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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aehyun Kim Jul 24. 2018

책과나: 무겁고 뾰족한 연필의 힘

할아버지와 손자의 대화(조정래, 조재면)를 읽고

「정글만리」를 통해 처음 접했던 조정래 작가가 새로운 책을 썼다. 도서관에 신청한 지 나흘여만에 받아 든 책은 계란색의 따뜻한 표지를 가진 작고 아담한 크기였다. 「태백산맥」, 「정글만리」, 「아리랑」 등 두껍고 무거운 책을 주로 쓰는 조정래 작가가 이렇게 작고 귀여운 크기의 책을 냈다니... 첫 장을 넘기기도 전에 마음이 편해졌다. 이 정도 분량이라면 완독을 위한 머나먼 여정을 떠나기 전 가져야 하는 중압감이 필요 없을 테다. 


제목은「대화」다.  조정래 작가와 그의 손자 조재면 씨가 글을 통해 사회문제에 대한 생각을 나눴던 것을 책으로 정리했다. 손자 조재면이 생각을 글로 써서 보내면 할아버지 조정래가 이에 답변하는 형식이다. 물론 이과정에서 할아버지는 글의 맞춤법이나 전개 방식에 대한 수정을 담은 첨삭도 해준다. 인터넷에서는 이미 논술 대비 추천도서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책은 총 5편의 대화를 담았다. 대화 주제는 국정교과서 문제, 가습기 살균제 사태, 게임 셧다운제 논란, 성(姓) 역할에 관한 논의, 비만문제이다. 손자와 할아버지는 각자의 논리를 글로 편안하게 풀어간다. 때로는 예를 들고 때로는 비유를 담아 자신의 논리를 뒷받침한다. 


우리는 대개 심도 있고 깊은 대화가 필요할 때 시간과 장소를 우선 정한다. 커피 한잔 하자고 하면서 하기 어려운 말을 꺼낸다. 말을 통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말은 상황에 따라 전달력의 차이가 몹시 크다.


우리는 어렵사리 꺼낸 이야기를 성공적으로 끝마치지 못한 경우를 종종 겪는다. 상대가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지 않거나 엉뚱한 질문을 하는 바람에 이야기가 이리저리 휘둘린다. 원래 의도한 바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 대화는 전하려 했던 말을 전하지 못한 채 끝난다.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상대가 전하려는 주제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는 바람에 상대의 의도를 바로 잡아내지 못하고 어영부영 이야기를 마친다.


글은 그렇지 않다. 수십 번을 고쳐 가다듬은 글은 글을 쓸 때의 상황과 환경을 대부분 배재시킬 수 있다. 청자도 읽을 장소와 시간을 정할 수 있으니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상대의 말을 억지로 들어야 할 위험이 줄어든다. 한번 내뱉고 나면 주어 담을 수 없고 한번 놓치고 나면 다시 듣기 어려운 말과는 달리 여러 번 퇴고할 수 있고 다시 읽을 수 있는 글은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아준다. 무엇인가 꼭 전달할 것이 있다면 우선 종이를 찾아 연필로 글을 적어야 한다. 


글을 쓰는 일은 고되다. 머릿속에서 맴돌던 생각을 손으로 적어내면 그때 그 감성이 고대로 녹아나지 않는다. 몇 번을 고쳐도 매끄럽게 읽히지 않는 경우가 있는 반면, 단박에 써 내려간 글이 술술 읽힐 때도 있다. 대개의 경우 우연이라기보다는 거듭된 연습의 결과일 것이다. 아마도 평소에 만만찮은 양의 책을 읽고, 다양한 분야의 글을 많이 써봤던 경험이 반영된 것일 테다.


글을 통해 나의 생각과 가치관을 전달하려면 평소에 글을 많이 써야 한다. 오늘도 변변찮은 몇 글자를 적기 위해 하얀 종이에 잘 갂은 연필을 끼적이고 있는 나에겐 조정래, 조재면 씨가 부럽다. 글로 자기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음이 부럽고, 그 글을 완벽한 대화로 이을 수 있는 상대가 있는 것이 부럽다. 언젠가 나도 조정래, 조재면 씨처럼 글로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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