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히 굳어 있는 현실의 질감, 피라미드의 밑변에서 오르지 못한 채 버티는 몸의 기억.
그 밑변에서 “삶의 축복”을 말하자면 비웃음이 되고 모순이 된다. 대중창작 시대, 그리고 AI가 열어젖힌 새로운 제작 환경에서 경험은 더 이상 사소한 개인의 메모가 아니라, 개인의 자산이 된다 .
공동체를 움직이는 서사적 연료가 될 수 있다 .
OTT와 유튜브가 만든 추태의 그늘을 걷어내고, ‘없음과 가난’의 로컬적 삶을 축복이라 말할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종종 성공의 스펙터클을 정점에서 본다. 그러나 사회를 지탱하는 면적의 대부분은 밑변이다. 밑변의 삶은 보통 이렇게 언어화된다. “없다, 가난하다, 이름이 없다.” 이 결핍의 언어는 밑변을 설명하지만, 결코 해방하지 못한다. 축복을 말하기 어려운 까닭은, 축복이 곧 서열의 상층에서만 가능한 것처럼 배우고 훈련되어 왔기 때문이다.
밑변의 삶은 풍부한 경험의 보고(寶庫)이며, 그 경험이 서사로 변환될 때 비로소 축복은 증명된다.
그래서 수많은 창작자는 그들의 얼굴과 이름을 추상화시켜 그들을 조사하고 그들의 언어를 흉내낸다 .
그래서 '오징어게임'이 되고 '기생충'이 된다.
플랫폼은 유통을 좁은 지역에서 글로벌로 민주화했지만, 또 다른 그림자를 만들었다.
OTT와 유튜브는 알고리즘을 통해 주목을 배분하고, 주목은 다시 자본을 배분한다.
이 구조에서 로컬의 삶은 쉽게 틱톡과 유튜브로 파편으로 소비되거나, 개인적인 성과로만 환원된다.
그늘의 핵심은 두 가지다.
속도와 휘발: 빨리 보고 빨리 잊히는 구조. 추억은 남지만 공동체 기억은 남지 않는다.
글로벌 표준화된 정서: 보편적 웃음과 눈물의 패턴에 맞추려다 고유한 감각이 절삭된다.
로컬의 경험은 데이터로 흡수되어 ‘조회수’로 환원되고, 삶의 두께는 숫자 뒤에 숨어버린다.
그늘을 걷어내려면 기획의 주도권을 플랫폼에서 공동체로 이동시켜야 한다.
데이터는 풍부해졌지만, 맥락은 빈곤해졌다. 데이터가 말해주지 못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몸의 시간: 노인과 어린이의 얼굴과 표정,웃음
관계의 역사: 이웃 간 오랜 갈등과 화해의 배경.
장소의 정령: 마을 공터와 시장 골목의 소리, 냄새, 빛의 각도.
경험은 이 모든 것을 한데 묶어 서사로 만든다. AI는 데이터를 학습하지만,
서사의 뿌리는 경험의 사운드스케이프에 있다.
사운드스케이프는 한 개인 혹은 공동체가 살아가는 환경 속에서 들리는 모든 소리의 총체이다.
바람 소리, 장터의 웅성거림, 아이들의 웃음, 농기구의 흔들림, 새벽 닭 울음 같은 일상적 소리의 풍경을 의미한다.한 지역·한 세대의 사운드스케이프는 그들의 서사적 DNA를 형성한다.
따라서 AI 시대의 핵심 자산은 ‘빅데이터’가 아니라 거시사적인 경험이 아니라 아주 작은 일상의 경험이다.
AI 대중창작 시대는 기술이 창작의 문턱을 낮추고, 경험이 창작의 통화가 되는 시대다.
문법의 민주화: 촬영·편집·음향·시각효과의 기술 장벽이 낮아져 누구나 ‘장면이나 씬’을 구성할 수 있다.
경험의 자산화: 개인의 삶을 공동체와 공유 가능한 서사적 데이터로 변환한다.
집단 창작 프로토콜: 한 사람의 걸작이 아닌, 여러 사람의 에피소드가 이어 붙여지는 패치워크 드라마가 표준이 된다.
저항으로서의 형식: 표준화된 감정곡선을 거부하고, 로컬의 시간과 속도에 맞춘 느린 리듬을 복권한다.
틱톡·유튜브는 즉각성과 확장성을 준다. 그러나 경험을 파편화하고, 알고리즘의 목적에 맞게 정렬한다.
고유한 경험이 세계와 대화 가능한 서사언어로 번역된다.
AI대중창작시대의 모두는 이제 누구나 창작자 , 인문학자,수행자,철학자,여행가 일수 밖에 없다.
수행적 영화는 다큐가 아니라 극의 형식을 택한다. 그러나 그 극은 ‘연기’가 아니라 삶의 수행이자 관계의 리허설이다.
이때 감독의 역할은 프롬프트 작성자가이면서 경험 큐레이터다. 장소와 사람의 기억을 수집·편집해 서사적 데이터셋을 구축하고, AI에게는 “어떤 삶의 리듬을 따르라”는 윤리적·미학적 지시를 내린다.
예술은 정치의 외부가 아니다. 양극화는 서사의 독과점에서 시작된다. 소수의 목소리만 ‘보편’으로 승인받을 때, 다수의 삶은 밀려난다. 로컬 드라마는 이를 뒤집는다.
정치적 효과는
참여민주주의의 리허설: 공개 편집과 집단 토론은 지역 민주주의의 일상적 훈련.
관계복지의 실험: 촬영이 곧 네트워크를 만든다
경제의 재순환: 로컬 굿즈·마을 상영권 수익이 마을 내에서 돈의 체류 시간을 늘린다.
고령화는 위기가 아니라 느린 리듬의 복권이 될 수 있다.. 노인의 걸음과 말수가 로컬 드라마의 또 다른 미학적 부분이 될 때, 우리는 속도 중심의 시장 논리과 병행하며 , 삶의 끝이 아닌 삶의 축복을 말할 수 있다.
마을의 서사는 미래 세대에게 “어떻게 늙을 것인가”라는 매우 정치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마을 로컬 드라마는 세대 간 갈등이 아니라 세대 간 편집의 예술이 된다.
우리는 경험을 우선한다. 데이터는 경험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우리는 로컬을 중심에 둔다. 세계를 향한 창은 로컬의 방에서 열린다.
우리는 느리게 본다. 속도가 아니라 밀도가 장면을 만든다.
우리는 관계를 제작한다. 캐스팅은 만남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는 즉흥을 신뢰한다. 대사는 쓰이지 않고 태어난다.
우리는 공개 편집을 실행한다. 영화는 공동체의 합의로 다듬어진다.
우리는 플랫폼을 이용하되 종속되지 않는다.
우리는 마을의 리듬을 기준으로 삼는다. 느린 미학은 돌봄의 정치다.
우리는 실패를 아카이브한다. 실패는 다음 세대의 매뉴얼이다.
우리는 축복을 증명한다. 가난과 없음의 삶을 서사로 변환해, 마지막에 축복이라 말할 이유를 만든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실천들은
내일 아침, 시장에 간다. 장을 보고, 버스를 타고, 공터에 잠시 앉아 햇빛의 위치를 기록한다.
그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의 인사를 기억한다.
저녁에 메모를 정리해 에피소드 카드를 만든다.
주말에 이웃 두어 명과 식탁을 사이에 두고 부끄러운 리허설을 한다.
카메라는 늦게 등장하고, 컷은 적으며, 침묵은 길다.
어차피 삶은 고(苦)다. 그러나 그 관계와 창작, 소득과 만날 때, 우리는 비로소 말할 수 있다.
“이 삶은 축복이었다고.”
민초 예능+로컬 드라마는 그 한 문장을 증명하는 집단의 예술이며,
AI 대중창작 시대의 중심에서 피라미드의 그늘을 지워나가는 가장 구체적이고 가장 빠른 문화 혁명의 지름길이다.
내 삶과 경험이 지구의 우울과 양극화를 줄여 나갈 수 있다.
전세계 작은 마을마다 만개의 마을에서 만개의 영화들이 만들어지고 한국에서도 천개의 영화가 만들어 지는
가난한 삶이 창작이 되고 외로운 삶이 축복이 되게 하려는 영화는 너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