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삽을 뜬 지 14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공사가 진행 중인 성당은 가우디 사후 100주년인 내년 2026년 완공을 앞두고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아름답다'와 관련된 수식어란 수식어를 다 동원한다고 해도 실제 본 것의 1/10도 표현해내지 못할 것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이었다.
2026년 완공을 앞두고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산티아고에서 다시 바르셀로나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2009년에는 순례를 마친 후 국경을 넘는 버스를 타고 스페인 산티아고에서 포르투갈로 떠났는데 그날은 비가 많이 내렸다. 차장 밖으로 희미하게 멀어지는 산티아고를 보며 너무나도 헛헛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온 마음을 다했던 순례길이 끝난 다음 일시에 밀려오는 허무함이 너무 컸고 '언젠가 꼭 다시 산티아고에 가리라.'는 마음으로 보낸 지난 10년이었다.
순례자가 아닌 여행객으로 1박 2일의 짧은 일정으로 산티아고 대성당 주위만 맴맴 돌다 가려니 색깔을 달리한 허무함이 마음을 파고든다. 순례길을 걷지 않은 자에게 기다리는 산티아고의 영광 따윈 없다는 걸 산티아고에 와서야 깨달은 바보 같은 상황이었지만 순례자가 아닌 한 발 떨어져서 바라보는 산티아고도 나름은 괜찮았다. 어쩌면 10개월의 어학연수 여정의 마침표를 찍는 일종의 개인적인 의식과도 같은 일정이었기에 미루고 미루던 숙제를 마친 듯 약간은 홀가분한 느낌도 들었다.
산티아고만큼이나 간절했던 묵시아였건만 컨디션 난조로 가지 못했기에 사는 동안 또 한 번은 산티아고에 올 것 같긴 한데 그때는 순례길일지 아닐지 나도 궁금하다.
동이 터 오던 스페인 산티아고 공항
비행기 안에서 동이 터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바르셀로나로 돌아왔다. 바르셀로나에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하루.산티아고 순례길 후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주요 도시들을 한 달여에 걸쳐 여행을 했었고 마지막 도시가 바르셀로나였다. 일주일 넘게 머물면서 어지간한 것은 모두 봤고 가우디에 꽂혀서 몬세라트와 가우디의 고향 레우스까지 다녀왔었다. 그랬기에 바르셀로나에서 궁금한 건 딱히 없었다. 다만, 사그라다 파밀리아 공사가 어느 정도 진척됐는지 궁금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산티아고 환승을 위해 마드리드나 내가 가보지 못한 스페인의 다른 도시를 선택했을지도모르겠다.
오직 '사그라다 파밀리아'뿐이라고 했지만 바르셀로나의 다른 곳을 가고 싶다고 해도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탈리아까지는 멀쩡했던 몰타 통신사 에픽이 탑업을 했는데도 튀르키예에서부터 먹통이었다. 몰타에서 지내는 동안 몰타 통신사였던 에픽을 이용했고 런던에 있을 때에도 에픽이 잘 됐고 런던 전화번호가 필요 없어 몰타 전화번호를 그대로 쓰면서 통신사도 그대로 이용했었다. 그랬는데 무슨 영문인지 튀르키예에서 통신사가 아예 먹통이었다.
바르셀로나를 돌아다니려면 스마트폰이 필수인데 고작 하루 때문에 유심을 사자니 괜히 돈이 아까웠다. 10년 전의 감으로 숙소에서 사그라다 파밀리아 가는 길 정도만 구글로 확인하고 사그라다 파밀리아로 향했다.
가우디를 잘 모른다고 해도 보는 순간 곡선의 건축물에 매료될 수밖에 없다. 가우디 건축물 만으로 하루 종일 투어가 가능하니 '바르셀로나는 가우디가 먹여 살리는구나'라는 생각이 했었더랬다. 건물들은 그만큼 낡았을 테니 어떨까 궁금했는데 바르셀로나 곳곳은 십여 년 전보다 훨씬 더 많은 가우디 풍의 건물들 일색이었다. 가우디라는 사람은 죽고 없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영향력이 점점 더 커지는 느낌이 들었다.
점점 더 가우디의 도시가 되어가는 바르셀로나
대략 20분 정도 걸었을까. 10년 전에는 없던 구조물이 덧대진 '수난의 파사드'에 도착했고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너무나도 웅장하고 너무나도 새롭게 느껴지는 수난의 파사드가 위풍당당하게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가우디가 완성시킨 '탄생의 파사드'와 느낌이 너무나도 달라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럴 수가 있나 싶었다. 누가 봐도 새것이라고 느껴지는 구조물 하나가 추가더ㅟㅆ을 뿐인데 느낌이 이렇게도 달라질 수 있나 싶어 눈을 의심해야 했다. 10년 전 뭔가 어정쩡하다고 느꼈던 수난의 파사드는 온데간데없고 보는 것만으로도 수난의 고통이 와닿을 정도로 극적인 느낌이 들었다.
가우디 사후 30년 뒤 모더니즘 조각가 '조셉 마리아 수비라치'에 의해 만들어진 수난의 파사드는 출구로 이용된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총 3개의 파사드가 있는데 남서쪽은 수난의 파사드, 남동쪽은 영광의 파사드, 북동쪽은 탄생의 파사드다. 예수의 부활을 표현하고 있는 영광의 파사드는 주출입구로 사용될 예정인데 2002년 착공 후 여전히 공사가 한창이라 가림막으로 가려져 있었다. 현재 성당 관람은 탄생의 파사드가 입구이며 수난의 파사드가 출구로 사용되고 있다.
성당의 남서쪽면을 차지하고 있는 수난의 파사드는 가우디 사망 후 30년 뒤에 조셉 마리아 수비라치라는 모더니즘 조각가가 완성했다. '수난의 파사드'는 1954년 착공해 1976년에 완성됐으니 22년이 걸렸다. 가우디가 설계도를 남기긴 했지만 완벽한 것이 아니었기에 일정 부분 수비라치의 해석이 많이 반영될 수밖에없었다. 그때도 수난의 파사드 조각들을 열심히 보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극적인 느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도대체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2009년 당시는 총 공정 50%였지만 가우디가 완성시킨 파사드가 너무 완벽하다고 생각을 했기에 가우디가 아닌 건축가가 만든 부분으로 전체의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조화를 상상해 낼 재간이 나에게는 없었다. 가우디가 만든 탄생의 파사드에 너무 집중하다 보니 가우디스러움과 다른 이질감이 크게 작용해 제대로 볼 생각을 안 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수난의 파사드를 보고 나니 탄생의 파사드도 같은 느낌일지 몹시 궁금했다. 수난의 파사드가 출구라 입구인 탄생의 파사드까지 성당을 한 바퀴 빙 돌아야 했는데 거리가 상당했다.
수비라치는 가우디에 대한 존경을 담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는 조각작품 맨 왼쪽 사람을 가우디로 새겨 넣었다.
성경책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예수의 얼굴이 찍힌 수건을 들고 있는 베로니카, 최후의 만찬, 유다의 배신 등
현재 주출입구로 사용되고 있는 '탄생의 파사드'는 바로 아래에 티켓부스가 있고 맞은편으로 지하철 출입구가 있다. 지하철을 이용할 경우 지하철 계단에서부터 파사드가 보이기 시작하고 계단을 다 오를 때까지 차츰차츰 드러나는 모습에 많은 감동을 받는다는 반응이었다. 성수기였다면 입장하는데만 1시간 넘게 걸린다고 했는데 비수기라 기다리지 않고 바로 입장이 가능했다.
탄생의 파사드는 가우디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되면서 사그라다 파밀리아 전체 성당 중 가우디가 유일하게 완성시킨 부분으로 남았다. 예수님이 탄생하던 순간을 담은 성경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너무나 사실적인 표현, 자연의 일부분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건축을 처음 봤을 때 충격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다시 봐도 경이롭다.
옥수수 콘을 닮아 너무나도 신기했던 첨탑은 각 파사드마다 4개씩 총 12개, 4개의 첨탑까지 모두 모습을 드러냈고 2023년에는 가장 중앙에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첨탑이 완공됐다. 각각의 파사드에 있는 총 12개의 첨탑은 예수의 12제자를 의미하고 나머지 4개는 4대 복음전도자를 나타낸다. 지금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성당의 가장 높은 곳에 세워질 170m의 첨탑의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었다.
가장 먼저 완공된 부분이니 변한 건 하나도 없다.달라진 것이 있다면 소재의 특성상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난다고나 할까. 가장 최근에 완성된 부분들과 처음에 지어진 부분들 사이에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색의 변화만이 140여 년의 시간을 말해주고 있었다.
가우디 살아 생전에 지어진 탄생의 파사드.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성경의 내용으로 구성된 탄생의 파사드
아직 감탄하기엔 이르다. 숲 속에 초대된 느낌이 들었던 성당 내부는 또 얼마나 변했을지 절로 기대가 됐다. 경건한 마음으로 성당 안으로 들어섰다. 찬란한 햇빛이 색색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쏟아져 들어온다.
익히 알고 있는 공간이었음에도 모든 것은 완벽하게 새로웠다. 50% 정도만 봤던 성당과 거의 완성이 된 실내는 느낌이 너무나도 달랐다. 모든 것에서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아우라를 풍기니 '글로리'라는 단어가 절로 떠올랐다. 종교에 상관없이 '하느님의 나라에 초대받은 이는 모두 복 되도다'는 마음이 깊은 곳에서 끌어 올랐다.
심란하고 어수선한 마음이 절로 차분해졌다. 거의 3시간 넘게 성당에서 머물렀던 것 같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외 다른 일정이 없기도 했지만 있다고 해도 일정을 포기하고라도 사그라다 파밀리아에 더 머물렀을 것이라 장담한다.
중앙 4개의 기둥에 천사(마태오), 사자(마르코), 황소(루가), 독수리(요한)가 새겨져 있다.
숲 속에 초대된 듯한 실내
중앙 제단
중앙 제단의 반대편은 주출입구로 이용될 '영광의 파사드'다. 영광의 파사드는 외부 공사가 한창인데 주출입문은 이미 완성이 된 상태였다. 출입문에는 주기도문이 세계 각국의 언어로 새겨졌는데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부분이 한글로 새겨져 있었다.
2026년 가우디 사후 100주년이 되는 해에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완공될 예정이긴 하지만 '영광의 파사드'가 여전히 골칫거리라고 한다. 백여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주출입구로 이용될 영광의 파사드 앞에 건물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가우디 설계 대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계단과 광장 등 대규모 공간이 필요해 건물을 철거해야 하는데 주민들이 쉽게 자신의 터전을 내어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현재는 성당 내부 벽체와 출입문만 완공된 상태인데 여러 가지 법적인 문제도 있고 해서 영광의 파사드가 완공되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걸리지 싶다.
모두 완공되면 주 출입문으로 사용될 영광의 파사드
완성된 출입문에 주기도문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한글로 새겨져 있다
성당 내부는 모든 것이 다 아름다웠지만 특히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형형색색의 빛은 압권이었다. 스테인드 글라스는 파랑, 연두, 초록의 색과 빨강, 주황, 노랑의 색으로 섹션마다 색깔을 달리해 구성해 놓았다. 파랑, 연두, 초록은 탄생을, 빨강, 주황, 노랑은 사망을 상징한다고 한다.
색깔의 상징 따윈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구름 속에 서서히 해가 모습을 드러내면 형형색색의 은은한 빛이 성당 안을 비춘다. 햇빛의 방향, 위치에 따라 성당 안은 꽃이 피고 지기를 반복한다. 해가 구름 속을 들락거리고 있다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따뜻함이 차올랐다. 가우디는 자신의 모든 인생을 바쳐 이 성당을 '가난한 자들을 위한 성당'으로 짓고자 했다는데 '당신의 바람은 이루어졌어요.'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형형 색색의 스테인드 글라스 직접 보지 않고선 도저히 전달해 줄 수가 없다.
A. KIM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이니셜
2009년에 전망대에 올랐기도 했고 최종적으로 완공되면 그때 다시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보러 오겠다 마음먹었기에 따로 전망대는 가지 않았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전체 역사를 보여주는 지하공간도 일정 부분 변화가 있다. 작업자들의 모습을 유리벽 너머로 볼 수 있는 건 신선했다.
반쯤 완공된 시점이던 2009년도에는 가우디가 만든 곳과 다른 건축가들이 만든 부분의 차이가 너무 심하다고 느꼈기에 다 완공되면 너무 이질적이지 않을까 괜한 걱정이 되기도 했었다. 2022년 기준으로 공정률 약 85%라는데 가우디가 만든 부분과 가우디 사후 만들어진 부분이 서로 튀지 않고 조화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우디 사망 당시에는 약 15~20% 정도의 공정이었으니 후대의 건축가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지 지금의 성당이 증거로 보여주고 있었다.
불과 31살의 나이에 자신의 모든 인생을 통틀어 성당 건축에만 매달렸던 가우디. 그는 알았을 것이다. 가우디가 73세였던 1926년 6월 10일 노면전차에 치어 갑작스럽게 사망했지만 그런 사고가 아니어도 자신의 살아생전 이 성당이 완공되지 못한다는 걸 말이다. 그가 남겨놓은 설계도가 있어 다양한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도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어져 올 수 있는 건 정말 다행이랄 수밖에.
지하공간에서는 작업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한편에 완성된 모습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모형이 있다.
가난한 주물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안토니 가우디의 창의성은 현대 건축에서도 상당히 혁신적인데 한 세기 전에는 어떠했을지 불 보듯 뻔하다. 바르셀로나 건축학교 졸업식에서 학장이 "우리가 학위를 바보에게 주는 것인지 천재에게 주는 것인지 모르겠다. 시간이 증명해 주겠지."라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다.
결국 시간은 가우디의 편이었다. 유네스코에서는 1984년에 구엘공원 구엘주택, 카사 밀라를, 2005년에 카사 비센스, 카사 바트요, 사그라다 파밀리아 탄생의 파사드와 지하 예배당, 콜로니아 구엘성당의 지하 예배당을 '안토니 가우디의 건축'이라는 이름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했다. 이로써 가우디는 개인으로써 최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을 보유한 사람이 됐다.
2009년에 방문했을 때만 해도 관광객의 입장 수익만으로 지어지고 있어 언제 완공될지 모른다던 사그라다 파밀리아였다. 하지만 그 기조는 바뀌었고 가우디 탄생 100주년이 되는 2026년에 맞춰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코로나 시기가 있어 일정 부분 공사가 연기되기도 했었고 영광의 파사드 부분에 해결해야 할 문제도 있지만 어쨌든 완성의 시간은 다가오고 있다.
한 사람의 꺾이지 않는 신념과 신에게로 향한 절대적인 마음이 결국 사그라다 파밀리아라는 위대한 건축물을 우리에게 선물한 가우디. 따라주지 않는 머리와 체력으로 심신이 지쳐가고 있는 나에게 가우디의 '중꺽마'는 큰 위로였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건축연보
세계 문화유산이 된 가우디의 건축물들
2009년에도 이맘때 바르셀로나에 있었는데 기분 탓인지 그때보다 더 휑하고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 몇 시간 남지 않은 바르셀로나인데 그냥 숙소로 돌아가려니 뭔가 좀 아쉬웠다. 유심이 안 되는 상황이라 구글지도를 이용할 수 없으니 전혀 모르는 곳으로 탐험하는 모험을 시도하기엔 무모하다.
일단 숙소에서 사그라다 파밀리아까지 길은 알고 있으니 이곳을 벗어나더라도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찾아올 수 있는 곳까지 벗어나 보기로 했다. 평소에도 스마트폰의 노예가 되다시피 살고 있고 특히 해외에서는 구글맵을 신처럼 받들고 사는데 그 모든 것이 정지되니 온몸의 동물적인 감각이 저절로 깨어났다.
11월 말의 바르셀로나
마치 내가 어디로 움직여야 하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발걸음은 너무 자연스러웠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새 고딕지구에 도착해 있었다. 바르셀로나 구시가지인 고딕지구는 카탈루냐 자치 정부청사, 시청사 등이 있는 곳으로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무척 중요한 곳이다.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아가는 람블라스 거리도 고딕지구에 있다.
내 눈앞에 나타난 바르셀로나 대성당을 보고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바르셀로나 대성당 첨탑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삼성 갤럭시 광고판이 붙어 있는 게 아닌가. 평소 같았다면 '성당 첨탑에 무슨 상업광고냐며 돈이 그리 좋더냐'라고 깎아내렸을 텐데 팔이 안으로 굽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소위 말하는 국뽕이 차오른달까. 외국에서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K-드라마, K-푸드, K-뷰티 등에 찬사를 보내는 걸 직접 경험하면서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기했다. 그런데 바르셀로나 랜드마크랄 수 있는 성당 첨탑에까지 삼성 광고가 등장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삼성 광고판이 된 바르셀로나 대성당
날은 조금씩 어두워지고 발걸음 자연스레 성당 뒤편의 골목으로 향했다. 2009년에는 배낭여행이 처음이라 유명하다는 것만 보고 다녀도 시간이 모자랐고 무엇보다 여행의 방법을 잘 몰랐다. 그랬기에 아무 목적도 없이 설렁설렁 뒷골목을 걷는다는 건 생각도 못할 정도였는데 그로부터 나도 참 많이 성장했구나 싶었다.
고딕지구 골목투어는 여행 상품으로도 인기가 있는지 곳곳에 골목투어 홍보문구가 붙어 있었다. 며칠 더 머물고 유심에도 문제가 없었다면 현지인들이 진행하는 골목투어에 함께 하는 것도 참 재미있겠다 싶었다. 비록 혼자지만 그동안 몸으로 익힌 감각을 동원해 이리저리 골목을 걷는 재미도 나름 괜찮았다.
고딕거리 골목 탐방중인 관광객들
일부러 찾아가라고 해도 골목이 워낙 많아 헤매기 일쑤였을 텐데 운 좋게도 고딕지구에서 나름 유명한 스폿을 우연히 만났다. 네오고딕 양식의 독특한 구름다리였다. 카레드 델 비스베로 불리는 주교의 거리에 있는 이 다리는 카탈루냐 자치정부 청사와 의장의 집을 연결한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는 보지 못한 영화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가 고딕지구 일대에서 촬영됐다고 하는데 이곳도 촬영 포인트 중 하나라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뭔가 예사롭지 않은 건축물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보는 눈은 살아 있구나 싶었다.
카레르 델 비스베(주교의 거리) , 영화 <향수>가 촬영된 고딕지구 골목
길을 따라 죽 걸으니 골목 끝 예사롭지 않은 광장이 나왔다. 골목투어 중인 가이드가 한 무리 사람들 앞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 한쪽에 안내판이 크게 붙어 있었다. 스페인 독재정부였던 프랑코 정권이 무고한 사람들을 이 벽에 세워놓고 총살을 저질렀던 역사적인 장소였다. 건물 한편에는 아직도 선명한 총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한때 독재국가였던 스페인의 정치 상황도 한국과 몹시도 비슷한 과정을 겪었다.
만행이 펼쳐진 장소라고 하기엔 너무 고풍스러웠다. 이곳 역시 영화 <향수>의 촬영지라고 한다. 근처에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과 카페가 수두룩 한데 함께 즐길 사람이 없으니 아쉬울 따름이다. 누군가 함께 지금 내가 느끼는 감상을 이야기하고이런 분위기에서 커피 혹은 와인 한 잔 함께 홀짝 거릴 사람이 없다는 건 혼자 다니는 여행의 치명적인 단점이다.
누가 옆에 있지 않아도 그러고 싶으면 혼자라도 바에 들어가 분위기를 즐기고 그러다 옆사람들과 자연스레 스몰토크는 성격상 힘든 일은 아니니 얼마나 다행인가. 계절도 계절이고 바르셀로나의 마지막 밤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는지 바르셀로나 고딕지구의 쓸쓸함이 그렇게 싫지 많은 않았다. 관광객이 많이 찾는 시즌이 아니다 보니 주민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동네 마실을 나온 분위기가 느껴져서 좋았다. 한 번쯤 바르셀로나에서 살아보는 건 어떨까 싶은 생각이 스쳤다.
산 필립 네리 광장은 무고하게 사람들을 학살한 역사적 장소이자 영화 <향수>의 촬영지기도 하다.
이젠 숙소로 가야겠다 싶어 큰길로 나가려고 어느 골목으로 접어들었는데 엄청난 것이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타일 벽화 너무 가까이 지나가고 있어서 어떤 남자가 사진을 찍고 있는 걸 보고도 뭔지 몰랐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하나, 하나의 타일인데 멀리스 보면 두 사람이 진한 딥키스를 나누는 장면의 벽화였다.
'키스의 벽'이라는 제목의 이 타일 벽화는 2014년에 바르셀로나 출신 사진작가이자 화가인 조안 폰트쿠베르타(Joan Fontcuberta)가 만든 작품이다. 정식명칭은 '자유의 키스(El Mundo Nace en Cada Beso)'로 작가는 세상은 각 키스에서 탄생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바르셀로나 시민들이 제출한 일상적인 순간들과 사랑 자유, 평화 등을 상징하는 이미지를 포함하고 있는데 바르셀로나의 다채롭고 개방적인 문화를 표현했단다.
가까이서 볼 때는 일상적인 장면이 담긴 평범한 타일이라 별생각이 없었는데 한 발 떨어져서 보니 뜨거운 키스장면이어서 깜짝 놀랐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누구라도 기념사진을 찍지 않고는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이미지였다. 과연, 우리나라에 이런 타일 벽화가 설치될 수 있을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보면 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환한 웃음이다.
지도가 없으니 어디에서 내가 이 벽화를 봤는지 나중에 숙소에 와서 한참 동안이나 검색을 했다.고딕지구의 Plaza d'Isidre Nonell였고 후기를 찾아보니 워낙 작은 골목들 사이에 있어 부러 찾아가도 골목을 좀 헤맨다는데 이번에도 운이 좋았다.
고딕지구 키스의 벽
키스의 벽을 마지막으로 대로변으로 나오니 이미 날은 어둑어둑해졌다. 몇 가지 타파즈로 간단히 저녁을 먹고 숙소까지 걷는 길, 크리스마스 준비를 끝낸 바르셀로나의 화려한 밤이 발길을 붙잡는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바르셀로나도 다시 올 것 같은 예감이 스친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바르셀로나 거리
이제 모든 여행은 끝이 났고 나는 다시 몰타로 돌아간다. 엄밀히 따지면 여행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몰타에서 약 한 달간의 일정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셀로나가 여행의 끝이란 생각을 했으니 이제 몰타는 내게 더 이상 여행지가 아니었다.
몰타로 돌아간다 생각하니 한국만큼이나 절로 마음이 편해졌다. 12월의 몰타는 어떤 표정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