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커남자와 목석같은 여자,중매쟁이 감독의 마을영화 창세기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 〈올리브 나무 사이로〉는 스토커 남자와 목석같은 여자, 그리고 중매쟁이를 자처하는 감독의 이야기이다. 수많은 영화 비평은 이 영화를 영화와 현실 사이의 연결된 통로로 해석한다. 무궁한 해석의 영역으로 다가갈 수 있는 이 영화의 묘미는 나로 하여금 이 영화를 마을영화에 대한 묵시록으로 읽는다. 키아로스타미 자기 영화의 한계를 드러낸 회개이며 영화창작의 위선 고백이며, 나아가 영화가 가지는 거대한 연출과 로컬리티의 망각의 벽을 솔직하게 드러낸 절규이기도 하다.
"우리가 보지도 못하는 영화를 왜 찍어요?" 영화의 도입부에서 한 소녀가 말한다. 우리 마을에서는 방송이 안나오기에 이 영화를 찍어도 볼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불평을 내놓는다.영화속 감독은 궁색한 변명으로 답한다."영화채널에서 한달에 2번 하는데 "라고 하자 그 채널을 볼 수 없다는 불평이 나온다.
마을에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마을 사람들을 1차적으로 관객으로 삼는 마을영화의 존재를 알았다면 그의 고민은 해결되었을 것이다. 그는 여전히 영화의 배급을 영화제나 유명세를 통한 제한된 글로벌 배급으로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또한 마을 축제로서의 마을 사람들과 잔치를 벌이는 마을영화의 가능성을 알게 된다면 그는 뭐라 할 것인가? 키아로스타미는 한국의 마을영화를 알 수 없었다.
영화의 등장인물이 입고 싶은 옷을 입을 수 없고, 감독이 정해놓은 대사를 조금만 벗어나도 NG가 되는 일방적인 시스템에 대해 키아로스타미는 고백한다. "머리를 숙이지 마라", "25명이 아니라 65명이다." 빈틈없는 완벽주의자들과 영화적 과장의 습벽은 등장인물들을 불필요하게 착취한다.
영화속의 등장 인물이 모두 감독의 프레임 안의 도구라면, 도대체 상업 대중영화와 작가주의 영화의 차이는 무엇인가? 규모의 스케일 차이와 표현 미학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영화를 만드는 시스템은 그냥 작은 파시즘을 반복한다.
감독의 머릿속 캐릭터,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만 말더듬이가 되는 남자는 곧 다른 연기자로 교체되지만 주인공 테헤리의 고집으로 다시 캐스팅된다. 그 주인공 여자가 아니면 안 되기에 어쩔 수 없이 감독은 말더듬이 남자를 데려올 수밖에 없다. 일종의 스타 시스템의 은유이기도 할 것이다. 또 다른 등장인물은 배우 일은 하고 싶지만 벽돌공 역할은 안 하겠다고 고집을 부린다.그는 결국 그 고집으로 영화에 출연하지 못한다.
나의 마을영화는 통합의 이야기 만들기이다. 시나리오가 존재한다는 것은 캐스팅, 대본, 연습,감독의 개입이라는 살아있는 개성 죽이기,가상인물에의 몰입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주어진 인물들을 하나의 점으로 삼고 각 개성들을 통합하고 이어가는 이야기 만들기는 개개인의 개성과 존재를 드러내는 별자리이다. 이 과정에서는 우리가 공동으로 삼을 화두를 창출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은 이제 벗어 버려야한다 .감독의 상상을 재현하는 영화가 아니라 스스로가 자신을 표현하기를 원한다는 키아로스타미의 깨달음이다. 영화의 엔딩은 영화속 감독이 상상한 엔딩이 아니라 목석같은 여자와 스토커같은 남자가 빚어낸다 . 역설적이게도 사실은 영화속에의 인물이 아니라 키아로스타미의 시나리오에서 나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 그러나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그 또 다른 창작의 존재를 몰랐다지만 감독의 상상 대신 살아있는 삶과관계에서 빚어지는 영화에의 갈구이기도 할 것이다.
가난한 하고 집도 없고 글도 모르는 남자. 여자의 할머니는 그 남자와 손녀인 여자의 결혼을 반대한다. 목석같은 여자 테헤리와 스토커 같은 남자 호세인, 지진으로 인해 양과 소를 키우는 사람만 남은 마을에서 중매쟁이가 된 영화감독. 감독이 중매쟁이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는 영화에서 스토커남자로 인해서이다. 공부한 여자가 공부하지 않은 무식한 남자를 거절하는 이유를 이해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라고 하자 남자는 " 부자가 부자와 결혼하고 지주가 지주와 결혼 하고 똑똑한 여자가 똑똑한 남자와 결혼하면 세상은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라고 대꾸한다. 사실 부자와 지주에게는 천국이고 가난하고 무식한 이들에게는 지옥이라는 이분법을 묘하게 피하는 스토커남자 호세인의 말에 넘어가는 감독은 사실 현대의 상품문화씨스템의 핵심을 비판하는 힘을 잃은 수 많은 문화생산자와 같은 처지이다.
흰 양말 가지고 잔소리하는 남자, 25명이 죽었는데 왜 65명이 죽었다고 말해주기를 원하는 감독. 손을 뻗어 물건을 받든지 말든지 2층에서 떨어지는 물건을 받는 연기자의 행동으로만 으로 수없이 NG를 외치는 감독 , 이름을 부르지 않고 남자를 부르든지 말든지 상관없을 것 같은데도 감독은 일방적으로 이름을 부르라고 지시를 한다.
결국 감독은 이 마을의 여자들은 남편에게 '씨'를 붙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곧 그 땅의 로컬 문화를 도외시하고 감독의 이야기와 대사를 강요했던 자기 반성의 성찰이다. 키아로스타미는 바로 이제까지의 영화들이 가지는 로컬리티를 망각한 영화의, 이야기를 위한 파시즘적 진실을 드러내어 준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는 마을영화와의 창작의 차이를 비교하게 만든다.
마을영화의 인물은 대본이 아니라 자신의 언어로 말한다. 연습 대신 삶으로 연기하고, 연출 대신 관계로 이야기를 빚는다. 마을의 잔치 속에서 서로 다른 이들의 말이 부딪히며 하나의 집단 상상의 로컬 드라마가 된다. 누가 주인공이고 누가 조연인지, 그런 구분은 참여의 횟수와 열정에 의해 만들어진다. 모두가 자신의 역할을 다 함께 찾아 스스로 등장하는 영화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는 감독 자신의 한계를 드러낸 고백하는 영화였다. 감독의 권력은 대중영화나 작가주의 영화에서나 변함이 없었다. 그 권력이 반분(半分되는 자리에서 영화가 다시 태어나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 이 영화는 키아로스타미가 남긴 고백이자 질문이다. 키아로스타미 영화의 묵시록인 〈올리브 나무 사이로>는 마을영화의 창세기이다. 과거 영화의 숨겨진 비밀을 드러내고 다가올 영화의 미래를 예언한 영화이다.
"삶이 스스로 말하도록 하자."라는 .
감독의 대사가 아닌 주민의 말투가, 연출의 강압이 아닌 공동체와 삶의리듬이, 감독의 시나리오가 아니라 집단의 상상이, 관계가 빚어내는 숨어 있는 가상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시대가 왔다. 키아로스타미는 관계가 빚어내는 살아 있는 시간의 영화를 이 영화에서 보여준다. 키아로스타미가 미처 건너지 못한 그 다리를 전 세계가 동시에 건너야 한다. 다가올 AI영화는 촬영을 생략하고 컴퓨터 앞에서 모든게 이루어 질 것이다 .촬영이 없는 AI영화는 마당과 관계를 생략시킨다. 거대한 자본의 유튜브와 OTT그리고 AI영화의 부정적 영향을 동시적으로 극복해 낼 수 있다. 역사 이래로 줄곧 이어진 천재적 개인의 상상력에 기대어 가는 길 뿐 아니라 집단 지성적 평범 상상이 빚어내는 로컬의 삶을 통해 모두의 영화’, ‘함께 쓰는 시나리오’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그것은 더 이상 누군가의 천재적 통찰로 세상을 해석하는 영화가 아니라, 평범한 공동체가 스스로를 재현하고, 말하고, 기록하며 존재와 상상을 증명하는 새로운 예술의 형식이다.
그곳에서는 감독이 신이 아니라 중매자이며, 배우가 피사체가 아니라 주체가 된다. 카메라는 권력이 아닌 관계의 매개체가 되고, 영화는 상품이 아니라 살아 있는 대화와 창작의 마당이 된다. 그렇게 마을의 골목, 들판, 마당에서 태어나는 작은 이야기들은 거대한 AI서사보다 더 깊은 색다른 드라마로 우리를 이끌어 낼 것이다.
키아로스타미가 미처 건너지 못한 그 다리는 결국, 로컬의 평범한 사람들이 함께 건너는 다리다. 그들의 언어, 몸짓, 침묵, 웃음,관계가 모여 하나의 새로운 영화장르를 만든다. 그것이 바로 마을영화이며, 예술이 다시 덧없이 사라질 무명인의 손으로 돌아오는 ‘영화의 민주화’이자 '창작의 해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