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의 비잔티움,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오스만 제국의 이스탄불까지 모두 다른 이름으로 새로운 문화가 형성됐지만 그곳에 흐르고 있는 시간은 단절 없이 하나의 시간으로 흐른다. 세계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이 도시의 정체성을 과연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인류 문명의 살아 있는 거대한 박물관이라고까지 불리는 '이스탄불'을 만나보자.
+ 오스만제국의 영광을 기억해 줘. 돌마바흐체
이스탄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돌마바흐체다. 숙소 테라스에서 돌바바흐체가 보였는데 그때만 해도 어떤 곳인지 몰랐다. '빈센조'에서 송중기가 거액의 비자금을 인출해 큰 문을 활짝 열고 나가는 신을 이곳에서 찍었다고 했는데 그나마도 시간이 좀 지난 상황이라 가물가물했다.
돌마바흐체를 직접 보기 전까지는 어느 정도인지 상상이 안 됐는데 단체투어의 약속장소로 이용되는 시계탑부터 눈이 휘둥그레졌다. 게다가 궁전의 주요 출입구로 사용되는 문을 보자마자 바로 '베르사유 궁전'이 자동적으로 연상이 되니 베르사유를 본떠지었다는 궁전이라는 설명은 들을 필요도 없었다.
외관이 이 정도니 실내는 과연 어떨까. 궁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일체의 사진 촬영은 허락되지 않았고 실내도 보호하기 위해 덧신을 신어야 했다. 그렇게 한 발 안으로 들어섰는데...
숙소 테라스에서 보이던 돌마바흐체 궁전은 바다를 메운 곳에 지었다.
단체 투어의 만남의 장소인 시계탑과 돌마바흐체로 들어가는 화려한 정문
돌바바흐체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한 개 층을 꽉 채우고 있는 엄청난 크기의 샹들리에가 첫눈을 사로잡았다. 4.5톤의 크리스털로 만들어진 1,760개의 촛대를 사용한 샹들리에 화려함에 압도됐다. 내 생에 이런 샹들리에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지 싶었다. 아니다 다를까 세계에서 가장 큰 샹들리에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다고 한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기증했다고 하는데 오스만의 위상을 짐작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실내는 총방의 개수 285개, 44개의 응접실, 43개의 홀, 6개의 발코니, 68개의 화장실, 내부 장식을 한 금 무게만도 14톤, 280여 개의 꽃병, 156개의 다양한 시계, 36개의 크고 작은 샹들리에까지 숫자도 숫자지만 더 엄청난 게 기다리고 있었다. 러시아 황제가 선물한 150년 된 곰가죽 양탄자, 사우디 아라비아 상아 한 쌍, 나폴레옹이 기증한 대형 피아노 등등 방방마다 세계 각국에서 공수한 호화로운 장식품이 그득그득했다.
이방 저 방 동선을 따라 실내를 관람하다 보니 여전히 오스만의 영화가 지속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곳의 시간은 1938년 11월 10일 9시 5분에 멈춰 섰다. 튀르키예 초대 대통령인 아티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 1881~1938)가 돌마바흐체에서 사망한 시각이다.
돌마바흐체가 어떤 시간을 지나온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돌바마흐체는 오스만 제국 후기 마지막 6명의 술탄들이 이곳에 거주를 한 곳이다. 영원할 줄 알았던 오스만 제국도 오스트라 빈 점령 실패를 기점으로 점점 쇠퇴를 시작하는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럴 때 필요한 것 제국의 위상을 보여줄 화려한 건물이었다.
돌마바흐체 입구
이 건물 전체가 하나의 궁전이다.
호기롭게 짓기 시작한 돌마바흐제였지만 호화로운 건물을 짓기 위해 가뜩이나 어려운 재정은 더 어려워지고 국력 또한 낭비되어 국가의 멸망을 이끄는 지름길이 되는 것 역시 피해 가지 못했다. 실내 관람 마지막에 이를 때 즈음은 예산 부족으로 장식을 하지 못한 채 덩그렇게 남겨진 방도 볼 수 있었다. 이후 오스만 제국 시대를 마감하고 터키 공화국이 창건되면서 튀르키예 초대 대통령인 아티튀르크 대통령의 관저로 사용했던 곳인데 대통령 사망 이후 박물관으로 전환되면서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사라졌지만 과거의 영광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방방마다 남겨진 유물은 대단했지만 샹들리에만큼의 느낌은 아니었다. 한때 세계를 제패할 기세였던 오스만에게 남은 것은 상처뿐인 영광일까. 관람이 뒤로 갈수록 남겨진 빈방과 대통령의 사망시간에 멈춰 선 시계가 오스만의 영광이 끝이 났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화려한 돌마바흐체를 마지막으로 남기고 사라진 오스만 제국
바닷가를 메운 곳에 세운 궁전이라 바다로 난 출입문이 있는데 크루즈 여행의 경우 바다에서 돌바마흐체로 바로 접안이 가능하다고 했다. 관람을 모두 마치고 입구로 나가는 길. 건물을 따라 한참을 걸어야 했다. 실내를 관람할 때는 건물이 얼마나 큰지 가늠이 잘 안 됐는데 이렇게 또 한 번의 규모에 놀라며 돌마바흐체를 나섰다.
돌마바흐체의 노천 카페, 왼쪽으로 아시아지구와 오른쪽으로 역사지구가 한 눈에 들어온다.
+ 로마시대 전차 경기장으로 사용됐던 히포드롬 광장,
이스탄불을 방문한 사람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곳이자 가장 많이 찾는 곳은 구도심이라고 할 수 있는 술탄 아흐메트 역사지구다. 이곳에는 한 번쯤 이름을 들어본 유명 건축물들이 모두 모여 있다. 히포드럼 광장, 블루모스크, 하기아 소피아가 그리고 조금 더 걸어가면 톱카프 궁전으로 이어진다. 이곳이야 말로 이스탄불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셈이다.
워낙 관광객들이 많이 몰리는 곳이라 히포드럼 광장에 도착하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여행 비수기인 11월 말도 이런데 성수기는 정말 미어터지겠구나 싶었다. 우뚝 솟은 탑과 비석이 있는 광장은 원래 이런 모습인가 싶은데 놀랍게도 탑이 있는 곳은 로마제국 당시 이곳은 마차 경기장의 한복판이었다.
2000년 전 히포드럼 추정도 (이미지 출처= 구글검색)
히포드롬은 그리스어로 '히포'는 말이고 '드롬'은 광장을 의미하니 '전차 경기장'이라는 직관적인 이름이다. 로마 콜로세움보다 1.5배나 되는 경기장은 약 1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엄청난 규모로 로마제국 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경기장이었다. 영화 '벤허'의 유명한 전차 씬이 바로 이 히포드럼 경기장을 모티브 삼았다.위 사진을 보면 경기장 중간에 다양한 조형물이 있지만 지금은 오벨리스크 정도만 남아 있다. 이유인즉슨, 4차 십자군 전쟁에서 엉뚱하게도 기독교 세력이 동로마였던 이스탄불을 약탈함에 따라 도시는 남아나는 게 없었고 히포드롬도 대부분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이집트에 있었던 오벨리스크였는데 4세기 로마의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이스탄불로 옮겨왔다.말하자면 전쟁의 전리품이었다. 탑의 본체 네 면에 새겨진 조각은 미술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작품인데 2천 년 전에 새겨진 것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온전하다. 오벨리스크를 세우는 것을 황제가 지켜보는 장면, 외국 사신이 공물을 바치는 장면, 전차 경기 장면 등이 새겨져 있다. 원래는 금박의 청동판으로 싸여 있었다고 하는데 십자군 약탈로 청동판은 누군가 떼어가 버리고 돌만 남았다고 한다.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 앞에는 또 하나의 전리품이 있다. 청동으로 꼬여있는 기둥인데 윗부분이 희한하게 잘려 나갔다. 누가 설명해주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인데 놀랍게도 그리스 아폴론 신전에 있던 기둥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기면서 전리품으로 그리스에서 가져왔다.
단순한 청동의 기둥처럼 보이지만 이 기둥은 어마어마한 역사를 품고 있다.기원전 479년 그리스 31개 도시국가가 연합해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페르시아 170만 대군을 무찌른 것을 기념하기 위해 페르시아 병사들의 방패를 녹여 만든 기둥이다. 그리스로선 엄청난 기념비적인 조형물인데 로마가 전리품 삼아 이스탄불로 가져왔으니 그리스로선 배 아플 일이다. 전 세계로 반출된 약탈 문화재가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그리스로서는 애가 탈 노릇이겠다.
이렇게 엄청난 문화재이건만 왜 이렇게 흉측한 상태로 남은 것인지 궁금했다. 원래는 세 마리의 뱀이 서로 몸을 꼬며 세 개의 머리가 금 삼각대를 바치고 있는 모습으로 17세기까지 온전했었다. 하지만 취객의 실수로 머리가 잘려나간 어이없는 사건으로 이 지경이 됐단다. 수천 년의 세월이 무너지는 건 큰 사건이 아니라 어이없는 사건 하나라는 건 이곳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특이한 건, 오벨리스크도 그렇고 청동 기둥도 그렇고 엄청난 유물인데 현지인들은 누구 하나 크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지금 이스탄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로마가 아닌 오스만 제국인 탓도 있겠지만 광장 옆으로 블루모스크와 하기아 소피아가 있다 보니 광장의 조형물은 관광객에게나 의미 있을 뿐인 듯했다.
세 마리의 뱀이 꼬여 있는 스펜타인 기둥, 기둥 맨 아래에 31개의 도시국가 이름이 새겨져있다.
광장에는 세계 제1차 대전때 오스만 제국이 독일 연합국 동맹이었던 것을 기념해 독일황제 카이저 빌헬름이 선물한 분수도 있다.
+ 성당일까? 모스크일까? 아야 소피아(Ayasofya)
히포드럼 광장을 지나 길 하나만 건너면 아야 소피아다. 성당일 때는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로, 다시 이슬람사원이 된 현재는 아야 소피아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성스러운 지혜(Holy Wisdom of God)'라는 의미만은 동일하다.
아야 소피아는 이슬람과 기독교가 공존하는 유일무이한 건축물이라는 표현이 많다. 스페인 코르도바의 메스키타(Cordoba Mezquita) 역시 기독교와 이슬람이 공존하는 공간이니 아야 소피아가 유일무이하다는 표현은 좀 오버가 아닌가 싶다. 다만 아야 소피아는 성당이 이슬람 사원이 됐다면 코르도바는 이슬람 사원이 성당으로 됐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코로도바 메스키타는 성당이긴 해도 안에 들어가면 이슬람 기둥 856개가 촘촘하게 박혀있고 미흐라브도 그대로 남아 있어 가톨릭의 색채보다 이슬람의 색채가 훨씬 짙은 곳이다. 묘한 이질감이 주는 두 종교의 하모니는 뜻밖에도 그 어떤 건축물보다 경이로웠고 스페인 여행에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과연 아야 소피아는 어떤 모습일까?
하기아 소피아였다가 아야 소피아로
묘한 느낌의 아야 소피아
아야 소피아는 입장료가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낮에는 입장줄이 너무 길어서 마냥 기다리며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아 다른 곳을 돌아다니다가 저녁에 다시 찾으니 한산했다. 원래 이 자리에 신전이 있었으나 지진과 니카 반란으로 소실된 것을 유스티아누스 황제 때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을 했다. 아야 소피아는 스페인 세비야 대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 약 천 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이었다.
건축개론에서도 반드시 언급될 만큼 인류의 건축사를 바꾼 위대한 건물 중 하나인 아야 소피아는 대규모 돔으로 지어진 가장 최신의 건축물이었다. 이후 수많은 동방 정교회, 로마가톨릭 심지어 이슬람 사원조차도 모두 아야 소피아 건축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만큼 인류 역사의 위대한 건축물이라고 하겠다.
이 성당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유스티아누스 대제가 완공된 성당을 봉헌하면서 "예루살렘을 지은 솔로몬이여, 내가 당신을 이겼습니다."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로 아야 소피아는 비잔틴 건축의 걸작이다. 현재도 런던의 세인트 폴 성당,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 밀라노의 두오모 성당 다음으로 큰 성당이 바로 아야 소피아다. 537년에 단 5년 만에 지어진 건물은 우리로 치면 신라 초기이니 텍스트로 만났던 아야 소피아에 엄청난 감동을 받았었다. 그런데 막상 눈으로 보니 왠지 생각했던 것보다는 감동이 덜했다.
밖은 어둑하다 못해 컴컴한데 안으로 들어서니 대낮같이 환하다. 막 기도시간이 끝난 것인지 실내 공간은 사람들이 꽤 많았다. 실내로 조심스레 발을 들여놓자마자 내 시선은 절로 천으로 가려진 천장 모자이크에 꽂혔다.
하기아 소피아 실내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이스탄불, 그러니까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이전한 이후 로마 교황청과 갈등이 시작됐고 4세기말에는 서로마의 로마 가톨릭과 동로마의 그리스 정교회로 분리가 된다. 유스티아누스 대제 때 동로마의 중흥기를 맞이하며 동로마에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을 재건했다. 7세기 가톨릭에서 성상파괴운동이 일어났기에 아야 소피아에는 성상 대신 모자이크가 다수 남아 있다. 4차 십자군의 약탈로 성당 안의 대부분 유물들이 약탈당한 걸 생각하면 성상 파괴운동이 아니어도 온전히 남아 있는 게 없었을 테니 그나마 모자이크여서 차라리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모자이크가 온전한 상태는 아니다. 동로마가 망하고 오스만 제국이 들어서면서 성당이 모스크로 바뀌자 이슬람 우상 숭배 금지에 따라 아야 소피아의 수많은 모자이크를 회칠로 덮어 버렸기 때문이다. 다행히 20세기에 박물관으로 전환되면서 회칠을 벗겨내고 모자이크 복원 작업이 일부 이루어졌다. 하지만 2020년 7월 이후 다시 모스크로 사용되면서 중앙 제단부 성화는 보시다시피 천으로 가려 놓아 더 이상은 볼 수 없게 됐다. 2층에도 중요한 모자이크들이 있지만 현재는 개방을 하고 있지 않아 볼 수는 없었다. 2층에서 전체 모습을 꼭 한번 내려다보고 싶었는데 너무 아쉬웠다. 2020년 7월 이전에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이 괜히 부러워졌다.
그리스 정교와 이슬람 문화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품고 있는 아야 소피아라는 찬사를 받고 있지만 코로도바의 메스키타를 보고 받았던 충격에 비하면 내게 아야 소피아는 다소 평범했다. 그렇다고 해서 웅장하지 않다거나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 지었지만 뭐랄까 별 감흥이 없다고나 할까. 뭐든 처음이 중요한 것일까. 아니면 아야 소피아가 십자군으로 다 털려 사실상 당시의 모습이 별로 남은 게 없어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2층에서 찍은 사진에서 느껴지던 압도적인 느낌이 없어서일까, 이도 저도 아니면 비잔티움의 모자이크를 보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감동을 느끼기에 내 지식이 짧아서일까, 그게 뭐가 됐든 성당이었곳이 이슬람사원으로 바뀐 아야 소피아는 내 눈엔 반쪽짜리로 남았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돔 천장에 천으로 가린 예수와 성모마리아 모자이크 아래에 메카의 방향을 표시하는 미흐라브가 있다.
남자와 여자의 공간은 분리
옴팔리온(Omphalion)은 그리스어로 배꼽이라는 의미로 동로마 제국의 황제들이 즉위식 때 앉았던 자리다.
입안이 까칠한 느낌이 채 가시지 않은 채 출구를 나서는데 머리 위로 뭔가 묘한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 위를 올려다봤다. '아, 이 모자이크가 여기에 있었구나.' 성모 왼쪽의 유스티아누스 대제가 하기아 소피아를 오른쪽의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콘스탄티노플을 상징하는 도시를 아기 예수와 마리아에게 봉헌하는 모습의 모자이크다. 실내에선 이슬람의 조명이 환하게 비친다. 묘했다.
코로도바 모스키타 안으로 들어섰을 때 성당이라곤 도저히 짐작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무것도 없이 이슬람 기둥만이 늘어서 있었음에도 그토록 감명을 받았던 것은 건축물이 아름다워서가 아니었다. 모스크를 성당으로 개조하면서 이슬람 5개의 출입구를 모두 막았고 일정 부분 이슬람 장식을 뜯어내고 성당으로 개조를 했다. 나중에 주교가 이를 보고 이교도의 문화유산이지만 아름다운 건축물이 훼손된 것을 안타까워하며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그리고 이슬람 장식을 그대로 둔 채로 한쪽 벽면만 카데드랄로 개조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진짜 이슬람 기둥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모스키타였지만 엄청난 감동이 있었다.
어느 종교의 우열을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대승적으로 세계 인류 문화유산이라는 대명제만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인가.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아야 소피아가 종교시설이 아닌 박물관으로 전환되면서 공존했던 두 문화는 이젠 이슬람만의 문화로 남겨 두고 싶어 하는 모습이다. 모자이크를 훼손하지 않는 대신 천으로 가리는 조건으로 이슬람 사원으로 세계유산을 변경했다니 눈 가리고 아웅인가 싶었다. 과연,이슬람과 기독교 문화는 공존이 가능한 것일까? 아야 소피아를 나서는 길 여전히 입안이 까칠하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하기아 소피아를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콘스탄티노플을 봉헌하는 모습이 담긴 모자이크
+ 보지 못한 푸른빛의 블루모스크
광장 옆에는 블루모스크가 있는데 하필이면 내가 방문했던 2022년 겨울은 공사 중이라 개방을 하지 않았다. 아야 소피아보다 100년 뒤에 지어져 늘 비교 대상이 되는 블루 모스크이기에 어떤 차이가 있을지 꼭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보지 못해 아쉬웠다. 언젠가 블루모스크의 푸른빛을 볼 기회가 있겠지.
밤의 아야 소피아
+ 오스만 제국의 위대함, 톱카프 궁전
이제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볼 차례다. 아야 소피아를 나서 톱카프 궁전까지는 걸어서 얼마 걸리지 않았다. 톱카프 궁전은 1453년 오스만 제국이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후 최초로 세운 궁전이다. 돌바바흐체 궁전이 지어지기 전까지 약 400년간 술탄들이 살았던 공간이자 오스만 제국의 정치, 경제, 문화가 최전성기였던 영광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입구부터 어마어마한 규모에 화려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것들에 입이 떡 벌어졌다. 정문을 들어서면 넓은 정원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약 70만 평에 달하는 톱카프 궁전은 벽 길이만 약 5km에 달한다고 하니 실로 엄청난 곳이다. 중앙아시아 유목민인인 투르크 족의 생활양식이 반영된 동글동글한 지붕은 언제 봐도 인상적이다. 400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궁전이었던 만큼 술탄이 바뀔 때마다 궁전에 상당히 공을 들였을 것이다. 유럽지역 일부, 서남아시아, 지중해 연안, 북 아프리까까지 지배했던 오스만 제국의 영광이 톱카프 궁전 건축에 녹아 있으리란 건 모형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다만, 큰 화재가 4번이나 나면서 현재는 규모보다는 상당히 축소된 상태라고 한다.
톱카프 궁전 모형
톱카프 궁전은 총 4개의 정원이 있는데 정원과 정원사이에는 문이 위치하며 경계를 짓고 있다. 가장 안쪽에 있는 4번째 정원은 술탄의 가족들이 거주했던 프라이빗한 공간,즉, 하렘이 있다. 하렘에 이르기까지 정원을 하나하나 통과할 때마다 화려해지는 건축들은 미로 같은 길임에도 깊숙한 곳으로 들어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첫 번째 문을 들어서면 1 정원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매표를 한다. 이어 톱카프 궁전의 이름의 유래가 된 경의의 문을 들어서면 본격적인 톱카프 궁전관람이다. '톱'은 대포이고 '카프'는 문이라는 의미니 '대포문'이라는 뜻인데 경의의 문 양쪽에 대포가 설치되어 있어 톱카프 궁전으로 불리게 됐단다.
톱카프 궁전이란 이름을 붙여준 경의의 문 꼭대기에는 감옥이 있었다.
매일 3~5천 명의 식사 준비를 하느라 주방에만 천 명이 넘은 인원이 일을 했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는데 주방의 엄청난 굴뚝을 보니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주방이 이 정도면 더 말해 무엇할까. 도시 하나가 이 궁전 안에 들어와 있는 셈이다. 이슬람 궁전 안에 성당 건물이 있어 특이하다 싶었는데 이 성당은 유스티아누스 때 건축된 성당이었다. 오스만이 동로마 정복 후 모스크로 사용하지 않아 지어질 당시 원형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성당이란다.
외교사절단 방문, 고위 관료를 만나기 위한 접견실, 보물 전시관 등 오스만 제국의 찬란한 역사를 증명해 줄 보물들이 가득한 몇 군데를 열심히 구경했다. 늘 그렇듯 처음에는 꼼꼼히 보지만 넓어도 너무 넓은 공간을 한참 걸어 다니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집중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아름다운 유물들은 시간이 지나니 다 비슷비슷하게 보인다. 아직 구경은 반도 못했는데 말이다. 결국 도자기관 등 몇 군데는 그냥 지나쳤다.
주방의 굴뚝과 성 이레네 성당
문과 정원이 차례로 이어지며 맨 안쪽 깊숙한 공간으로 연결된다.
오스만 제국의 찬란한 문화유산들
제3의 정원으로 연결되는 행복의 문에 도착하니 문의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군주들만 통과했다는 문이라서 그런지 문에서부터 권위가 느껴졌다. 문 앞에는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후 깃발을 꽂았다는 자리가 보존되어 있었다. 오스만 제국으로서는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인 셈이다.
한반도는 여러 나라가 거쳐갔지만 민족이 달라지지 않았기에 나라 이름이 달라도 같은 선상에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와 달리 여러 문명이 거쳐간 튀르키예 인은 어떤 느낌일지 몹시 궁금했다. 어학연수를 할 때 튀르키예 친구들과 수업을 듣기는 했었다. 인사는 해도 그렇게까지 가깝게 지내지는 않았기에 너무 내밀한 문제까지는 물어볼 수가 없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우리처럼 하나의 땅에 연속 문명으로 생각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꼭 물어보고싶다.
행운의 문 앞에는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선언하며 술탄이 깃발을 꽂은 자리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하나도 같은 건물이 없다.
외교 사진들을 맞이했던 공간과 도서관 등이 있다.
드디어 가장 안쪽의 공간, 하렘에 도착했다. 밖에서 볼 때 아름다운 건물이라 생각했지만 안으로 들어서니 이전에 본 화려함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도장 깨기 하듯 수없이 많은 방과 수많은 오스만의 유산을 본 터임에도 하렘의 공간에 들어서니 앞서 본 것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절제미가 있긴 했지만 도저히 감춰지지 않는 아름다움이랄까. 오스만 제국 최고의 권력자의 격조가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술탄이 거주했던 공간은 다른 건물과는 차원이 다른 화려함이 장식하고 있다.
오스만 제국의 영광은 지도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톱카프 궁전에서 가장 손에 꼽는 건 하렘에서 보는 풍경이지 싶다. 보스포루스 해협과 바르마르해 그리고 금각만이 합류하는 지점이 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 잡았기에 톱카프의 궁전에서는 이스탄불이 한눈에 들어오는 요새 중의 요새다.
쇠퇴하고 있는 오스만의 영광을 재건하기 위해 발버둥 치듯 400년을 살았던 곳이 아닌 보스포루스 해협을 간척해 돌마바흐체 궁을 새로 지었지만 결국 오스만은 무너져 내렸다. 오스만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오스만의 심장이랄 수 있는 이곳의 시간은 박물관으로 박제되어 그들의 보물창고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들여다본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뒤늦게 입구에서 발견하는 글 귀 하나.
"알라여, 이 궁전을 지은 사람의 영광이 영원토록 하소서, 알라여, 그 힘을 더욱 강하게 하소서."
영원한 건 절대 없다. 삐딱한 마음이 더 뾰족해졌다.
이스탄불 세 해협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자리 잡은 톱카프 궁전
+ 빼놓을 수 없는 바자르 구경
이스탄불에서 꼭 방문해야 하는 곳 중 하나는 전통시장인 바자르인데 그랜드 바자르를 가장 많이 간다고 했다. 딱히 바자르를 가야겠다는 생각이 아니었기에 아시아지구로 넘어가기 위해 배를 타려고 가다 시간이 잠시 남아 에미뇌뉘 지역의 미히르 차르슈(misir carsisi)에 들렀다. 이곳은 17세기에 이집트에서 건너온 각종 향신료와 허브를 판매하면서 형성된 향신료 시장(Spice Bazaar)이다. 규모는 크지 않은데 관광객만의 시장이 아니라 현지인과 관광객들이 함께 이용하는 시장인 것 같아 좋았다.
그래도 관광객 대상 호객은 빠질 수 없는데 특히 한국인에게 인기 많은 제품은 '한국인 특별할인 가격'이 적용되고 있었다. 상술인지 아니면 형제의 나라의 호의인지 궁금했다. 크게 관심이 없어 둘러만 봤는데 할 줄도 모르는 체스판이 어찌나 예쁜지 눈을 뗄 수 없었다. 특히 중세 십자군 의상을 한 체스는 몰타 생각이 나서 더 그랬던 것 같다. 기념품으로 살까 말까 수십 번 고민하고 들었다 놨다 하다 짐 때문에 결국은 사지 못했는데 돌아와서도 두고두고 아쉬웠다.
17세기에 시작된 향신료 시장,
한국인 특별 가격은 형제의 나라 호의인가요?
튀르키예 특산품과 디저트 종류인 터키쉬 딜라이트
갖고 싶었던 체스판
향신료 시장 근처에 문이 열려 있어 들어갔던 모스크, 천장 모자이크에 눈이 휘둥그레
+ 한국의 홍대라는 아시아지구 카디이
이스탄불에서 아시아지구 카디이는 우리나라의 홍대라고 했다. 맛집들이 많이 모여있어 저녁 맛집투어로 인기가 많다고 했다. 여행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피로가 누적되고 날씨가 왔다 갔다 하는 탓에 계속 컨디션이 좋지 않고 속이 울렁거리는 상태였지만 이스탄불까지 와서 아시아지구를 안 가면 후회할 것 같았다. 해가 지는 시간에 배를 타니 한강 유람선 탄 느낌도 나고 기분 전화도 되고 좋았다.
배를 타고 가는 아시아 지구
저녁은 백종원의 스트리트 푸드파이터에 소개된 곳에서 먹었다. 튀르키예 음식을 잘 몰라 음식에 대한 설명은 힘들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았음에도 고기를 엄청 맛있게 먹었으니 내 입맛에는 맛집이었다. 저녁도 든든하게 먹었겠다 가장 번화가로 직진했다.
카디이는 홍대가 맞았다. 하루 중 관광지보다 더 많은 사람들, 그것도 현지인 MZ 세대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어떤 골목은 식당가, 어떤 골목은 옷을 파는 곳, 또 어떤 골목으로 들어가니 재래시장이 이어진다. 사람도 많은 데다가 밤이라 어디가 어디인지 정신이 하나도 없다. 홍대는 집에서 가깝긴 하지만 사람이 많아서 가급적 꼭 필요하지 않으면 가지 않는데 여행지의 시끌벅적함은 나름대로 견딜만하다.
백종원 맛집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곳
이스탄불의 홍대, 카디이
저녁을 안 먹었다면 지갑 털릴 뻔 했던 길거리 음식
재래시장
내겐 그저 그랬던 홍합밥
튀르키예에서 많은 음식을 먹었는데 가장 좋았던 것은 '카이막'이었다. 카이막은 소나 물소의 우유를 저온 살균해 크림을 걷어낸 일종의 음료인데 특이 이 카이막에 꿀을 넣어 먹으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꿀의 달콤함과 어우러지는 카이막의 고소함에 매료되고 나니 도저히 끊을 수가 없었고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카이막을 먹어댔다. 카이막을 사 올 수 없으니 결국 꿀을 샀다. 정통 카이막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무지방 그릭 요거트에 튀르키예 꿀을 타서 카이막인 양 요즘도 즐기는 중이다.
꿀 가게에서 디저트로 팔고 있는 카이막, 한국과 인연이 있으신 주인분
비잔티움, 로마, 오스만이라는 세계사의 주요 문명이 지나간 도시에 너무 기대를 했던 탓일까.몰타와 런던에서 생활을 한 뒤 로마와 피렌체를 거쳐 튀르키예에 도착하고 나니 튀르키예와 이스탄불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너무 얕은 지식으로 여행을 한 탓일까 싶어 여행이 끝난 뒤 튀르키예에 대해 많은 공부를 했지만 여행 당시에 느꼈던 혼란스러움은 해결되지 않은 숙제로 지금도 남아있다. 고작 열흘 정도 머물고 튀르키예가 기대에 못 미쳤다고 말하는 것도 나의 오만일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어느 시점에 갑자기 튀르키예에서 보낸 짧은 날이 툭 튀어나와 나를 다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라 기대하며 튀르키예 여행기를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