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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율립 Apr 01. 2022

크고 작은 방지턱을 세우는 나날들

3월에는 크고 작은 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회사에서 굵직한 일들이 정리되면, 밖에서 굵직한 일들이 생겼다. 한 개의 컨펌이 끝나면, 또 다른 일의 피드백이 도착했다. 정말 일에 파묻혀 사라진 3월이었다. 최근 한 친구와 카톡을 하며 오랜만에 정말 한가롭다고 했더니 그 친구는 조용히 하라며, 그 얘기를 하면 일이 갑자기 휘몰아치게 된다는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건 우스갯소리가 아니었다. 나는 그날도 야근열차를 탔다. 주말에도 일은 계속됐다. 정기 데이트가 있는 토요일은 육체적 노동을 하진 않았지만, 잠깐이라도 해야 할 외주 일에 대한 생각을 지속하는 정신적인 노동을 했다. 배려심 많은 남자친구 덕에 토요일에는 1~2시간씩 낮잠을 자며 개운하게 생각을 비우는 시간도 찾아왔다. 일요일에는 카페로 내려가 매주 일했다. 매주 같은 일을 한 것도 아니었다. 한 주는 다음날 있을 PT 발표 연습을 했고, 또 한 주는 외주 일의 피드백을 반영하는 일을 했다. 그래도 3월의 마지막을 지나며, 이렇게 바쁜 3월을 보냈으니 오히려 감사하다고 생각한다. 


이 회사로 이직하기 전에 나는 직장을 두고 많은 기도를 쌓았다. 당시의 나는 일할 때 나의 캐릭터에 대해 지금보다 이해가 없던 편이었고, 다른 방향으로 이직을 준비했었다. 방향 설정이 잘못되어 있던 탓에 면접은 나쁘지 않게 봤는데도 번번이 낙방했다. 늘 피니시라인에 도착할 듯 도착하지 못하니, 답답했다. 하루는 운동화가 잘못됐나 했고, 또 다른 하루는 신발 끈을 다시 동여매기도 했다. 운동화의 컨디션이나 신발 끈의 매듭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목적지 설정이 잘못됐으니까. 당시의 나는 할 수 있는 게 그저 기도를 쌓는 일뿐이었어서 열심히 기도했고, 그 기도의 한 축은 ‘이끄심’이었다. 나에게 맞는, 나에게 최선의 길로 이끌어달라는 기도. 그 기도를 몇 달 동안 열심히 쌓았고, 거짓말처럼 지금의 회사로 가뿐히 이직했다. 이전 회사의 감사님은 내게 해줄 수 있는 배려가 이뿐이라며 연차를 쓰지 않고, 근무 중에 잠시 면접을 하러 갈 수 있게 배려해주셨고, 이 회사의 기획편집팀 책임자는 나를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1차 면접 끝나고 큰 문제가 없다면 함께 일하게 될 것이라고 귀띔해줄 정도로. 마침 이 회사에서도 1년간 마음에 드는 직원을 구하지 못해, 포기하려던 찰나에 내가 나타났다고 했다. 면접관 모두의 만장일치로 이 회사에 오게 됐다.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그야말로 우주가 내 취업을 돕는 것 같았다. 


물론 많은 회사가 그렇듯이 이 회사에서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니던 회사의 법인 자체가 없어지기도 했고, 많은 선배와 이별을 겪어야 했으며 결국에는 홀로 남았다. 가장 값싼 노동력 1명을 남긴 것 같은 처절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이 과정을 겪으면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내가 쌓았던 기도와 그 응답에 대한 확신 덕이다. 외부 상황이 크게 변하더라도 ‘내게 맞는 최선의 길로 이끌어주셨을 것’이라는 믿음, ‘이곳에서 얻게 될 것들’에 대한 소망이 날 굳건히 지탱했다. 결국에는 이 회사에서 내가 결과적으로 좋은 것들을 얻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승리자가 될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이 회사에서 햇수로 4년 차. 내 믿음처럼 이 회사에서 좋은 기회를 많이 얻고, 외주 일도 시작하게 됐다. 무엇보다도 동년배 좋은 디자이너를 많이 알게 됐다. 


31살에도 친구가 생길 수 있구나. 이 회사에 다니면서 얻은 교훈이다. 나는 이 경험 덕에 41살에도 거뜬히 새로운 친구를 사귈 수 있을 것 같다. 이 새로운 경험은 내 생각을 조금 더 유연하게 경직되지 않도록 이끈다. 31살에 동년배 디자이너를 친구로 둔다는 건 생각보다 기쁜 일이다. 디자이너라는 직업의 특성상 항상 트렌드에 민감하고 감각적이니까. 트렌드에 둔하고 감각이라고는 예민한 촉뿐인 내게는 행운과도 같은 일이다. 그들은 이 회사에서 만난 친구들이다. 퇴사하고 우연한 기회로 친해져 지금 같은 회사를 다니지는 않지만, 그래도 회사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캐릭터 설명 없이 휘리릭 이야기할 수 있는 존재가 생긴 것은 큰 힘이다. 게다가 동종업계 친구들이라 그런지 그들과 나누는 비슷한 고민과 이야기는 그 자체로 위안이 된다. 


매달 올리는 한 달의 일기 같은 블로그 콘텐츠를 정리하며 생각한 3월의 단상들이다. 회사 안팎으로 일을 정말 많이 했고, 일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와중에도 필라테스는 열심히 가고, 필라테스를 가기 위해 전날에 야근하며 방지턱을 세웠다. 그러면서 즐거운 만남도 열심히 챙겼다. 틈틈이 열심히 놀기 위해 또 열심히 일하며 방지턱을 세웠다. 이렇게 쓰다 보니 지금 3월 말인 게 이해가 된다. 정말 바빴구나 3월의 나, 4월엔 유산소 운동을 하나 더 해볼 계획으로 줌바 댄스를 끊었다. 주 4회의 운동, 이걸 지키기 위해 난 또 어떤 방지턱을 세우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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