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몰타와 런던에서 어학연수를 계획했을 때부터 그게 뭐가 됐던 마지막 일정은 '산티아고'여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과연 순례자가 아닌 순례길은 어땠고, 10여 년이나 지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어떤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13년 만에 다시 찾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는 오늘도 먼 길을 걸은 순례자가 도착하고 있다.
+ 바르셀로나로 향하다.
마지막 일정인 스페인의 주요 도시들은 이미 다녀온 터라 크게 흥미가 없었기에 '산티아고'만으로 일정을 계획했다. 다만 스페인 북쪽에 있는 산티아고여서 스페인의 도시 중 한 곳을 경유해야 했는데 고민 없이 바르셀로나로 택했다. 파밀리아 사그리다가 얼마나 진척이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튀르키예에 도착하고서도 컨디션에 문제가 없었는데 튀르키예 지방 투어를 할 중간 즈음부터 탈이 나기 시작했다. 외국 생활이 8개월을 넘어가고 있었고 런던에서 영어 공부하느라 너무 에너지를 많이 쓴 탓에 슬슬 몸에 무리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너무 긴장상태로 지내다 보니 그걸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로마, 피렌체를 거쳐 튀르키예까지 3주간 밀린 숙제 하듯 여행을 다니다 보니 결국 피로누적은 감기 몸살을 불러왔다.
이스탄불에서 약 이틀은 숙소에서 약 먹고 내처 잠만 잤을 정도로 컨디션이 엉망이었다. 이스탄불 이후 일정은 스페인이었고 이후 귀국까지 남은 한 달은 다시 몰타에서 보낼 예정이었다. 스페인의 경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이틀 (중 하루는 당일치기로 묵시아), 이동시간 포함 바르셀로나 4일로 빡빡한 여정으로 계획을 해둔 터였다. 열이 펄펄 끓고 몸을 가누기도 힘든 상황에 바르셀로나를 거쳐 산티아고로 이동하고 다음 날 유라시아 땅끝 마을인 묵시아까지 왕복 4시간의 버스를 타야 하는 빠듯한 일정을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한인 민박에서 머물고 있었기에 호스트와 같이 머무는 게스트들이 이것저것 신경을 많이 써줘서 그나마 더 나빠지지는 않고 있었다. 다들 스페인 일정은 포기하고 튀르키예에서 컨디션을 회복한 뒤 몰타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바로 몰타로 가서 컨디션을 회복하는 게 좋겠다고 나보다 더 걱정이 태산이었다.
어쩌면 어학연수 후 여행 일정에서 다른 건 다 포기하더라도 산티아고만은 꼭 가야 할 만큼 나에게는 중요하고도 의미 있는 곳이었기에 몸 상태가 엉망진창인데도 도저히 포기가 안 됐다. 산티아고가 뭐라고 그곳에서 마지막 방점을 찍고야 말겠다는 집착에 가까운 생각이 놓아지지 않았다. 결국 산티아고는 가되 묵시아는 포기하는 거로 생각을 바꾸었다.
새벽 5시에 튀르키예를 떠나 오후 1시에 도착한 바르셀로나
새벽 5시에 일어나 튀르키예 공항으로 이동해 바르셀로나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스탄불은 밤 사이에 비가 내렸는데 바르셀로나에 도착하니 파란 하늘이 비치고 있고 11월 말임에도 날씨는 그리 춥지 않았다.
한인 민박에 도착하니 거의 오후 1시. 다시 열이 펄펄 나는 중이었고 곧 쓰러질 모습으로 도착한 나를 보고 호스트는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속이 계속 좋지 않아 아무것도 못 먹고 있었는데 통상 아침만 제공되는 한인민박임에도 아침에 남은 미역국이라도 먹으라며 기꺼이 내어주셨다. 튀르키예도, 바르셀로나도 한인민박을 예약한 건 정말 신의 한 수였다.
가지고 있는 약을 계속 먹는 데도 효과가 별로 없는 것 같다고 했더니 기후가 달라 한국약이 잘 안 들을 수 있다고 스페인 상비약을 챙겨주셨다. 따뜻한 미역국, 약을 차례로 먹고 그대로 쓰러질 듯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저녁이었다. 근처의 식당에서 간단하게 빠에야를 먹고 숙소로 바로 돌아왔다.
일주일 넘게 열이 계속 나고 편도선이 붓는 것이 통상적인 감기 몸살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몰타에서 코로나에 한 번 걸린 적이 있었기에 코로나는 아닌 것 같았지만 혹시 몰라 테스트기로 검사를 하니 다행히 코로나는 아니었다.
런던에서부터 쌓여 있던 피로누적이 터지는 시점인 데다가 한 달 내내 일주일 단위로 시차가 한두 시간씩왔다 갔다 하는 환경이니 체력이 떨어지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싶다. 장기 여행에서 체력은 필수다. 나라와 도시를 짧게 짧게 이동하는 장거리 여행도 젊다면 모를까(?) 50대에 다시 하려니 몸이 남아나지 않는다. 마음은 청춘이지만 몸이 청춘이 아니란 걸 확인하게 된 게 이번 여행에서 얻은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훌쩍.
바로셀로나 한인민박의 따스함.
+ 산티아고로 향하다
다행히 하루 반나절을 먹고 자고, 먹고 자고 한 덕분에 정상 컨디션은 아니어도 다시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회복이 됐다. 동이 막 트기 시작하는 시간 바르셀로나 국내선에 도착했다. 공항 면세점에도 입점한 FC 바르셀로나를 보니 축구에 진심인 스페인을 까맣게 잊고 있었구나 싶었다. 스페인 하늘을 날아 드디어 그립고 그립던 산티아고 공항에 발을 딛는 순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심장이 요동을 치기 시작한다.
2009년도 순례를 마치고 난 뒤 막연하게 10년쯤 뒤에 다시 산티아고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또다시 800km를 걸을 자신은 없었기에 산티아고는 마음만 있을 뿐이었다. 가끔씩 산티아고에 다시 가는 상상을 하곤 했지만 분명 처음과 같은 마음은 아닐 것이란 건 당연했다. 혹여 그곳에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꼭 한 번은 다시 가보고 싶은 산티아고였다.
그런 산티아고에, 나는 서 있다.
산티아고 공항은, 산티아고(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줄여서 '산티아고'라고 부른다)라는 도시는 순례를 위해 존재하는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티아고 공항 곳곳은 온통 까미노 마크 일색이고 관광 안내소도 순례자를 위한 곳이었다. 대략 종로구 정도인 산티아고는 하도 걸어 다녀서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지도가 필요 없을 정도로 선한 곳이다. 기념으로 산티아고 지도 한 장 챙기려고 관광안내소에 들어서니 직원이 건네는 첫마디.
"카데드랄(대성당)까지 걸어갈 겁니까?"
기억으로는 10km 남짓이었던 것 같은데 족히 반나절 이상은 걸어야 하는 거리다. 노란 화살표를 따라 대성당까지 걸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순례자가 되기엔 체력도, 시간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관광안내소 직원의 꼼꼼한 설명을 다 듣고 산티아고 도심 한가운데 있는 카데들랄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동 터오는 바르셀로나 공항과 면세점에 입점된 FC 바르셀로나
산티아고 공항 관광안내 부스 콘셉트도 순례길
공항 곳곳에 까미노(순례길) 마크, The Sky way는 산티아고 공항의 문화 공간
까미노의 종착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걸어가고 싶었지만
스페인 북쪽 갈리시아 지방에 위치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날씨는 꽤 쌀쌀했고 비가 오락가락하는 중이다. 800km를 약 38일간 걸어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했던 2009년의 11월 11일 그맘때와 모든 것이 너무 비슷했다. 겨울 장맛비마저도. 공항에서 대성당(카데드랄)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시내가 가까워지자 2009년에 내가 묵었던 알베르게(순례자 숙소)가 보이기 시작한다.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차창밖으로 걸어가고 있는 순례자가 된 느낌이 살아났다. 그날로 그대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최종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대성당을 향해 걷고 있는 순례자들
숙소는 대성당 바로 뒤에 있는 순례자 숙소 알베르게 km.0로 정했다. 성수기가 아니니 따로 예약은 하지 않았다. 알베르게로 부르는 순례자 전용숙소는 도미토리 형식인데 내가 순례길을 걸을 때는 무조건 선착순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베르게 전용 앱이 있어서 미리 예약을 받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순례길도 현대 문명의 대세를 피할 수는 없다.
변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종이 한 장을 빼곡 채우는 산티아고 알베르게의 숫자도 변화라면 변화다. 산티아고를 찾는 사람들이 해마다 엄청나게 늘고 있다는 소식은 이미 알고 있었는데 알베르게 숫자로도 확인이 가능했다. 폭발적인 순례자 숫자 증가에는 한국인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0km는 도착점일까? 출발점일까?
알베르게 km.0
침대를 배정받고 간단히 짐을 푼 뒤 바로 순례자 사무실로 향했다. 순례자 사무실은 순례길(까미노)을 걸은 사람에게 순례자 증명서를 발급하는 곳이다. 순례길을 걸은 것이 아니기에 순례자 증명서를 받을 수는 없지만 내겐 산티아고에서 당연히 밟아야 하는 순서였다. 여름이라면 순례자 증명서를 받기 위해서 엄청나게 긴 줄이 늘어섰겠지만 11월 말의 순례자 사무실은 한산했다. 내가 언제 다시 순례길을 걸을 수 있을지 알 수는 없지만 기념으로 순례자 여권을 구매했고 첫 스탬프로 알베르게 숙소 km.0을 찍었다.
순례자임을 증명하는 순례자 여권
순례자 사무실
순례자 사무실을 나서니 내 두 발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 바삐 움직인다. 까미노 데 산티아고, 약 800km 순례길의 최종목적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마침내 도착했다. 13년 만에 다시 보는 카데드랄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세계 문화유산이란 게 적어도 변하지 않는 보호장치가 되어 준다는 게 이리도 반가울 수가 없었다.
11월 말인데 드물기는 해도 순례길을 걷는 순례자들이 있었다. 온몸에 내려앉은 피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환희에 찬 표정의 순례자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순례의 기쁨을 만끽한다.
'그래, 내가 산티아고에 도착했을 때도 저런 표정이었겠구나!' 입가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반가워한 것도 잠시.
순례자가 아닌 내가 산티아고에서 누릴 수 있는 영광은 더 이상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다.이곳에서 느끼는 환희와 영광의 순간은 800km가 넘는 먼 길을 오직 자신의 두 발로 걸어온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끝난 뒤에도 늘 산티아고를 마음에 품고 살았다. 그리고 막연하게 10년 뒤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왜 산티아고를 다시 오고 싶었던 것일까? 과연 무엇을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게 바랬던 산티아고 대성당에 섰지만 내가 왜 여기를 오게 된 건지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순례자들이 만끽하고 있는 기쁨을 한 발 떨어져 바라보고 있자니 기분이 복잡하다. 한 무리의 여행객들이 순례자들과 뒤섞인다. 갑자기 흐린 하늘에 또 한바탕 비가 퍼붓는다.
순례길의 최종 목적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카테드랄(대성당)
순례길이 끝난 것을 만끽하는 순례자
11월의 순례자들
슬슬 배도 고프고 뭘 먹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갈리시아 지방 전통 음식을 먹기 위해 성당 뒤쪽으로 향했다. '오늘의 메뉴''가 있는 것이 눈에 띄어 들어오니 순례를 마친 사람들이 주로 찾는 곳인 듯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나라 순례자들 사이에서도 이미 유명한 곳이었다. '오늘의 메뉴'로 구성된 음식은 수프, 메인, 디저트, 카페콘레체까지 정식 코스 요리인데도 13.5유로다. 다른 나라에 비해 스페인의 물가는, 특히 순례길의 물가는 저렴해 유럽 다른 지역에서 굉장히 인기가 많다.
일주일 넘게 비를 맞으며 순례길을 걸을 때 갈리시아식 수프(고기가 들어간 우거지 국과 맛이 비슷하다)는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를 물리치기에는 훌륭한 음식이었다.걷기의 피곤함을 달래주던 '카페콘레체'는 스페인식 카푸치노라고 할 수 있다. 카푸치노가 별 거 있겠나 싶지만 스페인이 아닌 다른 나라의 카페콘레체는 희한하게도 전혀 달랐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가끔씩 생각나던 갈리시아식 수프와 카페콘레체를 먹고 있으니 이제 막 순례길을 끝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몸이 계속 아픈 상태였는데 뜨끈한 갈리시아 수프가 들어가니 몸살감기가 완전히 떨어지겠구나 싶었다.
점심이 한참 지난 시간이었기에 식당 안은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건너편에 혼자 앉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가벼운 눈인사를 하고 스몰토크를 하다가 같이 합석을 하게 됐다. 포르투갈인이고 며칠 휴가가 생겼는데 순례는 못 할 것 같아서 나처럼 성당만이라도 보러 왔다고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참 하고 있는데 열댓 명의 한국 사람이 가이드와 함께 식당으로 들어왔다.
대부분 등산복 차림이었기에 그냥 단순히 여행객은 아닌 듯했다. 얘기 소리가 커 본의 아니게 이야기를 엿듣게 됐는데 가이드와 함께 일정 구간 산티아고를 걷는 산티아고 단체 관광객이었다. 내가 얘기에 집중을 못하니 포르투갈사람이 무슨 일이냐고 하길래 실은 저 단체 손님은 한국인인데 가이드와 함께 단체여행으로 순례길을 걸은 것 같다고 설명을 하자마자....
그게 무슨 순례냐고 되묻는다. 순례가 단체 여행 상품으로 판매가 되는 것에 더 놀라워했다. 얼마나 간절하면 단체 관광상품을 이용해서라도 순례를 하나 싶어 그 마음이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순례가 단순히 여행상품으로 취급되는 씁쓸함은 어쩔 수 없었다.
갈리시아식 스프, 메인요리, 디저트, 카페콘레체까지 오늘의 정식 13.5유로
산티아고에 머무는 시간은 이틀이지만 엄격하게 따지면 24시간의 시간인 셈이다. 유라시아 대륙의 땅끝인 묵시아를 가지 않기로 했기에 시간적은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딱히 지도가 필요 없는 산티아고였기에 옛날 기억을 더듬으며 도시 이곳저곳을 걸어 다녔다. 크게 변한 것은 없는 것 같다 싶은데 훨씬 더 관광지가 된 느낌이다. 기념품 숍이 어찌나 많이 늘었는지 기념품 숍 구경만으로도 반나절이 훌쩍 가겠다 싶었다.
눈에 띄는 기념품이 몇 가지 있었다. 티셔츠의 디자인이 정말 다양해졌고 자신의 이름을 새길 수 있는 기념품도 있었다. 가장 특이했던 기념품은 순례자 동상처럼 보이는 기계에 1유로 혹은 50센트 동전을 넣으면 그 동전에 산티아고 대성당이 새겨지는 기계였다. 기꺼이 50센트 동전을 넣었고 기념품을 만들었다. 티셔츠 2종류와 산티아고 루트가 새겨진 지도 한 장을 추가 기념품으로 구매했다.
다양한 산티아고 기념품
동전으로 만드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어둠이 내린 산티아고 골목길
저녁에는 대성당 미사에 참석을 했다. 산티아고 대성당의 가장 큰 변화는 성당 미사가 이루어지는 본당 공간을 제외하면 대부분 성당 공간은 모두 박물관으로 바꾸어 입장료를 내야 관람할 수 있었다. 성당 미사 시간이 아니면 본당은 출입이 허락되지 않았다.
관람료가 그렇게 비싼 것은 아니었는데 내부는 일체의 사진 촬영을 허가하지 않는다고 했다. 2009년도에 이미 찍은 놓은 사진만으로 충분했고 다 아는 공간이라 박물관 입장은 하지 않았다. 코로나 판데믹 기간 동안 순례길이 멈췄기에 재정적인 곤란으로 인해 바뀐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자본의 논리 앞에 종교라고 별도리가 있을까 싶다.
2009년에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나 같이 걸었던 지인이 작년 5월에 3번째 순례길을 다녀왔는데 깜짝 놀랐다. 산티아고 대성당 지붕 투어 사진이었다. 산티아고 대성당 지붕을 올라가 볼 수 있는 투어였는데 내가 방문했던 11월 말은 성당 투어 상품을 보지 못했다. 비가 계속 내리는 날씨라 취소가 된 건지 아니면 겨울에는 운영을 안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뒤늦게 산티아고 지붕을 못 올라가 본 것을 아쉬워했다.
어둠이 내린 성당과 성당 지붕투어
순례자가 없는 대성당의 미사는 꽤나 심심했다.
미사를 마치고 나오니 성당이 있는 오브라이드 광장에는 적막감만이 맴돈다.순례길을 걷는 동안 앞서거니 뒤서거니 여러 외국인 친구들을 만났고 힘든 길을 함께 걷고 있다는 유대감은 국경, 언어, 나이를 넘어 자연스레 동지의식을 만들어줬다. 산티아고를 완주한 산티아고 메이트들은 산티아고 골목을 걷다 보면 어딜 가나 마주쳤다. 누구랄 것 없이 서로 반갑다고 얼싸안고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잘 끝낸 서로의 산티아고를 응원하고 이젠 헤어져야 하는 시간을 아쉬워했었다.
이 골목에서는 누구를 만났고 저 골목에서는 누구를 만났고... 이 광장에서는 누구와 함께 사진을 찍었고... 하루 종일 나는 13년 전의 산티아고를 홀로 다시 걷고 있었다.
이젠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허탈했다. 그동안 참고 있었던 모든 피로감과 절망감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호기롭게 시작했던 어학연수였지만 내 생각만큼 영어는 늘지 않아 시간이 흐를수록 조바심이 크졌다. 특히 런던에서는 4개월동안 하루에 8시간씩 공부를 했지만 공부는 하면 할수록 더 막막했다. 머리는 안 돌아가지 설상가상으로 체력은 완전히 방전됐지 총체적 난국이었다. 영어 슬럼프는 너무 깊었다. 이 모든 것이 내돈내산으로 맛보는 좌절감이니 누구 탓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쩌면 13년 전 순례를 마치고 충만감에 가득했던, 무엇이라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가득했던 나 자신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어 산티아고를 간절히 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문득 드는 생각이었다.
그때 만났던 산티아고 메이트들 중 몇몇은 자주는 아니어도 서로의 SNS를 팔로워 하며 여전히 안부를 전하고 있다. 지금은 이곳에 혼자 있지만 언젠가 그때 만났던 산티아고 메이트들을 다시 한번 산티아고에서 만날 꿈같은 생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순례자가 아니면 어떤가. 내가 그 길을 걸었고 내 영혼에 새겨진 순례길의 마음은 영원히 내 삶의 지표가 되고 있는 것임을. 그것만으로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충분했다.
순례길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조개마크는 여전히 내 마음의 나침판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인증숏
덧.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약 100Km 떨어진 곳 작은 바닷가 마을 묵시아가 있다. 산티아고에서 묵시아까지 걸어서 가면 대략 3일 정도가 걸린다. 이곳은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야고보(산티아고)를 도와주기 위해 성모님께서 작은 돌배를 타고 왔다고 알려진 '성모 발현지'다.
2009년에 이곳에 도착했을 때 태풍급의 바람이 불고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바닷가 바로 앞에 있는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성모발현지를 보기 위해 저녁나절에 알베르게를 나섰다. 가까스로 성당에 도착했지만 순간 불어닥친 돌풍에 몸이 붕 떠 1~2m 정도 날았고 이러다 죽는구나 싶었던 순간, 손을 내밀었다. 기적처럼 성당의 문고리가 손에 잡혔고 나는 성당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과장하면 그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돌탑에 몸이 부딪쳐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모른다.
두고두고 아찔했던 순간을 남겼던 묵시아 성당이었는데 몇 해전 큰 불이 나 성당이 완전히 소멸됐고 어마어마한 사건이라 우리나라 뉴스에도 소개가 됐다. 그랬기에 이런저런 이유로 묵시아를 꼭 가보고 싶었는데 결국 컨디션의 문제로 가지 못해 상당히 아쉬웠다. 다행히 알베르게에서 만난 대만 순례자가 자신이 묵시아를 갈 예정이라며 다녀오면 사진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고맙다고 했지만 진짜 사진을 보내줄까 싶었다.
그랬는데 몰타로 돌아오고 며칠 뒤 진짜로 엄청난 사진을 보내줬다. 아름다운 어촌 마을 묵시아와 맑은 날의 대성당 사진도 함께. 비록 사진이었지만 13년 전에 비가 와서 제대로 보지 못했던 묵시아의 풍경이 고요하고 평화롭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또 순례길을 걷고 있겠구나 싶다. 순례길이 나를 부르는 순간이 오면 나는 기꺼이 순례길에 다시 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