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일의 기적
난중일기[낳-은중일기]는 지금 막 6개월이 된 딸 단풍이를 키우고 있는 저의 육아일기입니다. 이순신 장군님의 난중일기를 업신여기는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으며, 매일 작은 일들까지도 일기로 적어가며 치열하게 살았던 장군님처럼 전쟁 같지만 행복하고 소중한 지금의 시간들을 매일 적어보자는 생각에서 지은 제목입니다. 육아일기에 관심이 없으시다면 조용히 지나가셔도 좋습니다. :-)
단풍이가 이 세상에 태어난지 200일이 되었다.
정확히는 그저께가 200일이었고, 이 글을 제날짜에 올리고 싶었지만 체력의 한계로 실패... 그래서 202일인 오늘 올리게 되었다.
단풍이의 200일은 백일 때와는 다른 두근거림이 있다. 단풍이의 백일 그리고 101일은 응급실과 심정지, CPR과 소아중환자실로 요약된다. (이때의 기억은 나중에 따로 쓸 생각이다.) 백일을 맞이한 기쁨은 커녕, 백일이라 내가 백병원 응급실에 앉아있나 싶었던 그 밤. 기억이 가물가물해진 걸 보면 정말 그때로부터 100일이 흐른 게 맞나보다.
여튼, 그랬던 탓에 단풍이의 백일잔치는 없었다. 다행히 중환자실에서는 4일만에 나왔지만, 그날 이후로 한달 반 정도 일반 병동에서 지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200일이 백일보다 더 특별한 느낌이 든다. 중환자실에 병원 한달 입원까지 겪은 아기답지 않게(?) 무럭무럭 자라 몸무게 9키로를 찍은 단풍이를 보며, 다른 부모들이 백일쯤 느끼는 기쁨과 보람을 이제야 제대로 누리는 중이다.
소아중환자실에서 수많은 장비들을 온몸에 달고 있는 단풍이를 보며, 맨날 울고 내가 밥도 못 먹게 붙어있어도 좋으니 제발 건강해지게 해달라고 기도했었다. 다른 거 다 필요없고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이게 소원이었다. 100일이 흐른 지금은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는 걸 뼈저리게 깨닫는다. 너무 나와 붙어있으려고 해서 나도 모르게 욱할 때가... 생각보다 많다. 게다가 요즘은 밤에 왜 그렇게 자주 깨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보통은 깨도 공갈젖꼭지만 물리면 스르르 잠들었는데, 그저께부터는 새벽 3시에 일어나 2시간 동안 징징거리면서 잠을 안 자서 하루는 단풍이에게 짜증을 낸 적도 있다.
9키로를 찍은 이후로 매일 허리에 파스를 달고 사는 나로서는 이제 단풍이를 따로 재우고 그나마 허리가 덜 아픈 성인 침대에서 자는 것이 최선인데, 단풍이는 내가 옆에 있어야 잔다. 잠이 들더라도 중간에 일어나 눈을 뜨고 엄마가 옆에 있는지를 확인한 다음에 눈을 다시 감는다. 덕분에 내 허리는 밤에도 그야말로 '열일' 중이다. 정신은 물론이고 몸까지 축나니 가끔 서럽다.
그렇게 유독 이번주 들어 밤에 잠에서 깨는 횟수가 늘어나고 좀처럼 깊게 자지 못하길래 혹시나 하고 검색해보니 역시나. 그게 바로 200일의 기절이란다. 200일에 도달하는 대부분의 아기들이 밤에 자주 깨서 울어댄단다. 거기다 잠투정도 심해진다고. 다른 이들의 경험담을 읽어보니 이건 구구절절 다 우리 단풍이 얘기다.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단어 하나 참 기똥차게 만들었다. 보통 "100일까지가 힘드니까 그때까지만 참아~"라고 하는데, 이상한 게 100일을 기준해 더 힘들어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그걸 '100일의 기절'이라 부른다. 드물지만(아무리 주변을 살펴봐도 극히 그문 케이스다) 아기가 순둥이로 변해버리는 놀라운 일을 체험하는 이들도 있다. 그걸 '100일의 기적'이라고 한다. 글자로는 받침 하나 다른 것뿐인데, 실제 육아에 있어서는 정말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다.
중환자실 입원에 병원 생활까지, 단풍이는 내게 진정한(?) 100일의 기절을 선물했었다. 쉽지 않았던 그 시간들을 지나 200일에 도달했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200일의 기절이 나타나다니... 다시 우울증의 늪에 빠질 뻔 했다.
오늘 새벽은 여태까지 중에 제일 못 잤고, 그로 인한 피로 때문에 눕혀도 울고 앉혀놔도 울고 심지어 놀아줘도 우는 바람에 나와 남편은 아침부터 혼이 쏙 나갔다. 그런데 두둥. 오늘은 예방접종 예약도 해놓은 날이다. 주사 맞기 전부터 짜증 게이지가 만땅을 찍어 대성통곡하는 단풍이를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나까지 세 사람이 상전 모시듯 어르고 달래가며 접종을 가까스로 마쳤다.
잠을 제대로 못 잔 건 단풍이만이 아니었다. 나도, 남편도 똑같이 잠을 못 잤다보니 결국은 집에 오는 길에 서로 예민한 상태에서 둘 다 폭발하고 말았다. 육아는 정말,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다. 단풍이를 낳기 전에는 설마 그럴까 했지만, 진짜였다.
이렇게 200일의 기절을 보내고 있지만, 그래도 "200일의 기적"이라 부르고 싶었다. 단풍이가 백일 즈음에 아팠어서 200일이 감격스럽다기보다는, 비록 바람 잘 날 없이 흘러가는 육아지만 내가 벌써 이걸 200일이나 했다는 점에서 가히 '기적'이라 할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 인생 하나도 제대로 간수하기 벅찼던 내가 다른 인생 하나를 오롯이 길러낸다는 게 얼마나 멋진 성장인가. 내가 이렇게 한 생명을 책임질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돌아보면 아직도 한참 멀은 듯 싶은데, 단풍이가 나를 보고 웃는다. 나를 보고 좋아라 한다. 나한테 전적으로 의지한다. 놀고 먹고 자고 싸는 일밖에 하지 않는 단풍이지만, 단풍이를 보며 나도 하루에 조금씩 성장한다. 그런 점에서 단풍이는 내 딸이기 이전에 내가 감사해야 할 존재다.
처음 단풍이를 품에 안고 수유를 시작했을 때, 나는 겁이 많이 났다. 내가 조금이라도 실수해서 단풍이가 잘못될까봐 아주 사소한 것 하나에도 신경이 잔뜩 쓰였다. 조리원에서 엄마인 나보다 신생아실 선생님들을 더 좋아하고 심지어 내가 안기만 해도 울어서 좌절하기도 했다. 새로운 상황을 맞닥뜨릴 때마다 긴장과 실수는 반복되었고, 육아에 대한 자신감이 바닥을 치던 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누구나 처음부터 잘하는 일이 세상에 없는데 육아라고 다를 게 있겠나 싶어졌다. 그간 한 생명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의 무게와 압박 때문에 처음일지라도 세상 그 어떤 일보다 완벽하게 해야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이 셋을 낳고 키운 베테랑 우리 엄마도 육아가 여전히 쉽지 않은데, 처음인 나는 당연히 실수할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이후에야 육아에 자신감이 붙었다. 그리고 점점 주변 어른들로부터 처음인데 아기를 잘 본다는 칭찬도 듣게 되었다.
그러니 이렇게 된 것만으로,
내가 '엄마'가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적이라 부를 만하다.
물론 아직도 많이 부족하고, 단풍이가 평소랑 조금만 달라도 일단 겁부터 먹고보는 육아 초보지만 300일, 그리고 돌쯤 되면 지금보다 더 성장해있고 더 엄마다워져있지 않을까?
그래서 200일이 설렌다. 300일쯤 더 건강하고 예쁘게 자라나있을 단풍이가, 더 의젓해질 내 자신이 기대되기 때문이다.
*덧.
과유불급이라 했던가. 200일이라 들떠서 셀프 200일 촬영을 감행했는데 단풍이는 온갖 짜증과 함께 그날 저녁까지 삐져서 엄마에게 좀처럼 웃어주지 않았다. 그래, 미안하다!!!!! 엄마가 너무 신나서 널 또 깊이 헤아리지 못했다. 그치만 분명 나중에 크면 사진을 남겨준 엄마에게 고마워 할 거다. 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