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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태현 May 22. 2018

산모퉁이 돌고 돌아

소백산자락길4,5: 가리점마을옛길~황금구만량길

   단양 IC부근 4자락 시작점에 도착한 시각이 오후 4시쯤이었다. 스무 날 남짓 우리 집에 계시던 어머님을 안산 형님 댁에 모셔다 드리고 출발한 탓에 일정이 늦어졌다. 단양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택시를 탈 수 밖에 없었다. 해가 길어졌다고 하나 세 시간 정도 걸으면 어둑해질 것이었다. 근래 보기 드물게 하늘은 맑고 그 맑은 날씨가 며칠 이어진다니 호젓한 길들이 내 몸을 휘감아 도는 걸 어쩌지 못하고 다시 소백산 자락길 위에 선 것이다.  

  오르막길을 오르다가 키 큰 미루나무 몇 그루를 만났다. 우뚝 서 있었다. 마치 파란 물감을 찍어서 하늘에다 바르고 있는 커다란 붓 같았다. 그 모습이 좋아서 몇 번이고 앵글에 담았다. ‘미루’라는 이름이 아름다웠다. ‘미루’라고 불러보니 입술이 동그랗게 모아져서 사랑하는 사람을 부르는 말 같고, 그리워도 만날 수 없는 애틋함이 느껴졌다. 마르고 키가 큰 때문인지, 아니면 쉴 새 없이 팔랑거리는 이파리들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한없이 굽어보고 있는 그윽한 눈망울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럴 일은 없지만 내가 아이를 한 명 더 가질 수 있다면 ‘미루’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다. 혹여 노후에 개나 고양이를 키우게 된다면 그의 이름은 분명 ‘미루’일 것이다.    

  한동안 미루나무를 올려다보고 있자니 옛날 신작로 길이 떠올랐다. 동무들과 멱 감으러 갈 때마다 미루나무가 양쪽으로 도열해 서 있는 신작로 길을 걸어서 갔다. 입술이 파래지도록 멱을 감고 오다 다시 뜨거워진 머리를 식히던 곳도 미루나무 아래였다. 가끔은 그곳에서 뜨거운 돌을 주워 귀에 들어간 물을 빼거나 파란 하늘에 떠가는 흰 구름을 바라보며 아버지가 살고 있다는 도시를 상상하곤 했었다. 고등학교 때 구례에서 하동까지 무전여행을 하던 길도 미루나무가 있던 길이었다. 아무 뜻도, 아무 계획도 없이 걷고 걸으면서 뜨거운 몸과 마음을 식히곤 했던 곳이 바로 미루나무 그늘이었다. 그래선지 미루나무는 항상 길과 함께 떠오르고 ‘미루’라는 이름도 사랑하는 사람처럼 애틋하게 불러보고 싶은 것이다.  


  길을 걸으면 옛일이 우연히 떠오른다. 슬펐던 일, 기뻤던 일, 평소 잊고 살았던 것들이 빗장 풀린 것처럼 다가온다. 주변에서 늘 보던 소소한 것들, 그러니까 돌멩이 하나, 풀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가 매개가 되어 옛일들을 불러 모은다. 호젓한 길 위에서는 그 마주침이 각별하여 기억의 숨소리까지 다 들리는 듯하다. 당동리에서 마조리로 이어지는 이 옛길도 옛날 단양사람들이 죽령을 넘어 풍기장을 보러 다니던 길이라고 하니 얼마나 많은 애환이 서린 것인가. 나는 그 옛일을 생각하며 지금 내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간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강렬한 빛이 누그러들자 사선으로 비추는 오후의 빛이 좋았다. 나뭇잎들이 투명하게 빛나고 그림자들도 부드럽게 깊어지고 있었다. 고요한 실내처럼 소란스런 것이 없었다. 인적이 드물어 오로지 아내와 나의 둘 만의 길이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고 가는 길, 세상의 등짐을 다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걷는 길이었다. 종종 우리가 걸었던 길을 돌이켜 보면서 아내도 나도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동감한다. 몸이 허락하여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걷자고 다짐을 한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길들이 이미 우리 삶의 여정에 깊숙이 들어와 있음을 깨닫는다. 고마운 일이고 기꺼운 일이다.    

  5월의 길섶에 핀 찔레꽃은 산등성이가 훤하도록 핀 아카시아 꽃보다 향기가 더 짙다. 멀리 퍼져나가는 향기가 아니라 깊이 배어드는 향기다. 소리꾼 장사익 선생의 애절한 곡조가 절로 흘러나오는 향기다.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 놓아 울었지.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밤새워 울었지.’     

  나는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산중에 있던 당숙네 집에 심부름을 가던 시오리길이 생각난다. 달빛 아래 찔레꽃이 하얗게 피어 있던 길, 이슬을 머금은 듯이 유난히 향기가 짙던 그 길, 누님의 흰 고무신 코도 하얗게 반짝이던 그길. 찔레꽃을 볼 때마다 그렇게 누님과 함께 걷던 시오리길이 생각나는 것이다.    

  두 시간 남짓 구불거리는 임도를 걸어 마조리 가리점옛마을에 도착했다. 며칠 전 비가 온 탓인지 개울물이 시원스럽게 흘렀다. 사람 구경은 할 수 없었으나 사람 사는 온기가 느껴졌다. 마을 입구에 키 큰 소나무 한 쌍과 옛 모습을 간직한 서낭당이 있었다. 예전에 마을에서 나무를 갈아 함지 등을 많이 만들었다고 하여 갈마(磨)자에 지을 조(造)자를 써서 ‘마조리’라는 마을명이 생겨났다고 했다. 이 마을도 살아남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흔적들이 여럿 있었다. 농작물 체험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관광객을 유치하거나 오미자나 오가피 등 특용 작물을 재배해서 수익을 올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 번 영주, 풍기를 지날 때는 온통 사과 밭이었는데 단양 쪽으로 접어들면서 사과나무를 거의 보지 못했다. 죽령을 사이에 두고 이렇게 다르다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날벌레들이 요란스럽게 비행을 하고 있었다. 수촌리를 거쳐 5자락 시작 구간인 기촌리까지 한참을 더 걸어야 하나 이미 저녁 일곱 시 에 가까웠다. 아쉽지만 단양 읍내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어서 세 시간 전에 불렀던 콜택시를 다시 불렀다. 하루에 두 번씩 필요해서 만나는 사람도 있었다.      

  한라산 올레길이나 지리산 둘레길을 걸을 때는 몰랐는데 소백산 자락길을 걷다보니 교통편이 불편했다. 매 자락길 끝 지점에 민박 같은 숙소도 없으려니와 대중교통이 여의치 않았다. 그런 불편을 감수하고 이 길을 끝까지 완주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긴 했지만 이른 아침을 먹고 다시 택시를 탔다. 기촌리, 황금구만량길이었다. 구만동의 황금설화를 간직한 곳으로 전형적인 산촌 마을이란다. 그러나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긴 두 고개를 넘어야 한단다. 고개란 무거운 다리를 옮기며 땀방울을 흘려야 닿는 곳이다. 마지막 보발재는 오늘의 목록에서 지우기로 했다. 거기서 단양으로 돌아오는 차편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틀 째 날씨가 좋았다. 근래 보기 드문 일이었다. 미세먼지 때문에 나들이도 제대로 못하게 된 것이 최근 몇 년 사이의 일이었다. 내 기억을 떠올려도 그렇다. 몇 년 전만 해도 둘레길을 걸으며 맑고 투명한 날씨에 얼마나 많은 감탄사를 연발했던가. 그러나 지금은 그런 날씨를 만나는 것이 행운에 속할 일이다. 오늘도 그런 행운 중의 하나였다. 뒤돌아보니 파란 하늘이 푸른 산을 포근히 감싸고 있다. 산들은 분명하고 또렷한 실선으로 제 윤곽을 그려내어 오롯이 서 있다. 돌아보며 또 돌아보며 고개를 올랐다.    

  이틀 째 숲길에서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소백산 자락길을 걷는 이가 드물다는 얘기였다. 이어지고 이어지는 지루한 길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백산에 왔으면 연화봉이나 비로봉 정상을 찍고 내려와야 산행을 한 보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걷고 걷는다.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혼자 생각에 잠기다가, 풍경에 취하다가, 넋이 나간 듯이 걷다가 다시 힘들게 걷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여전히 걷는다는 것 말고는 어떤 의미도 찾지 않는다. 풍경에다 대고 투망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찌를 드리우고 입질을 기다리며 앉아 있는 낚시꾼과 다를 바 없다. 문득 입질처럼 스쳐 지나가는 바람결에 우주의 티끌이면서 지상의 유일한 존재인 나를 돌아보게 된다.     

 

 호젓하다 못해 잠깐씩 두려움이 드는 산길만 걷다 마을을 만나면 친척을 만난 것처럼 반갑다. 대대리에 이르러 밭일 하는 사람도 보고 개 짖는 소리를 들으며 이상하게 힘이 났다. 길은 다시 이곳을 벗어나 산길로 이어지겠으나 마을에서 걸음이 더 느려졌다. 담장 너머 살림을 기웃거리고 사람들의 행색을 살피고 마을의 풍수도 짐작하면서 즐거워지는 것이다. 대대리는 큰 도로와 국망천을 끼고 있어 제법 큰 마을이었다. 전원주택들도 많이 지어지고 들판도 넓어서 대략 사는 모습들이 그려졌다. 잘 살면 잘 사는 대로 못 살면 못사는 대로 살아가는 게 삶이다. 이 외진 시골 마을에다 식당을 내고 손님 몇 받으면서 성심껏 살아가는 것 또한 얼마나 값지고 숭고한 삶인가.    

  참으로 오랜만에 노래를 다 불렀다. 노래를 불렀다기보다 소리를 질렀다고 하는 편이 맞을 성 싶다. 소백산 영봉들이 바라다 보이는 전망 좋은 고개 마루였다.     

  ‘산모퉁이 바로 돌아 송학사 있거늘 무얼 그리 갈래갈래 깊은 산 속 헤매나. 밤벌레의 울음 계곡 별빛 곱게 내려앉나니 그리운 맘 님에게로 어서 달려가 보세.’     

  아내가 배시시 웃었다. 형편없다는 것인지 아니면 들을 만 했다는 것인지 모르지만 나는 후자 쪽이라 믿고 아재 개그까지 덧붙였다.

  “여보, 새들이 어디서 저런 가수가 오셨나 하고 깜짝 놀랐겠지? 아마 새들이 자기들 노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좌절하고 있을 거야.” 아내의 입 꼬리가 더 올라갔다.      


  구만동에 이르기 전 고개 마루에 주택 한 채가 들어서고 있었다. 노란 집이었다. 규모로 보아서 살림집은 아닐 성 싶었다. 노란 색 때문에 오래도록 눈에 띄었다. 어떤 이가 저런 곳에서 도를 닦듯 살려고 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이런 길을 걸으면서 정말 외진 곳에 집한 채 짓고 사는 사람들을 자주 봤지만 내가 경험해보지 않은 일이라 그 속내가 정말 궁금한 것이다. 외로움도 익숙해지는 것인지, 그렇다면 외로움 다음에 오는 감정은 어떤 것인지. 사실 나는 외로움이 두렵다. 사람에게서 잊혀지는 것도 두렵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고 하나 그 섬마저도 없는 산중생활이 과연 어떤 것일까. ‘밤벌레의 울음 계곡 별빛 곱게 내려 앉아 그리운 맘이 님에게로 달려가’ 본들 아무도 알 수 없는 그 마음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럼에도 그렇게 살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니 참으로 삶은 불가사의 할 뿐이다.    

  보발리 분교장에 도착하니 12시경이었다. 버스 시간까지는 대략 2시간 가까이 기다려야 했다. 두 시간 동안 시골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려야 하나, 콜택시를 불러야 하나, 한동안 망설이고 있었는데 차 한 대가 가다 멈춰 후진을 했다. 단양에 나간다고 했더니 태워주시겠단다. 아무 연고도 없는 보발리에 귀촌해서 4년 째 혼자 살고 있는 분이란다. 묻지 않아도 이것저것 귀촌에 도움 되는 말씀을 하시며 한 마디로 만족스런 삶이란다. 나는 마음만 있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그 외로움이 좋아죽겠다는 사람을 다시 만나니 정말 그 삶이 궁금해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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