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아이들을 소재로 한 영화에 그리 흥미를 느끼지 못하지만 우주인 헬멧을 쓴 소년이 나오는 첫 장면에 호기심을 느낀 것인지 아니면, 얼굴을 감추고 나타난 소년의 모습에서 왠지 사회복지적 사유가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인지 결국 영화를 보게 됐다. 사회복지사의 직업병이라 말할 수 있겠다.
과학을 좋아하는 미국 학교 5학년인 주인공 '어기 폴먼'은 장애를 갖고 태어나 수십 차례 수술을 한 탓에 얼굴이 흉터가 남아있어 남들에게 비호감으로 비칠까 두려워한다. 한동안 엄마의 지도 속에 홈스쿨링을 하지만 결국 학교에 가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리고 있다.
처음엔 학교에서의 놀림과 왕따를 당하지만, 어기의 진정한 매력을 느낀 친구들이 한두 명씩 다가와 결국 차별을 극복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거듭난다는 내용이다. 변화는 꼭 어기 혼자만의 변화는 아니다.
초반부를 보아하니 스토리 전개 방식은 안 봐도 비디오였지만 몰랐으면 몰랐지, 안 봤으면 후회했을 정도로 보는 게 유익했고, 생각했던 것처럼 질문거리를 안겨주는 고맙고도 의미심장한 영화였다. 감동과 눈물은 덤이다.
영화를 보는 중, 왠지 전체 주제를 말하고 있는 것 같은 문장 하나가 날아와 머리에 콱 박혔다.
"옮음과 친절함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할 때는 친절함을 선택하라."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은 나에게 중요한 문제다.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 최근 정치권에서 나온 야당 원내대표의 말 "해방 후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로 인해 국론이 분열됐다"는 말에 분개하며 아직도 치를 떨고 있는 것도손바닥으로하늘을가리는짓거리를도저히눈뜨고는볼 수 없기때문이다.
나라를 팔아먹고, 일본에 부역하며 같은 민족에게 총, 칼을 들이댄 짐승만도 못한(짐승들아 미안하다!) 짓을 한 자들을 단죄한다는데 반민특위가 국론을 분열시켰다고? (지금도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올라오고 있다.)
이렇듯 정확히 시비를 가리지 못하는, 즉 정의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함에 극도로 절망하고 분개하는 나에게 영화 속 대사는 '대체 이게 무슨말이지?'라는생각이들게 했다.
'옳음보다 친절을 택하라고?'
하지만 아이들 간의 '옳음'의 문제를 '친일파 단죄'의 문제로 끌고 가는 건 개인적인 '깊은 빡침'으로 인해 너무 나갔다는 생각이 들어이쯤 하겠다.
영화를 돌이켜 보면 안면장애가 있는 아이, 즉 약자로 보이는아이의 행동이 옳으냐 옳지 못하느냐를 따지는 것 보다 그에게 친절함으로 다가가는 것이 더 중요하고 소중하다는 걸 일깨워 주는 말인 듯하다.
'친절함'
친절함은 덕이 된다. 서로가 화합하고 통합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든다. 친절하지 않는 동료직원, 친절하지 않는 이웃, 친절하지 못한 상담원, 친절하지 못한 누구를 떠올려 보라. 자신의 논리와 주장이 옳다는 이유로 친절하지 못한다면 과연 그가 옳다는 사실 외에 무엇이 남는가?
"세상에 옳은 말 하는 사람은 넘쳐난다."
옳음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옳음 만큼이나 친절함이 중요하단 말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본인도 이를 두고 한참을 생각했으니 해석의여지는다툴 수있겠다. 누군가의 친절을 마주할 때면 가슴이 따뜻해지고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친절은 따뜻함을 다시금누군가에게전하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마음에도 없는 친절을 감행하진 말자. 어느 어떤 상황에서도 적용되는 것이 아님은 굳이 말 안 해도 알리라 생각한다. 내 옮음을 양보할 수 있을 만큼의 넉넉함을 지니게 된다면 그때 실행에 옮겨보는 것도 좋겠다. 그게 아니라면 옳음을 친절함으로 잘 표현해 내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지 않을까?
나 또한 오랜 실직상태 때문인지 몰라도얼굴에 미소가 사라지고, 어둡게 그늘진 표정과 무뚝뚝한 말투로 사람을 대하는 것 같다. 얼마 전 누군가 날 보고는 "왜 그리 웃지 않느냐" "평소에도 잘 안 웃나", "카메라로 찍어 자신의 모습을 점검해 보라"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실직상태 건 아니건 간에 누군가에게 따뜻함으로 다가서는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다. 내 친절함으로 인해 누군가는 세상의 아름다움과 삶의 희망을 볼 수도 있을 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