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미학 — 밀레와 고흐, 그리고 얼굴들

by 신지승




도서관 식당 벽에 걸린 디지털 액자 속에서는 인상주의의 걸작들이 하루 종일 무의미한 기계적 순환을 거듭하고 있다. 드가, 모네, 고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 그림들은 눈길을 끌지 못하는 무심한 도서관 식당의 장식에 불과해 보인다. 밥을 먹으면서 그 그림들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최근 테무(Temu)에서 모네의 그림 한 점을 5천 원에 샀다. 언덕 위에서 양산을 쓴 아내 카미유와 아들 장이 내려다보는 <산책>이라는 작품이다. 그 그림이 내 집의 출입구 문 위에 걸었을 때 <산책>과 나 사이의 거리는

가까워졌지만 아이들에게는 내가 초딩시절에 이발소의 거울위 유리 액자속의 밀레의 만종을 보는 거리 정도 같았다. 그 그림을 산 이유는 아마 가장 영화적인 느낌이었을까? (실제 그 그림과 비슷한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포스터가 있다)


나의 초등학생 시절, 단골 이발소 커다란 거울 위에는 늘 밀레의 <만종>이 붙어 있었다. 노을 아래 두 사람이 고개를 숙인 채 기도하는 그 그림. 당시 나는 매달 6년 동안 지겹도록 보았다. 누가 그린 것인지 알았을까?

6년이라는 시간 동안 <만종>은 이후 머리를 깎을 때가 되면 그 그림이 생각날 정도로 매우 가까웠다.


중학교와 대학을 거치는 동안, 나는 그림과 특별한 인연을 맺지 못했다. 기껏해야 불교종립중학교라 사천왕 불화나 십우도 정도가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대학 시절에는 웃음이 거세된 콜비츠의 판화적 저항 이미지가 나의 청춘을 장식했다.

그러다 영화를 하고 난 뒤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만났다. 그 환상적인 세계를 영화로 재현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혀 35미리 러시아 카메라를 사고, 상업영화판에서 찍다 남은 35미리 자투리 필름을 구해 복숭아밭으로 거대한 조명과 스태프들을 불러들였다. 그러나 결국 2박 3일 동안 나는 그 영화를 완성하지 못했다. 모두가 밤 장면인데 이틀밤을 새우고도 빨리 찍지 못하는 내 능력의 한계 때문에 펑펑 울었다. 그날 이후, 다시는 돈에 연연하는 방식의 영화를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는지 모른다. 대신 유유자적하며 돈에 종속되지 않는 ‘돌탑 영화’라는 이념의 칼을 밤새워 갈았는지 모를 일이다.


언제부터인가 밀레의 <만종>은 더 이상 익숙한 성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낯선 질문이 되어 돌아왔다. 한때 가난한 화가로만 알고 동질감을 느꼈던 밀레가, 사실은 아홉 자녀를 거느리고 국경을 넘나들며 피난을 다니던 중년 이후엔 확고한 부르주아적 성공을 거둔 지식인 화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일종의 배신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는 농부와 함께 밭을 가는 동료가 아니라, 작업실에서 그들을 '성스러운 전형'으로 재구성하는 관찰자였다.

이름 없는 기도와 이름을 가진 얼굴

<만종> 속의 두 사람은 분명 부부이지만,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끝내 알지 못한다. 기도하는 자세는 경건하지만, 그 경건함은 삶의 구체적인 고통을 비껴간 채 저녁노을 속에 고정되어 있다. 살바도르 달리는 이 그림 속 바구니가 사실은 '죽은 아기의 관'이었으며, 부모가 아이를 묻고 기도하는 비극적 현장이라고 주장했다. 실제 엑스레이 분석 결과 바구니 자리에 관 모양의 밑그림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밀레는 농부의 가장 참혹한 현실조차 '경건한 기도'라는 보편적인 숭고함으로 덮어버린 셈이다.

밀레는 농부를 그렸으나 , 그들에게 다가가지는 않았다. 그는 땅의 무게를 그렸지만, 그 무게를 견디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개별적인 목소리를 불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그 부부는 언제나 '농부들'이라는 범주로만 남는다. 밀레는 관찰자의 시선 안에서 존재할 뿐, 관계의 뜨거움 안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차피 한 개인 예술가는 그 시대의 계급 질서, 문화, 종교적 코드 속에서 그가 감당할 수 있었던 거리의 한계가 존재하기에 그들에게 가하는 기대와 아쉬움은 부질없는 짓이다.



반면, 고흐의 그림 속 인물들은 저마다의 뚜렷한 이름을 지닌다. 가난한 이들의 이웃이었던 그는 그들의 거친 손마디와 움푹 팬 눈가를 '이름'과 함께 기록했다. 그중에서도 우체부 '조제프 룰랭'은 단순히 모델을 넘어 고흐의 영혼을 지탱한 실존이었다. 룰랭은 캔버스를 넘어 고흐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와, 함께 독주를 마시며 화가의 발작적인 불안과 세계의 분열을 함께 했다.

고흐는 대상을 상징이나 전형으로 박제하지 못했다. 대상에 너무 가까이 다가간 탓에 그의 그림은 그만의 스타일을 가졌다. 인간적 관계의 온기와 맥박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밀레의 부부가 시간 속에서 멈춰 선 성상(聖像)이라면, 고흐의 인물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말을 거는 살아있는 이웃들이다.

돌탑영화: 관계의 미학을 세우다

밀레와 고흐 사이의 거리는 단순히 화풍의 차이가 아니다. 그것은 예술적 태도의 차이다. 밀레는 멀리서 인간을 바라보았고, 고흐는 너무 가까이 다가갔다. 하나는 대상의 존엄을 지켰지만 침묵했고, 다른 하나는 관계를 선택하다 스스로를 태워버렸다.

내가 지향하는 '돌탑영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밀레처럼 대상을 익명의 전형으로 가두지 않으며, 고흐처럼 관계의 열병에 스스로를 소진하기만 하는 일도 아니다. 돌탑영화는 개개인의 고유한 이름과 얼굴을 남기는 작업이다. 화면 속 인물은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지역적 주제를 고민하고 창작해 나가는 '동지적 관계'의 주체가 된다.

테무에서 산 모네의 <산책> 속 카미유와 장은 빛나는 햇살 속에 서 있다. 모네는 그 찰나의 빛을 사랑했지만, 그 빛이 사라진 후 카미유가 병들어 죽어갈 때도 그녀의 죽음을 미친듯이 화폭에 담았다. 나는 그 모네의 생과사의 껴안음에 깊은 영감을 받았다. 그런데 그 카미유가 죽어가는 그림보다는 집에 걸어 놓기에는 차라리 <산책>이 나았다.


돌을 하나하나 쌓아 올려 탑을 만들듯, 서로의 삶에 관계하며 함께 영화라는 탑을 쌓는다. 이 과정에서 예술가는 대상을 일방적으로 소진시키지 않아야 한다. 대신 관계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 교류의 힘으로 땅의 이야기를 길어 올린다.

나의 영화는 어디에 서야 하는가? 를 고민했다 .밀레처럼 완결된 형식을 통해 대상을 보존해야 하는가, 아니면 고흐처럼 관계의 위험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가?


돌탑영화에서 주민들은 단순한 촬영 대상이 아니다. 이야기를 함께 머리를 맞대며 나누는 것에서 시작해, 촬영 현장에 스텝으로 참여하고, 수시로 열리는 촬영본 상영에서 자신들의 삶이 어떻게 화면에 담기는지 어떻게 형이상학적 위치를 갖는지 확인하며 성찰한다. 그리고 마지막엔 마을 축제를 통해, 자신들의 이야기가 영화로 완성되는 순간을 함께 한다. 이것은 관찰이 아니라 협업이며, 재현이 아니라 공동창작이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그들의 땅에서, 그들의 시간 속에서, 그들의 리듬으로 영화라는 탑을 한 돌 한 돌 쌓아 올리는 동지가 되는 것이다.

난 이것을 넷플릭스의 세계화에 대응해 돌탑의 지구적 네트워크의 씨앗으로 만들려 욕망한다.


예술의 깊이는 언제나 그 ‘거리의 긴장’ 속에서 결정된다. 너무 멀면 대상은 박제된 장식이 되고, 너무 가까우면 예술가는 재가 되어 사라진다. 중요한 것은 그 위태로운 긴장을 견뎌내며, 개별자의 얼굴을 마주 보고 함께 걸어가는 창작적 연대를 멈추지 않는 일이다.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관계하며 흔들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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