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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작가 정해경 Jul 29. 2024

고대 도시를 보고 싶거든 튀르키예로 가라

#17 튀르키예 일주여행:  시데, 에페소, 히에라폴리스(파묵칼레) 

50대에 어학연수는 핑계고 4    


튀르키예 일주여행  : 시데, 에페소, 히에라폴리스(파묵칼레) 

#17. 로마를 보고 싶거든 튀르키예로 

서로마 멸망 이후 천년을 이어간 비잔티움 제국에 도착했을 때 적잖이 당황했다. '콘스탄티노플'을 기대했건만 내가 보고 싶었던 콘스탄티노플은 그곳에 없었다. 이스탄불에 실망감을 안고 별 기대 없이 튀르키예의 소도시에 도착해서야 알았다. 튀르키예는 정녕 다양한 문명들이 거쳐갔고 고대의 주인과 지금의 주인이 다르지만 여전히 하나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스탄불에서 단편적만 느꼈던 튀르키예의 다양한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사랑한 시데(Side)  

안탈리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시데는 안탈리아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빼놓지 않고 방문하는 곳이다. 이곳이 유명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특히 아폴론 신전의 일몰 풍경이 유명하다. 세기의 커플인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감상했다고 알려져 있어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기둥만 남은 아폴론 신전은 일몰로 유명하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 이름만으로도 극적인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그 둘이 '아폴론 신전에서 일몰을 봤다.'는 것만으로 낭만이 철철 흘러넘칠 것만 같은 '시데', 저녁 일몰을 보면 좋았겠지만 패키지여행의 특성상 아침 일정으로 시데를 찾았다.  


시데에 도착하면 바로 아폴론 신전이 있을 거란 바보 같은 생각은 어쩌다가 하게 된 것일까. 버스에서 내려 아폴론 신전까지 있는 곳까지는  꼬마 기차에 탑승을 했다. 내심 천천히 걸어서 이것저것 구경하면서 걸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나 그 생각은 금방 접었다. 입구에서 아폴론 신전까지 거리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길 옆으로는 아직도 발굴되고 있는 유적의 흔적들이 상당했다. 

시데 입구에서 아폴론 신전까지 무조건 꼬마 열차를 타세요.

 

꼬마 기차에서 내리니 바다로 향한 길 양옆으로 아기자기한 상점가가 이어진다. 시데는 소도시라고 하기에도 정말 작은 느낌이었는데 마을 안팎으로 유적지 발굴이 한창이었다. 길 옆으로 유적이 발굴되고 있어 지나다니면서도 발굴을 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어 이마저도 시데 여행 일정의 일부로 느껴졌다. 발굴 현장을 보고 있자니 도대체 이 도시가 얼마나 대단했던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시데는 기원전 7세기 무렵 고대 그리스인들이 개척한 도시는 이오니아 식민도시 중 하나였고 bc25년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로마의 속주로 편입됐다큰 항구가 있어 노예무역시장으로 번성하던 곳이었는데 로마시대에도 상업적으로 크게 번창을 했고 지금의 유적은 그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바다로 이어지는 거리는 오스만식 건물들 


마을길이 끝나고 바다를 따라 조금 걷자 몇 개의 기둥만이 남아 있는 아폴론 신전이 홀연히 나타났다. 바닷가 앞에 버티고 있는 오직 5개의 기둥은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유럽 각지에 존재하는 아폴론 신전이 여러 개 있겠지만 이보다 더 극적일 수는 없겠다 싶은 시데의 아폴론 신전이었다. 튀르키예의 땅에 그리스 신전이라니 싶지만 이 땅의 원래 주인은 팜필리아 인이었다. 팜필리아 인은 트레이 전쟁 이후 미케네가 쇠락하자 본토를 떠난 그리스 이주민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한때 찬란한 도시였을 시데의 흔적은 여기저기 흩어진 파편으로만 짐작할 뿐이다. 널브러진 파편들은 그나마 이곳이 신전이라 가지런하게 모아두었지만 시데 골목을 걷다 보면 한눈에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돌덩이(?)들이 널려있는데 여기는 너무도 흔해 그냥 버려지다시피 하고 있다. 

 


마을 안에서 본모습도 그렇고 내 눈에 비친 시데는 묘하게 '경주'와 닮았다. 경주에서는 우스개 소리로 땅만 파면 유적이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고 어딜 가나 유적지 발굴 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시데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다만, 저 수많은 돌들을 언제 맞추어 온전한 아폴론 신전의 모습을 볼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극적인 효과를 위해 일부러 저렇게 놔두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방문한 시간이 이른 오전이라 관광객이 별로 보인다 싶지 않았지만 바닷가로 향하고 있는 집들은 대부분 호텔이거나 여행객을 위한 숙박시설이었다. 오후 나절까지 사람이 별로 안 보인다 싶어도 일몰 때만 되면 다들 이곳으로 모여들어 이 사람들이 다 어디에 있다가 왔나 싶을 정도라고 하는데 충분히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지중해 최고의 일몰 풍경은 보지 못했지만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반할 수밖에 없는 풍경이겠다 절로 그려질 만큼 아름다운 시데였다. 

지중해의 아름다움을 품을 수 있는 시데 


로마인이 성스러운 도시라 불렀던 히에라 폴리스(Hierapolis) 

파묵칼레를 보러 갔지만 히에라 폴리스에 반할 줄 몰랐다. 정확하게 말하면 파묵칼레가 전부인 줄 알았던 곳에 고대도시 히에라 폴리스가 바로 옆에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이젠 사라진 로마의 성스러운 도시 히에라 폴리스, 파묵칼레에 실망했던 마음을 위로하기에 충분했다. 


튀르키예 지방일정에서 가장 기대를 했던 건 어쩌면 파묵칼레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얗게 눈이 내린 것 같은 정상에 빛깔 고운 에메랄드 빛 온천수가 흘러가는 풍경은 파묵칼레의 대표적인 풍경이다. 오래전 보았던 신비로운 풍경의 사진은 '파묵칼레'라고 했고 튀르키예에 있다고 했다. 그때였을 것이다. 내가 튀르키예를 가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게. 

다소 호화롭게 느껴진 현대의 파묵칼레 입구, 복원된 고대의 히에라 폴리스 입구


파묵칼레의 온천수 사진 외에는 아무 정보도 없던 상태였기에 산중턱에 세워진 다소 호화로운 입구는 의외였다. 튀르키예를 대표하는 관광지답게 여행비수기인 11월 중순임에도 입구는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파묵칼레의 대표적인 풍경을 기대하고 안으로 들어서니 웬걸 허허벌판이 기다리고 있었다. 


파묵칼레는 히에라폴리스라는 거대한 도시 중에서도 일부였다. 말하자면 히에라폴리스 안에 파묵칼레가 있는 셈이다. 이 일대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곳인데 전체 면적이 1,077㏊이나 되는 곳이라 깜짝 놀랐다. 입구로 들어서 파묵칼레로 곧장 가는 줄 알았는데 거리상 히에라 폴리스 원형극장이 가까워서 먼저 원형극장으로 향했다. 

파묵칼레가 여기라고요? 
엄청난 면적의 히에라 폴리스 (12번이 원형극장이고 15번이 입구다) 


원형극장까지도 꽤 걸었던 듯하다. 경사진 곳에 자리 잡은 원형극장이라 은근한 오르막을 걸어 원형극장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까마득한 곳에 원형극장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리고 막상 원형 극장에 섰을 때 어마무시한 경사에 절로 '헉' 소리가 나왔다. 최대인원 만 오천명이나 수용한다는 것도 놀라운데 2세기에 지어진 건물은 더욱 경이로웠다. 


이탈리아에서부터 이곳 튀르키예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의 원형극장을 봤지만 히에라폴리스의 원형극장만큼의 긴장감을 주는 곳은 없었던 것 같다. 깎아지른 경사도 경사지만 언덕 위에 지어진 히에라 폴리스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원형극장에서 바라보는 히에라폴리스 일대의 풍경은 가히 압권이었다.  모든 지형지물이 한눈에 다 내려다보이는 원형극장의 위엄은 실로 대단했다. 무대가 거의 소실되어 버린 다른 극장들과 달리 아름다운 무대가 일부라도 남아 있어서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원형극장이었다. 

2천 년전에 지어진 원형극장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히에라 폴리스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히에라폴리스 원형극장을 보고 나니 파묵칼레보다 지진으로 사라진 이 도시가 더욱 궁금해졌다. 고대부터 온천수가 나왔기에 따뜻한 물이 병 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고대인들은 2세기 경에 이곳에 온천을 만들게 된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치료를 위해 파묵칼레를 찾았고 로마의 황제들도 휴양지로 찾았다. 


이런 곳에 빠질 수 없는 이름, 바로 클레오파트라도 이곳에서 온천을 즐겼다고 한다. 온천수라고 하기엔 물이 너무 맑아서 깜짝 놀랐고 한 바퀴 돌아보니 경치도 한 몫했다. 특이한 건 물속에도 고대의 유적들이 한가득이다. 여름 성수기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발 디딜 틈이 없다고 하는데 겨울이라 사람이 많지 않았다. 한국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답게 가게 홍보 문구에는 한국어도 빠지지 않았다. 여름 투어로 이곳을 찾게 될면 자유시간에 대부분 이곳에서 수영을 한다고도 했다. 

클레오파트라가 사랑했다는 온천수


파묵칼레를 보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 커 사실, 클레오파트라가 즐겼다는 온천은 크게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목욕장을 나와 드디어 파묵칼레에 도착했는데 도착하자마자 기대는 순식간에 실망으로 바뀌었다. 


파묵칼레는 온천의 칼슘 퇴적물이 쌓이면서 마치 꽃이 핀 것 같은 독특한 지형을 만들어냈다. 70m 높이 산의 경사면을 따라 흘러내리며 형성된 석회지대는 솜으로 만든 요새처럼 보인다고 해서 '목화의 성'이라는 별명이 있는 곳이다. 하지만, 내 눈앞에 펼쳐진 건 온천수가 다 말라서 허연 석회암만이 앙상하게 남겨져 있었다. 


이곳이 이렇게 된 이유는 바로 무분별한 개발 때문이었다. 파묵칼레가 인기를 얻자 정상까지 호텔이 들어서면서 너도나도 온천수를 끌여다 쓰게 됐고 신비한 옥색 물빛이 마르지 않았던 파묵칼레의 온천수도 고갈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자 튀르키예 정부에서는 이 일대 전체에 공사를 했고 방출수량을 제한하고 있어 메마른 상태의 파묵칼레만 보게 된 것이었다.  성수기인 여름에 관광객이 몰려도 물이 모습은 한 달에 두어 번이 될까 말 까라고 한다. 그나마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돼 보호를 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한 곳은 온천수가 흐르고 있어서 그나마 발을 담가 볼 수는 있었다. 석회암 지대는 너무 미끌거려 걷는 데 상당히 조심해야 했다. 석회암이 온통 흰색이라 얼음 같은 느낌인데 물은 또 따뜻하니 느낌도 색다르고 상당히 이색적으로 느껴졌다. 

약 70m 산에서 흘러내린 석회암이 하얗게 변했다.
온천수가 있는 곳은 신비롭게 느껴지긴 했다. 


파묵칼레에서 1시간 정도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온천수가 있는 곳에서 사진도 찍고 발도 담그면서 이국적인 풍경을 즐겼다. 하지만 기대했던 풍경이 볼 수 없어서 적잖이 실망한 나는 파묵칼레에서 머물기보다 히에라 폴리스로 향했다. 


사람들이 대부분 몰려있는 파묵칼레가 전부인 줄 알았는데 건너편으로도 엄청난 온천수가 흐르는 곳이 있었다. 물론 온천수가 흐른다면 장관이었을 텐데 온천수가 없는 석회암은 얼음빙판처럼 느껴졌다.  갑자기 하늘 위로 패러글라이딩이 날기 시작한다. 이곳까지 패러글라이딩이 밀고 들어온 모양이다.  

 자연적으로 흘러내리는 온천수는 더 이상 볼 수 없었던 파묵칼레 


그렇게 또 한참을 걸어 히에라 폴리스 정문에 도착했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건축물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거리는 이 도시가 얼마나 번성했던 곳인지 보여주고 있었다.  아폴론 신전에 잘 조성된 로마 거리에 원형 극장도 2개나 있는 고대 도시 히에라 폴리스는 전성기에는 약 15만 명이 생활했을 정도라고 한다. 


실제로 이곳은 아나톨리아인, 마케도니아인이 있었고 로마가 지배 이후로 유대인까지 뒤섞여 지내는 '국제 도시'였단다. 거의 비가 오지 않는 척박한 기후임에도 '온천수'로 인해 도시가 만들어지고 그로 인해 수십 만의 사람들을 불러 모으며 고대시절부터 번영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특이한 건 히에라 폴리스의 맨 끝에는  '네크로 폴리스'라는 일종의 공동묘지가 있는데 약 2km에 달하고 약 1,200여 개의 무덤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고대부터 환자들이 치료를 위해 온천을 많이 찾았기에 그들의 무덤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단다. 또한, 히에라 폴리스를 기독교로 개종시킨 사도 빌립보(Philip)가 이곳에서 순교했다고 알려지고 있어 그의 무덤도 있다. 하지만, 직선으로 10km가 넘을 정도로 넓어도 너무 넓은 히에라 폴리스였기에 네크로 폴리스와 빌리보의 무덤은 지도로만 확인했다.  

기원전 1세기에 지어진 튼튼한 성벽


한때 15만 명이 넘었던 도시 히에라 폴리스는 왜 이렇게 폐허로 남은 것일까. 그건 바로 '지진'때문이었다. 이 일대는 지진이 잦은 곳으로 평소에도 크고 작은 지진이 있었는데 결정적으로 1354년에 일어난 대지진으로 인해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졌고 히에라 폴리스도 잊혔다. 그러다가 19세기 독일 고고학자 카를프만이 히에라 폴리스를 발견했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완전히 폐허가  돼 버린 히에라폴리스였지만 그 땅에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굉장히 특별한 기분을 느낄 수 있어 더없이 좋았다. 지금도 여전히 발굴과 복원작업은 계속 진행 중이고 시간이 넉넉지 않아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은 별도로 마련된 박물관에서도 수는 있었다. 다만, 과연 명이나 박물관을 둘러볼까 싶긴 했다. 사라진 문명보다 (그리스 로마 문명이 있었던 크고 작은 도시들이 튀르키예에는 상당히 많이 있다) 화려함으로 먼저 다가오는 파묵칼레가 있으니 말이다. 


지진으로 인해 사라진 문명이 다 복원되면 어떤 모습일까


1만 년 이상의 시간이 만들어낸 자연 유산이 인간의 무분별한 욕심으로 얼마나 빠르게 망칠 수 있는지 말라버린 파묵칼레를 보니 무서운 생각마저 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훼손된 것들이 많이 복원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젠 히에라 폴리스를 떠나야 할 시간이다. 출구로 걷다가 문득 뒤를 돌아봤다. 히에라 폴리스는 알았을까. 인구 15만 명이 북적이던 세계적인 도시가 한순간에 사라지고 앙상한 채로 남겨질 거라는 사실을.  

어쩌면 히에라 폴리스가 우리에게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튀르키예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 에페소(Effes)  

에페소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튀르키예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맥주인 에페스(Efes)가 바로 에페소라는 도시이름에서 따왔다. 하지만 아무 정보가 없는 나로서는 맥주 브랜드 에페스와 고대도시 에페소를 연결할 리는 만무했다. 


튀르키예에서, 아니 어쩌면 이스탄불을 제외하고 튀르키예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라는 에페소다. 에페소가 어떤 곳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 고대 도시에 발을 들여놓았고 셀수스 도서관이 입장권인 에페소는 첫 순간부터 전율이 일었다. 

고대 그리스 도서관 중 세 번째로 큰 규모인 셀수수 도서관은 110~125년에 완공됐다. 


에페소는 1만 년에 걸쳐 20여 개의 문명이 거쳐간 고대도시다. 에게에 연한에 위치하고 있어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는데 하이타이트가 설립 후 트로이가 함락되자 그리스에 점령당했고 알렉산더 왕이 지금의 도시 모습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후 기원전 1세기 로마에 점령된 후 아쿠수트투스는 에베소를 아시아의 수도로 선언했을 정도로 헬레니즘 문화에 이어 로마 문화가 번영을 했던 곳이다. 


또한 사도 요한도 이곳에서 머물면서 전도활동을 했고 요한복음과 요한 계시록을 저술했고 사후에 이곳에 묻혔기에 기독교의 성지 순례 중 한 곳이기도 하다. 실제로 성모 마리아가 생을 마감했다고 알려진 유적지가 가까이에 있다. 


라틴어로 에페수스(Ephesus)로 불렸던 에페소는 로마의 최전성기였던 팍스로마나 시기 로마 제국에서도 가장 부유한 3대 도시 중 하나였다. 노예를 제외하고 인구 25만 명이 거주했으며 로마와 안디옥 다음으로 세 번째로 큰 도시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일화가 있다. 기원전 41년에 에페소에 둘이 함께 왔고 에페소 시민들은 이 둘을 향해 디오니소스 신과 아프로디테 여신이 왔다고 환영했다고 하는데 세기의 커플이 남긴 다양한 이야기를 튀르키예 곳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 

항구까지 5km였던 에페소는 로마의 주요 무역항이자 로마제국 중 3번째로 큰 도시였던 에페소( 사진출처 =구글 검색)


튀르키예 지방을 다니는 동안 로마 당시에 존재했던 크고 작은 도시들이 많았고 어쩌면 로마보다 고전적인 형태미가 더 잘 남아있어 놀라웠다. 고대 로마 문명을 보려면 로마보다 튀르키예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에페소는 단연코 최고였다. 규모도 규모였지만 발굴한 지 150년이 지났지만 복원된 것이 30% 남짓이라고 하니 모두 복원되면 얼마나 엄청난 곳일지 기대하게 만드는 곳이었다. 에게 해의 로마라고 불릴 정도로 로마를 제외하고는 가장 그리스 로마 문명이 잘 남아 있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로마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 들던  로마 대로는 저녁이면 횃불을 밝히는 최초의 가로등 거리였다고


지금은 기둥 하나만 남았지만 127개의 기둥으로 지어진 아르테미스 신전을 비롯해 거대한 도서관, 1세기에 지어진 도시 입구의 공동 목욕탕, 아고라, 최고의 광고 간판이라고 할 수 있는 홍등가 발자국, 원형극장과 소극 등 유물을 제대로 보자고 들자면 하루로도 부족할 것 같았다. 실제로 워낙 지역이 넓은 곳이라 천천히 걸어서 다 훑는 데만도 2시간이나 걸렸다. 이것저것 워낙 설명이 많다 보니 나중에는 어디서 뭘 봤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고고학을 좋아하거나 문명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에페소는 전율하면서 거닐게 될 도시임에 틀림없다. 

2만 5천명이나 수용하던 원형극장과 귀족들이 앉는 자리는 대리석으로 만든 오데온


도미티아누스 신전
거리를 나타내는 다양한 표시들
최초의 수세식 화장실이라는 타이틀이 있는 공동화장실과 최초의 광고간판이랄 수 있는 홍등가를 안내하는 발자국


그저 박물관을 좋아하는 정도의 식견이라 이곳 유물과 관련된 자료들은 나 역시 에페소를 다녀온 뒤 공부차원에서 이것저것을 찾아보기는 했었기에 여기에 공부한 내용을 따로 옮기지는 않겠다. 다만 인상적이었던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브랜드 나이키의 로고에 영감을 준 나이키 여신의 부조가 이곳에 있었다.(나이키 여신의 옷자락에서 로고가 탄생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나이키 여신의 가슴을 얼마나 만졌는지 가슴 부분이 반들반들해진 것에 절로 '풉'하고 웃음이 나왔다.  

나이키 상표의 기원이 된 나이키 여신의 부조 


하드리아누스의 문과 그 뒤로 하드리아누스 신전은 기둥 몇 개만 남아 있어 전체적인 모습이 잘 상상이 안 됐는데 추정 복원도를 보니 입이 떡 벌어졌다. 로마 시대 완전히 계획도시로 지어진 에페소에 이렇게 아름답고 화려한 건물이 한 두 개가 아니었으니 이곳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일지 절로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130년 로마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방문 기념 위해 건립한 문 정면 아치 위에는 행운의 신 니케가 조각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압권은 셀수스 도서관으로 향하는 쿠레테스거리였다. 양쪽으로 열주가 늘어서 있는 길의 바닥은 대리석이나 요즘으로 보자면 포장된 도로인 셈이다. 이곳에 서서 사람들이 들고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상상력을 보태면 로마시대의 거리가 눈앞에 펼쳐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너무나 사실적이었다. 

셀수스 도서관으로 향하는 로마대로 쿠레테스 거리는 약 210m에 달한다. 


에페소 티켓을 받아 들 때부터 기대했던 셀수스 도서관은 실제로 보니 '놀랍다'로는 표현이 안 될 정도로 엄청난 건축물이었다. 아시아 주 총독이었던 셀수스를 기념해 그의 아들인 아퀼라가 만들었는데 125년에 지어진 도서관이다. 약 1900년 전에 지어진 도서관은 그 아우라가 실로 대단했다. 


아우도 아우라지만 셀수스 도서관은 고대 그리스 도서관 중 알렉산드리아, 버가모에 이은 3번째 도서관으로  알려져 있다. 어느 정도길래 규모가 3번째인가 싶은데 양피로 만든 두루마리 형식으로 약 1만 2천 권의 서적을 소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앞에서 보면 2층인 구조는 안에서 볼 때면 3층의 구조인 셀수스 도서관의 건축에 놀라기는 이르다. 더 놀라운 점은 양피가 습도에 취약한 걸 감안해 변질을 막기 위해 외벽과 내벽 사이에 1m 간격을 둔 과학적인 건축이었다는 사실이다. 아름다운 기둥에는 지혜, 덕망, 지능, 지식을 상징하는 4개의 여신상을 배치했는데 진본은 아니고 무조품이라고 한다. 


어떤 인문학자는 에페소를 두고 '기원전 10세기에 건설된 고대 도시는 군사력보다는 교육과 문화, 여가에 더 많은 가치를 두었던 소프트 파워를 지향한 인문 도시'라는 평가를 내렸는데 그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던 에페소였다. 

셀수스 도서관은 밖에서 보면 2층이고 안에서 보면 3층으로 지어졌다.
기둥에는 지혜, 덕망, 지능. 지식을 상징하는 4개의 여신상이 있다.


에게 해의 아름다운 고대 로마도시의 영광도 자연재해 앞에 영원할 수 없었다. 지진으로 셀수스 도서관이 무너져 내렸다. 로마의 무역항으로 고대 아시아와 마케도니아 북아프리카 사이의 해상무역 중심지였던 에페소지만 강에서 떠내려온 토사가 지속적으로 항구에 퇴적물로 쌓이면서 항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국제시장으로 몰려들었던 돈과 사람들이 어느새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말라리아 같은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도시는 점자 쇠퇴하게 된다. 결국 인근에 셀축이라는 신도시를 만들고 시민들을 이주시키고 항만의 기능도 쿠샤다스로 옮기면서 에페소는 사라지게 된 것이다. 


오랫동안 잊혔던 에페소는 영국에 의해 영국 건축가이자 고고학자인 우드(J.T.Wood)가 대영박물관의 후원으로  원형 극장을 발굴하면서 시작됐는데 이후 고대 7개 불가사의라는 아르테미스 신전도 발굴했다. 아르테미스 신전의 복원모습은 현재 대영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이후 본격적으로 발굴작업에 뛰어들어 지금도 발굴작업을 하고 있는 곳은 오스트리아다. 아고라와 셀수스 도서관을 이 정도로 볼 수 있는 것은 오스트리아 고고학회의 공이 크지만 셀수스 도서관의 4개의 여신상 진본은 튀르키예가 아닌 오스트리아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것 또한 자본의 논리다. 한때 무서운 기세로 세계사를 호령했던 오스만이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쪼그라들지 않았더라면 튀르키예 땅의 유물과 유적들은 다른 나라로 반출되지 않고 그대로 남았겠지..라는 쓸데없는 상상을 해본다. 


현재 에페소에 발굴된 유적은 고작 30%, 다 발굴되려면 몇 백 년이 더 걸린다는 에페소. 그리스보다 더 그리스적이고 로마보다 더 로마적인 에페소를 남겨놓은 그리스 로마 사람들이 남겨놓은 유적으로 영원히 먹고사는 튀르키예가 부러워지는 순간이다. 

유적 발굴한 지 150년이 지났지만 30%만 발굴된 에페소, 언제 전부 발굴될까? 
사고 싶었던 도록은 여행 짐으로 인해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다  결국 사지 못했다. 



+ 다음이야기 : 하루에 끝내는 이스탄불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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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에 어학연수는 핑계고' 시리즈

 런던 어학연수와 런던 생활에 관한 이야기


몰타 어학연수와 몰타 생활에 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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