 힘들 거란 생각만 두루뭉실하게 있지만, 가끔 쁘미를 부를 때마다 생각하듯 나와 남편과 단비와 쁘미 모두에게 "기쁨"이 넘치는 시간이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