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두일 May 11. 2018

한반도 평화와 중국의 입장

중국의 권력투쟁과 북한


현재 한반도의 평화를 만들어가는 북한의 비핵화 과정에서 중국은 빠져 있다. 트럼프 취임 초기만 하더라도 김정은과 트위터 설전을 벌이면서 당장 전쟁을 벌일 것만 같았던 미국의 강경한 입장이 지금 정반대로 바뀐 부분은 많은 정황과 합리적인 분석이 보이는데 반대로 미국만큼이나 한반도 문제에 관심과 지분을 가지고 있는 중국이 이 이슈에서 소외당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분석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부족하지만 내가 이 주제로 글을 써 본다. 글 쓰기 전에 늘 하는 말이지만 나는 외교도 모르고, 북한 전문가도 아니고, 국제정세에 해박한 지식인이나 저널리스트가 아닌 그냥 중국에서 사업하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관점에서 재미 삼아 보기를 바란다. ^^


1.
2012년 8월, 북한의 2인자였던 장성택은 중국을 방문해서 후진타오에게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을 북한의 최고 지도자로 올리고 싶다’고 의향(사실상의 도움 요청)을 밝혔다. 장성택과 김정남은 북한 내 대표적인 친중파였고 장쩌민-후진타오로 이어지는 당시 중국 지도부는 친중파인 김정남과 장성택이 북한을 지배하면서 중국의 국익을 따르는 노선에 부합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김정남은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되지 못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스스로 자기관리에 완전히 실패했고 그로 인하여 장자임에도 아버지인 김정일과 군부의 지지를 못 받았고 여기에 가장 큰 후견인인 중국이 '제대로 된 지원을 해 줄 수 없었다'는 점도 적지 않은 이유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당시 중국은 북한의 권력교체에 신경 쓸 여유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2.
2011년 12월 사망한 김정일로 인해 2012년의 북한은 그야말로 혼란과 암중 권력 쟁투가 한참이었는데 때마침 비슷한 시기인 2012년 2월 중국도 양회(전인대)가 있었고 그 해의 양회는 후진타오가 임기를 마치고 새로운 후임 국가주석을 선발해야 하는 중요한 (그러면서도) 혼란스러운 격동의 시기였다.


그런데 불과 한 달 전 측근 왕리쥔의 미국 망명사건 시도로 중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권력을 향한 야심가 보시라이가 예상을 깨고 양회에 참석을 했고, 심지어 국가 지도부를 향한 큰 도발을 했다. 사실 보시라이 입장에서도 왕리쥔 망명사건 이후 ‘이대로 밀리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과감하게 정면돌파를 시도한 것인데 그 배경에는 사법권과 경찰권(공안)을 쥐고 있는 저우융캉이 보시라이 쪽에 섰기 때문이다. 그 저우융캉 뒤에는 장쩌민이 있었다.


3.
후진타오, 원자바오, 시진핑 등 당시 권력실세도 그것을 막기 위해 필사적이었는데 사실상 은퇴한 장쩌민에 비해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이 제한적이었던 그들은 저우융캉의 후원을 받은 과격한 보시라이가 권력을 잡으면 ‘퇴임 이후가 보장이 되지 않는다’는 절박함이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양회가 끝나기도 전에 원자바오는 보시라이의 실각을 발표했다. 유래 없이 신속한 행동이었고 그 기간 중 다른 상무위원들을 설득하기 위한 작업은 그 어느 때 보다 치열했다.


하지만 태상황 장쩌민과 사법권과 경찰권을 쥐고 있는 저우융캉은 상대적으로 느긋했고, 그 이유는 상호 간의 반목이 있던 태자당과 공청단의 반대파가 이렇게 신속하게 뭉쳐서 움직일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로 인하여 이른바 상하이방 몰락의 전조가 되었다.


4.

하지만 당시 무려 인민해방군보다도 많은 예산을 배정받았던 150만 경찰 공안을 사실상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던 저우융캉이 그냥 앉아서 몰락을 기다릴 수는 없었으니 (중국 언론에서는 절대 나오지 않는 내용이지만) 보시라이 실각이 발표된 직후 베이징에서는 쿠데타가 발생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른바 3.19 사변이다. 지금은 모두 삭제된 당시의 웨이보 등에 일반 시민들이 베이징 내에서 병력의 이동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들을 올리면서 불안해했다. 중국의 권력자들이 모여 산다는 중남해쪽으로의 이동 사진이었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쿠데타에 준한 시도는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저우융캉이 지휘하는 경찰과 후진타오가 지휘하는 인민해방군이 대치하는 모습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결과는 보시라이-저우융캉-장쩌민의 몰락으로 이어졌고 이후 시진핑의 시대가 열렸다.


5. 
다시 1번으로 돌아가 장성택이 후진타오를 면담하면서 ‘김정남을 북한의 최고 국가지도자로 삼고 싶다’는 제안은 중국 역시 상기에 언급한 국가권력의 교체기로 대단히 혼란한 상황이라 별로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그리고 당시의 중국 지도자들은 항일전쟁과 중국 내전을 북한의 도움을 받아가며 함께 했던 ‘김일성-마오쩌뚱 시대’를 기억하는 이들이 거의 없었기에 과거와 같은 ‘정치 경제적으로 독보적으로 친근한 우방관계’라고 볼 수 없는 그냥 미국을 견제하기 위한 ‘군사적 동맹관계 수준’으로 낮게 평가했다.


그런데 하필 후진타오와 장성택의 이 대화 내용을 저우융캉의 수하가 도청을 했고, 그 내용은 고스란히 김정은에게 전달이 되어 버렸다. (일본 NHK의 보도 내용임) 저우융캉 입장에서는 당시 보시라이를 날리고 자신에 대한 부패 수사가 옥죄어 오는 마당이니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입장이었고, 때문에 정보를 대가로 북한의 새로운 권력자가 자신의 구명운동을 벌여주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6.
아버지 시대에 국가 2인자이자 사적으로는 고모부이고, 북한의 최대 우방국인 중국의 최고위층 지도부와 가까운 장성택을 왜 그렇게 신속하게 처형했는지, 또한 권력에서 멀어진 타락한 장남 김정남이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암살당했는지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아울러 김정은 입장에서는 처형시킨 장성택과 더불어 자신의 실각을 논의했다는 것만으로도 당연히 중국을 좋아할 수 없을 것이다.


7.
최근 중국을 방문하기는 했지만 김정은은 국가지도자 취임을 하고도 오랜 기간 중국을 방문하지 않았다. 이는 중국과 북한의 전통적인 관계상 쉽지 않은 일이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그 이유를 ‘의전 문제’라고 이야기했는데 나는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고 생각한다.


분명 김정은은 중국 방문을 하는 데 있어 일반적인 국가지도자 이상의 특별한 대우를 요구했고 시진핑은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과거 김일성이나 김정일이 중국을 방문하면 마오쩌뚱과 덩샤오핑은 기차역까지 마중을 나갔고 김정은은 그것을 근거로 아주 특별한 우방국의 의전을 요구했던 것인데 시진핑 입장에서는 선대에 함께 못살던 시절 친하게 지냈다고 지금 국력에서 비교도 되지 않고 (자신들의 보호가 아니면) 당장 미국에 의해 정권이 붕괴될 (심지어 나이도 어린 애송이) 지도자 김정은이 '터무니없는 요구를 한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김정은은 그래서 자신이 '중국을 굳이 방문하지 않아도 되는 핑계를 만들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자신의 실각을 논의했던 중국에 찾아가서 인사를 하는 것이 싫은 것은 당연한 인지상정이다. 또한 미국 때문에 중국의 보호가 필요해서 어쩔 수 없이 붙어 있기는 하지만 중국은 언제든지 자신도 날릴 수 있다는 불안감이 존재했을 것이다.


8.
중국 입장에서 북한이 계륵인 또 다른 이유는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나라도 이웃나라가 ‘핵 보유국’이라는 것이 싫다. 핵 보유는 강대국만이 해야 한다는 논리인데 이는 중국에서도 어김없이 통용되는 논리이다.


중국 입장에서는 (그들 생각에) 라이벌이자 끔찍하게 싫은 미국과 그들의 관리를 받는 북한이 설전을 벌이는 와중에 자신들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미국의 위협을 비웃으며 핵을 개발하는 북한이 일견 통쾌 하지만 그 핵이 유사시에 ‘우리에게 겨눠질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대단한 위험 요소이다. 이건 찬성할 수도 없고, 반대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애매한 상황이다.


때문에 중국은 ‘북한의 핵 개발은 반대하지만 미국의 강압적인 북한 제재에도 반대한다’는 앞뒤가 맞지 않는 입장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점점 북한에 대한 주도권을 잃어갈 수밖에 없었다. 내 개인적인 관측은 사실은 이 또한 김정은이 의도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다.


9.
아울러 시진핑 시대 중국은 여전히 혼란한 국내 정치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시진핑은 더 이상 권력을 나누기보다 독점하기를 원하고 있고, 그 일환으로 공산당 내에 권력을 나눠서 상호 견제하던 (덩샤오핑 시대에 만들어진) 과거의 시스템을 하나씩 부숴 나가고 있는 중이다.


삼두정치의 한 축이던 상하이방은 사실상 몰락했고, 평민들 등용의 축이었던 공청단마저 급속도로 세력이 약해지고 있다. 1인자인 국가주석이 외치(외교)를 담당하고 2인자인 총리가 내치(경제)를 담당하는 관례를 깨고 사실상 권력을 독점하고자 하는데 이를 위해 68세가 넘어가면 상무위원직에서 은퇴하고 원로로 물러나야 할 왕치산을 사실상 2인자인 부주석으로 끌고 오는 무리수까지 두고 있어 여전히 정적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다.


때문에 시진핑은 ‘부패청산’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충성을 맹세하지 않은 관료들을 지금도 쳐내고 있고, 그 결과 중앙정부는 사실상 평정되었고, 이제 그 전선을 지방정부로 옮겨가는 중이다. (정작 시진핑의 형제는 2남 2녀인데 시진핑을 제외하고 모두 해외 국적을 가지고 있다. 파나마 스캔들이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10.
시진핑이 이러한 본인의 영구적이면서 독점적인 집권을 위한 국내 정치의 초석을 다지는 동안 이웃국가이자 오래된 우방 북한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아니, 사실 관심을 쏟을 여유가 별로 없었다.

여기에 시진핑은 '미국과 맞상대를 할 정도로 컸다'라고 생각해서인지 ‘일대일로’ 같은 바둑으로 치면 큰 그림 그리는 포석에만 심취해 있었고, 그 결과 북한과 같은 중요한 사활 싸움에 진 것이 아닐까도 싶다.


11.
종합해보면 문재인 정부는 현재 외교적으로 더할 나위가 없이 너무 잘하고 있다. 박수를 보내고 응원을 한다.

하지만 만약에 미국의 대통령이 트럼프가 아닌 힐러리가 되었다면, 중국이 북한 문제를 과거처럼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라면, 김정은이 전대에 그랬던 것처럼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면,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 논의는 외부적인 문제로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모두가 우려했던 트럼프가 한반도의 비핵화 문제에 이렇듯 전향적으로 나오게 된 부분이나 중국이 국내 정치 문제로 북한에 대한 관심을 놓치게 된 부분이나 김정은이 친중파 장성택으로 인해 개인적으로 중국을 싫어하게 된 부분은 ‘하늘이 돕고 있다’는 말 외에는 적당한 말이 떠 오르지 않을 정도이다. 그야말로 ‘모사재인謀事在人) 성사재천(成事在天)’이라는 말처럼 말이다.


12.
물론 성사재천(成事在天)을 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인간이 할 수 있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래야 하늘도 인간의 갸륵한 일을 챙겨주는 법이다.


그래서 나는 한반도 평화를 위해 지금도 불철주야 노력하는 현 정부를 지지하고, 이 정부를 탄생시킨 시민들의 촛불 혁명도 자랑스럽게 여긴다. 나도 거기에 참여했으니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중국과 북한의 관계 변천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