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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꽃 Jan 18. 2024

고1 때 캐나다로 이민 가 눈물 쏟은 이야기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될 때쯤, 우리 가족은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 한국에 살면서 전학 한번 가본 적 없었는데, 국내 전학도 아닌 캐나다라니, 설렘과 두려움이 한꺼번에 찾아와 심장이 두근거렸다. 나는 영어학원 한번 다녀본 적 없고, 성적도 그다지 높지 않은 정말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런 내가 거기 가서 고등학교 공부를 어떻게 따라갈 수 있을지 상상 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만 하는 시간은 찾아오고야 말았다. 


새로 들어간 학교에 한국인은 나와 언니뿐이었다. 나의 한국 이름은 외국인들에게 발음이 어려우니 영어 이름을 정하고 싶었는데, 자기소개할 때 발음하기 어려운 f, r, l, v, w 등이 들어간 이름은 빼고 찾았다. 그렇게 안착한 이름이 제니 (Jenny)였다. 나중에 남편을 만나고 알았다. 제니라는 이름이 제니퍼 (Jennifer)를 친근하게 줄여서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말이다. 


대학생인 된 후론, 어려 보이는 이름인 제니에서 뭔가 좀 더 어른스러운 느낌인 제니퍼로 바꿨다. 더 이상 f와 r 발음이 두렵지 않게 되었을 무렵이었다. 사실 캐나다에 살면서 종종 친한 척 이름을 줄여 부르는 현상을 목격하긴 했는데, 내 이름도 그런 거라 차마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제니를 줄여서 젠 (Jen)이라고 불러도 되냐고 물어오는 경우도 있었는데 말이다. 그렇지만 그게 결국 제니퍼에서 파생된 거라고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엘리자베스 (Elizabeth)는 리즈 (Liz) 또는 엘리 (Ellie)라고도 하고, 윌리엄 (William) 은 빌 (Bill)로, 제임스 (James)는 짐 (Jim), 로버츠 (Robert)는 밥 (Bob)으로 줄여 부른다. 나는 여전히 외국 이름에 약하다. 상대방의 이름을 잘 사용하지 않을 경우, 또는 상대방이 내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워 잘 안 불러 줄 경우, 친구 사귀는 것에 핸디캡이 생기는데 안 그래도 언어의 장벽이 있는 나에겐 더욱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시작한 고등학교에선 영어만 기초반에서 따로 듣고 나머지 과목들은 정규 수업을 받았다. 10학년 그러니깐 고등학교 1학년 과정의 과학반에서 첫 시련이 찾아왔다. 선생님은 학생들 자유로 그룹을 만들어 그룹과제를 제출하라고 했다. 한 반에 20명 넘게 있었던가, 왜 남겨졌는지 나로선 이유를 잘 모르겠는 외국인 아이 한 명과 나만 그룹을 만들지 못했다. 결국 선생님이 숫자가 부족한 어느 그룹에 강제로 나를 보내주셨다. 


그때의 민망함이란, 안 좋은 기억은 최대한 빨리 지워버리려 노력하는 나에게도 아직까지  어렴풋한 상처로 남아있다. 영어로 자기 생각을 정확히 설명할 수준이 전혀 되어있지 않은 나는 그 그룹에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다. 아이들이 대놓고 놀리거나 왕따를 한 건 아니었다. 매너가 몸에 밴 캐나다 학생들은 오히려 친절한 편이었다 생각하지만, 어쨌든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란 건 확실했다. 


캐나다에서 보낸 첫 학기에서 친구를 사귀진 못했지만 과학 선생님께 받은 위로는 아직도 생각난다. 리포트를 재 시간에 제출하지 못하고 선생님께 며칠 시간을 더 달라고 했다. 그때 선생님은 괴로워하는 나를 보며 “넌 정말 잘하고 있고  참 대단하다고 생각해. 내가 한국에 가서 한국어로 공부하라고 했다면 지금 너만큼도 하지 못했을 거야. 그러니 너무 속상해하지 말고 힘내!”라고 말하며 나를 펑펑 울렸다. 그때가 내가 학교생활을 하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울어본 날이었다. 


이민 가자마자 마주했던 고등학교 시절, 친구 사귀기보단 수업 따라가기에 더 급급했던 시간을 지나오고 보니 깨달은 것이 있다. 바로 어느 시절이든지 친구가 잠시 없다 해도 괜찮고, 그리고 무엇보다 친구가 꼭 내 또래 일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영어 실력이 부족해 좌절하던 나를 위로해 줬던 과학 선생님도 의지가 되는 친구였고, 고등학교 다니면서 아르바이트 많이 한다며 기특해하시던 사장님들도 든든한 친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몇 명의 지난 남자친구들도 나에겐 소중한 친구였고 남편은 결혼 전에도 후에도 하나밖에 없는 베스트 프렌드이다. 살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 중,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배운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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