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영화는 다큐멘터리와 드라마가 하나가 되는 독특한 형식이다.
마을 사람들을 만나 라뽀를 형성하며 카메라를 들면, 동시에 취재와 촬영이 시작된다.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영감을 글로 정리할 새도 없이, 때로는 현장에서 즉흥적인 촬영이 이루어 지기도한다.
하지만 조급해할 이유는 없다. 그들은 이미 마을 안에 있으며, 삶 그 자체가 곧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성은 토착적 삶을 날것 그대로 반영하는 과정이다.
마을영화의 카메라는 처음에는 미리 짜여진 서사를 따라가지 않는다. 대신 주민들의 몸짓과 언어, 일상의 관계망 속에서 우연히 터져 나오는 장면들을 포착한다.
그것은 연출된 장면이 아니라, 삶 그 자체를 이야기의 구성점으로 삼으려는 순간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은 질문을 남긴다. 과연 카메라의 개입 속에서 '날것 그대로'라는 것이 가능할까?
카메라가 켜지는 순간부터 주민들의 행동은 변화한다. 자연스럽다고 여겨지는 일상도 관찰자의 시선 아래에서는 이미 연출된 것이 된다. 라고.
우리가 추구하는 다큐멘터리성은 실제로는 또 다른 형태의 허구일 수 있다는 의문에 동의한다.
하지만 항상 세풍에 바람 빠진 풍선 마냥 움츠리고 기죽은 얼굴만이 그들의 날것인가 ? 간혹 바람 넣은 풍선 마냥 흥에 겨워 숨겨진 즉흥의 본능을 카메라 앞에서 펼치는 것도 날것이 아닐 순 없을 것이다 .빵빵하게 기 세운 그 얼굴이 또 다른 다큐멘타리적일 수 있다. 우리는 기존의 영화나 다큐가 만든 지독한 편견에 빠져 있을 수 있음도 이해해야 한다 . 카메라가 없는 상태의 순수한 '날것'이 아니라, 카메라의 존재를 인지하면서도 자기 자신의 삶과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려는 표현이 중요하다.
전통적인 영화 제작에서 시나리오는 자본을 관리하고 효율성을 보장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였다.
그러나 마을영화에서 시나리오는 고정불변의 성서가 아니다. 오히려 주민들과의 만남 속에서 끊임없이 변하고, 확장되고, 유연해져야 한다.
사전 시나리오는 존재해서는 안된다 .마을을 지배하는 권위가 되고 자신감이 없는 이들을 더욱 주눅들게 할 뿐이다.
마을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즉흥과 영감이다. 감독뿐 아니라 주민들의 즉흥과 영감이다 .
그들이 꺼내는 기억과 경험 속에서, 새로운 장면은 예고 없이 탄생한다. 촬영은 곧 취재이며, 취재는 곧 연기가 되기도 한다. 주민들은 배우로서 연습된 대사를 외우는 대신, 자기 삶의 언어를 드러낸다.
그 순간은 다큐멘터리이면서 동시에 드라마다.
일부 장면은 차후에 다큐멘터리 소스가 되고, 또 다른 장면은 드라마의 한 컷이 된다. 촬영 당시에는 구분되지 않았던 순간들이 편집 과정에서 각각의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다.
시간이 가면서 아이템이 만들어 지고 시놉시스가 만들어 질 수 있지만 일정단계까지는 시나리오를 만들면 안된다 .그것은 주인공을 외부 감독이 선택하는 과정이 될 수도 있다.
촬영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윤리적 문제—주민들의 사생활 노출, 민감한 개인사 공개, 동의 없는 촬영—에 대한 기준과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이 문제의 답은 편집본 공개와 토론에서 나온다. 촬영본과 편집본은 수시로 주민들에게 공유되고, 편집실은 언제나 개방되어야 한다. 수시 상영과 토론을 통해 주민들은 편집 과정에서 의견을 제시하고, 작품의 방향과 장면 선택에 직접 참여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즉흥성과 윤리적 책임은 상호 보완되며, 수평적 협업으로서 실현된다. 천재란 열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을 한 사람이 독점하는 것이다 . 아홉 사람의 능력을 빼앗는 것이다 . 공동체는 한 사람의 천재 ,엘리뜨, 전문성이 아니라 열 사람이 만드는 천재의 모습이다 .집단창작의 유일한 통로이기도 하다 .상호 관계 속에서 새로운 서사를 발견하고 창조하는 역동적인 과정이야 말로 이 시대의 필요한 천재성이다 .
감독의 즉흥은 무계획이 아니라, 마을 주민들의 즉흥적 창의성을 끌어내기 위한 장치이다 .
여러 예술 분야가 이를 증명한다. 재즈의 임프로비제이션은 매번 다른 연주를 만들어내며,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은 순간의 직관 속에서 완성된다. 존 카사베츠나 켄 로치의 영화는 배우의 즉흥적 대사와 현장 반응으로 새로운 리얼리티를 창조한다. 시인들은 순간의 감각을 붙잡아 즉흥적으로 시를 써내려가며 감정의 날것을 남긴다.
마을영화의 즉흥도 이와 유사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재즈 연주자와 폴록, 카사베츠의 배우들은 전문적 훈련을 통해 즉흥성을 체화했다. 반면, 마을 주민들은 영화 제작 경험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카메라 앞에 선다. 그러나 비전문성이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진정성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들의 자연스러운 삶과 언어가 화면에 담기는 순간, 전문성과 다른 차원의 창작적 가치를 갖게 된다.
연기라는 것도 그렇다 . 자기 내의 다양한 감성과 시선을 경험하게 하는 휼륭한 수양의 도구이다 .
그 자기내 다양성을 개발하게 하는 학습인 것이다 . 생활기반형 연기를 할 수 있는 건 문화민주주의적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다. 소수의 전문가만이 향유하던 문화적 생산 권력을 주민들에게 되돌려주는 과정이며 이를 통해 주민들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기록하고 해석하는'인문문화적 주체'로 거듭나는 과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를 통해 정치 ,연예인 같은 중앙 미디어의 이슈밖에 없는 마을에서 새로운 이야기꺼리를 창출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관계의 예술인가, 권력의 은폐인가?
마을영화는 효율성을 최우선으로 해서는 안된다. 감독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라, 주민들과 함께 방황하는 동료다. "무엇을 찍을 것인가"보다 중요한 것은 "누가 자기 삶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다. 주민들은 단순한 배우가 아니라, 이야기를 스스로 끌어내는 창작 주체다.
마을영화의 관계적 가치는 편집 과정 공개와 토론에서 구체화된다. 수시 상영과 편집실 개방은 단순한 윤리적 안전장치가 아니라, 장르와 구성의 결정권을 주민과 공유하는 과정이다.
다큐멘터리와 드라마는 앵글과 컷에서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편집 과정에서 어떤 장면을 선택하느냐가 영화적 성격을 결정한다. 따라서 장르적 경계와 완성도, 그리고 진실성의 균형을 주민과 함께 논의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 과정은 단순히 권력 분산의 장치가 아니라, 관계의 예술이자 민주적 기록 실험이다.
즉흥과 영감은 이 과정을 지탱하는 동아줄이며, 다큐멘터리성은 그 동아줄을 주민의 삶에 단단히 묶어두는 매듭이다.
다큐멘터리는 현실을 기록하고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드라마는 허구적 서사를 통해 감정적 몰입을 추구한다. 마을영화는 두 장르의 성격을 동시에 가진다. 연출을 가미하면 다큐멘터리적 진실성이 훼손될 수 있고, 날것의 기록만 추구하면 드라마적 재미가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장르적 긴장은 바로 마을영화의 혁신적 언어가 된다. 즉흥적 장면, 주민 참여, 편집 공개와 토론이라는 수단을 통해, 완성도와 진실성의 딜레마를 창조적 긴장으로 전환할 수 있다.
마을영화는 실험적 형식이며, 여전히 많은 질문을 남긴다.
즉흥과 영감이 과연 영화 전체를 지탱할 만큼 견고할까?
편집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권력 구조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전문성과 아마추어리즘, 예술성과 기록성, 개인의 권리와 공동체 이야기 사이의 균형점은 전문 영화인이 어떻게 확보해 나갈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탐구가 바로 마을영화의 진정한 가치다. 완성된 형식이 아니라, 끊임없이 질문하고 실험하며 주민과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으로서 말이다.
마을영화의 동아줄은 단순한 지지대가 아니라, 동아줄을 타고 올라가면서 동시에 만들어가는 길 자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관계의 에너지를 빌어 해 낼 수 있을 적당한 떄까지 기다리는 일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하게 하고 전문가가 꼭 해야 할 ,보이지 않는 고도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다. 그것은 이야기를 맥락화하고 주제를 찾아주는 고도(高度)의 고도(Godot)를 기다리는 일이다 .
高度(고도의): 고차원적, 깊은, 절정에 가까운 상태
고도(Godot): 영문 'Waiting for Godot'.사뮈엘 베케트의 희곡 끝내 도착하지 않지만 기다림 자체가 의미가 되는 존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