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유나 Jun 20. 2016

직장인은 가슴에 사표를 품고 산다

강해서 버티는 게 아니라 버텨야 해서 버티는 삶

벚꽃이 지면, 일 년 다 가는거다_라는 농담 아닌 농담을 회사 근처 벚꽃길을 산책하며 동기들에게 했었더랬는데, 벚꽃이 지고 유월이 되었다. 2016년 상반기가 그렇게 지나왔고 어느덧 끝나가고 있다. 더워도 너무 더운 거 아니니 싶은 계절이 지나면 언제 더웠냐는 듯 선선한 바람이 불어올 테고 (현실과는 상관없는 그래서 의미 없는) 2017년 경영계획을 세운다고 또 푸닥거리가 시작되겠지. 직장인으로서의 한 해는 너무나도 단조롭게 정리된다. 그래서일까 1년, 2년, 3년 어느덧 5년 반이 지나갔다는게 믿어지지가 않는다. 열 손가락 훨씬 넘게 있었던 사업부 본사 동기들이 이제 다섯 손가락만큼 남았다는 것과 사원 나부랭이에서 대리 나부랭이가 되었다는 사실 정도가 월급에 중독되어 살아온 시간이 꽤 되었다는 걸 실감하게 한다.


팀장님한테 크게 혼난 날이면 내 스스로에게 화가 나서 울며불며 밤을 지새우기도 했던 신입사원 시절을 견뎌내고 만으로 꽉 채우고도 넘치게 5년을 버텨온 가장 큰 원동력은 "월급"이다. 자아실현 따위_ 인적 자원은 기계 부속품과 다를 바 없는 대한민국 대기업에서 되도 않는 얘기고. (직장인의 끝판왕이 되어 별로 환생하는 것이 자아실현인 경우는 제외하고) 돈을 벌어야만 하는 절실함이 있느냐 없느냐가 버텨내느냐 마느냐를 결정한다.


입사한지 5개월 만에 아빠가 운영하던 회사가 부도가 났고, 그 후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는 우리 가족의 생활비를 책임져야 했다. 문장으로 쓰고 나니 참 심플하다. 그 과정을 겪어내기란 결코 심플하지 않았지만. 이제 아빠도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고 집에 드리는 생활비도 내가 먹고 자는데 들어가는 돈보다 적지만 불쑥불쑥 튀어 오르는 퇴사 의지를 실행하지 못하는 건 "월급 없는 삶"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아마도.


회사를 그만두면 또 다른 회사를 다니는 건 싫고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는 나는_ 그래서 이직을 열심히 준비해 본 적은 없고 3/6/9 법칙에 따라 퇴사 욕구가 활활 타오르던 만 3.5 년차 때 지금 몸담고 있는 사업부로부터 제안을 받아서 옮겨왔는데, 확실히 3/6/9 보다는 1/3/5/7/9 법칙이 맞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잠잠하던 퇴사 욕구가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이 시점에 또 다른 사업부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와서 일 해 볼 생각 없냐고. 하지만 이번에는 현 사업부 사장한테까지는 얘기도 못 해보고 팀장 선에서 Cut_당하고 말았다. 옮겨온지 아직 2년이 채 안되었으니 약간 이르긴 하지만 기회가 언제 또 올지 모르는 건데 내 의견은 들어보지도 않고 Cut_해버렸다는 데 격분하여 당당하게 (솔직히 호전적으로) 팀장에게 면담까지 신청했으나 결론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결국 나에 대한 인사권은 내가 가진 것이 아니므로. (물론, 내 스스로 발동할 수 있는 유일한 인사권_ 퇴사라는 선택이 있긴 하지만)


퇴사카드를 던져볼까 며칠 간 곰곰이 생각해봤으나, 일단 한 꺼풀 접는 걸로 마음을 바꿨다. 매일 아저녁 서울대입구-낙성대-사당-방배-서초 구간 지옥의 2호선에 몸을 구겨 넣으면서 생각한다. 다들 왜 이러고 사는 걸까. 왜 이러고 살아야 되는 걸까. 그리고,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구나. 현실의 문제는 무겁 무섭다. 회사를 그만두면 최소 3개월 아니 6개월쯤은 실컷 여행 다니고 돌아와서 서울 말고 시골에서 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 희망사항으로 남겨두고 직장인으로서의 나를 아직 놓지 못하고 있는 건, 그 무겁고도 무서운 현실의 문제들 때문이다.


예전보다는 훨씬 괜찮아졌지만 급할 때는 아직 내 도움이 필요한 집안 사정도 그렇고, 동생은 아직 취업 준비 중이고, 아니 어쩌 (더럽고 치사한 한 달을 버텨내고 받는) 월급 덕분에 내 몫은 오롯이 감당해 낼 수 있는 지금의 과 그로부터 수반되는 주변의 시선을 나 스스로도 포기하지 못하는게 진짜 이유인지도 모른다. "월급 있는 삶"이라서 가능한 모든 것들은 not직장인의 삶을 아직 실행하지 못하는 핑계이자 이유다.


그래서 또 한 타임, 나는 버텨보기로 했다. 직장인으로서의 삶에 조금 덜 집중하고 나 자신으로서의 삶에 조금 더 집중하면서 이 한 타임을 또 버텨내보기로 했다. 글을 더 열심히 쓸거고 더 틈틈이 자주 여행을 다닐거다. 3개월만 등록한 운동은 3개월 더 연장해서 등록하고 미루기만 했던 운전면허도 올 해 안에는 꼭 따야겠다.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사표를 내던지고 새로운 길을 찾는 삶도 한 번 더 참고 버텨내는 삶도 모두 맞다. 결국 인생은 각자의 것이므로 지금에 최선을 다하는 모두의 인생은 정답이다. 그래서, 희망사항 하나 아직은 가슴 한켠에 품고, 강해서 버티는게 아니라 버텨야 해서 버티는 삶을 좀 더 살아내보기로 했다. 당분간은.


매거진의 이전글 Not 때문에 But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