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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실직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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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영 Aug 14. 2019

실직의 5단계-우울

확실히 우울하다.

몇 달 전 실직의 다섯 단계 중 첫 번째 단계 '수용'을 쓰고 난 뒤, 여태 두 번째 단계에도 접어들지 못한 찝찝함과 응어리가 남아있었다. 누가 꼭 쓰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스스로를 옥죈다. 쓴다고 해놓고 쓰지 않는 것도 사나이가 할 짓이 아니지 않은가?(갑자기?) 누가 보면 실직을 '수용'만 하고 끝난 줄 알겠더라. 그것보다도 나머지 네 단계를 곧 쓸 것처럼 말하고 지금껏 1도 생각 안 하고 있다는 점이 스스로에게 자책이 들어 두 번째 글을 쓰기 위한 내 심경을 잠깐 살펴본다. 다섯 단계든 네 단계든 세 단계든 상관없었다. 3단계와 2단계가 바뀌어도 상관없고 3,4단계가 한꺼번에 통합된데도 별 상관없는 일일 것이다. 그저 실직으로 인해 겪게 된 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면 그만인 것이다. 어차피 내 감정이니 내 맘대로 서술하는 게 어떻단 말인가.



다시 일을 하면 그만이지 대체 왜 우울해지는가? 대체 누가 나를 이렇게 괴롭히길래 맘속에 기쁨이 사라지고 살이 쏙 빠지는가? 과거 정혜윤 님의 저서  <그의 기쁨과 슬픔>에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 대부분이 심각한 우울을 겪고 있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연달아 벌어지고 있다는 내용을 읽은 기억이 있다. 찾아보니 쌍용차 사태는 30명의 희생자를 냈었다. 사망자, 자살자라는 표현보다 희생자라는 표현이 바로 이들의 억울한 상황을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듯하다. 그들의 영혼은 어디에 있을까? 저승으로 내려갔을까? 아니면 구천을 떠돌고 있을까? 희생자분들의 심심한 명복과 안식을 빈다.


나는 강제로 해고된 것이 아니라 제 발로 걸어 나왔으니 앞서 말한 희생자 분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어찌 됐든 해고만 안 당했지 나갈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일종의 변종 해고 방식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관리자들의 잔기술은 지능적이면서도 점점 고도화된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당한 것이 바로 변종 해고다.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나가게 하는 고난도의 기술 전법이다. 기술에 말려들었다. 아니 기술이 들어가도록 몸을 내맡겼다고 하는 게 옳겠다. 나의 퇴직 이유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비인격적인 태도의 관리자 때문이었다. 지금도 살아남는 자가 강한 거라며 묵묵히 견디는 사람들이 있으니, 나를 방어하고 정당화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지만 인간답게 살고 싶어 나왔다고 하면 얼마나 이해가 될까?


회사 안이 전쟁터라면 나오면 지옥이라는 말은 숱하게 들어 알고 있었지만, 지옥을 경험해보지 않는 자가 그 말에 현혹되어 버티는 결정을 하기는 쉽지 않다. 나와보니 무시무시한 지옥의 경험이 나를 우울의 나락으로 이끈다.


매달 받던 급여통장에 몇 달째 아무런 기별이 없다. 혼자일 땐 집에 기거하며 부모님께 손 벌려 근근이 살아보겠지만 법적으로 부모를 떠나 둘이 된 이상 이제는 부모님 집에 기어들어갈 수 없다. 이젠 아내에게 의탁하여 지내는 수밖에 없지만 한 달, 두 달 지나면서 점점 아내 눈치를 보게 된다. 아내가 눈치를 주거나 싫은 소리 한번 제대로 한 적이 없건만, 스스로 아내 볼 낯이 없는 것이다. 때문에 택배 알바도 시작했다. 그제야 비로소 당당함이 몸속으로 회기 한다. 이때만 해도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뭔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게 이리도 감사한 것인지 처음 느꼈다. 비록 한 달에 100만 원 안 되는 적은 돈이지만 매일 새벽 열심히 일하며 조금이라도 가사에 보태려 했고, 남의 귀한 딸자식 데려와 호강은 못 시켜줄망정 고생은 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작은 위안을 주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질이 이리도 심한 것인가? 어쩌다 왼쪽 어깨를 다쳤다. 어느 순간부터 왼팔이 등 뒤로 돌아가지 않는다. 팔을 머리 위로 올리면 심한 어깨 통증을 느낀다. 한 손으로 '볼'을 잡고 운전하는 습관 때문이기도 했고, 하릴없는 오후, 건물 내 헬스장에서 무리하게 상체운동을 한 탓이기도 했다. 물론 택배일도 한몫했다. 이유가 있는 고통이었지만 지금은 절대로 다쳐서는 안 되는 시기였건만, 타격은 심했다. 당분간 택배일을 쉬게 됐고 심적 고통은 팔의 고통을 배가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면접은 보는 족족 떨어진다. 이들(면접관들)은 마치 나의 모든 것을 파악한 사람처럼 어김없다. 몇 가지 질문만으로 어렵게 찾아온 기회가 '휘' 멀리 날아간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며 냉혈한의 얼굴을 하고서 날카로운 혀를 몇 번 날름거린 후 가차 없이 모가지를 친다. 면접의 심리적 압박은 그럭저럭 견딜만하지만 면접 후의 허탈감과 자괴감은 길게는 이틀을 힘들게 했다.(이것도 많이 줄여서 이틀이다.) 여진은 2주 정도 계속되는 듯하다. 하지만 한 달에 최소 두 번 정도의 면접이 있으니 이 여진은 한 달 내내 계속되는 샘이다. 언제 갈라질지 모르는 여진의 불안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디는 것이다.


아내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도 나름 긍정적인 사람이다. 한때는 동료들 사이에서 긍정의 아이콘으로 여겨졌고, 무한 긍정이란 수식어도 붙여졌던 사람이다. 이렇게 견디는 것도 나니깐 견디는 거다.라고 허새 아닌 허새를 부렸지만 정말로 이 말에 거짓은 단 2프로만 존재한다. 이런 나니깐 완전한 우울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 거다. 그동안 33번의 면접을 봤다. 면접 탈락의 고통을 '쨉'과 '스트레이트' 중 무엇으로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많이 봐줘서 '쨉'으로 표현한다면 묵직한 쨉을 서른세 방 맞은 것이다. 오버스러운 표현을 하자면 알리도 타이슨도 메이웨더도 파퀴아오도 이 정도 맞았으면 비틀비틀할 것이다. 그간 무한 긍정으로 중무장했기에 이 정도 맷집으로 버틸 수 있었다고 다소 부끄럽게 말하겠다.



한동안 친구들에게 얻어먹는 게 습관이 됐다. 스스로도 돈을 낼 생각은 애초에 없다. 친구들은 연민까지는 아니지만 각출 명단에서 제외시키고 단기 수혜자로 등록시켰다. 하지만 점점 친구들에게 연락을 하지 않게 된다. 그저 집에 있는 게 편하다. 집에서 아내가 만들어놓은 반찬에 한 끼 뚝딱 해결하고 아내가 사다 놓은 간식거리를 먹으며 컴퓨터 앞에 앉아 이렇게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 좋다.


이전 한 모임에서 땀을 삐질 흘린 적이 있었다. 아내와 함께 하는 어떤 모임에 참석하고는 친목을 도모하는 시간에 사람의 눈을 못 쳐다보겠는 게 대체 내가 왜 이러나 하는 자괴감이 일기도 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자신감이 사라지고 낯선 누군가를 만나는 게 사뭇 두렵기도 했다. 지금도 그러는지는 모르겠다. 그 이후로 그런 낯선 모임에 가본 적이 없다.


변종 해고의 억울함, 분노, 그리고 서른세 번의 쨉(사실상 스트레이트), 그리고 한 달 내내 계속되는 여진의 충격, 백수라 칭하는 무익한 인간이라는 자괴감, 퇴화하고 있는 왼쪽 어깨,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는 가족들, 여전히 감추어지고 있는 처가 식구들, 곁에서 티 안 내려 애를 쓰는 미야.


과거 우울에 대한 느낌을 모른다고 말할 때가 있었다. 누군가 우울하다고, 우울해서 그랬다고 하면, 그러냐고 공감하는 척하면서도 실상 그 사람을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실직의 여파가 우울로 이어지는 데까지 고작 1년도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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