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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간채집자 Nov 04. 2015

그곳에 가을이 있었네

서울미술관의 석파정에 담긴 가을

10월의 끝자락, 도심 속 한 자리에  말없이 숨어있던, 시린 가을을 만났다. 차분한 갈빛 참나무 잎새들과 노란 은행잎, 붉게 타오르던 단풍들이 곱게 물드는 계절. 겨울지나 봄 여름 그리고 가을, 자연의 순환과 흐름에 몸을 열어두고 풍류와 아취를 즐기며 그곳을 거닐었을  옛사람의 시간들을 그려보았다. 양반家의 한 아름다운 개인 정원은 웅장한 암벽과 바위산에서 흘러나오는 계곡을 품고, 푸른 솔바람, 대숲에 이는 바람소리와 함께  폭신한 낙엽을 밟는 오솔길로 안내하는 고즈넉한 가을 숲이 되어 펼쳐져 있었다.


2012년 10월 28일 토요일, 친구가 청한 주말 나들이길 동행. 그날의 여정은 새로 개관한 부암동 서울미술관과 서울도서관을 거쳐 덕수궁 프로젝트 관람까지.  그중에서 오랜만에 향했던 부암동은 도심 속에서 조용히 자연을 품은 '석파정'이라는 곳을 처음으로 만나게 해주었다.  



개관기념 전시 관람을 마치고 미술관 3층과 연결된 석파정으로 나서 보니 과연, 눈 앞이 환해지던 다채로운 가을빛, 물감을 찍어놓은 듯한 오색 빛깔들이 내려앉은 숲이었다. 완연한 계절의 아름다움에 젖었던 그날의 단상, 마알간 가을의 얼굴을 마주하다.


















왕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별장

인왕산 북동쪽 바위산 기슭에 위치한 석파정은 예전부터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1820~1898)의 별장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예술 애호가인 한 기업가에 의해 석파정을 끼고 미술관이 개관하게 되면서 일반인에겐 가리워진 길이었던 '비밀의 정원'이 비로소 개방되게 되었다. 










한성의 경승지 중 하나로 꼽혔다는 석파정은 산수와 계곡을 배경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경관으로 선비의 기품이 깃들어 있는 공간이다. 물을 품고 구름이 발을 치는 집. 옛사람들은 이 곳의 계곡 깊숙한 정자에 들어앉아, 때로는 너른 바위에 걸린 구름을 보면서, 나무그늘 아래 쉬기도 하고 시도 읊으며 음악과 춤사위에 깃들기도 했을 것이다. 사계절 자연의 풍경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석파정에서 탁 트인 전망과 하늘을 마주하며 물소리, 새소리, 바람에 소살거리는 나뭇잎 소리에 귀 기울이기도 했을 것이다.



                   


수려한 자연석조물, 너럭바위. 석파정이 품고 있는 인왕산의 한 자락.
석파정에서 만나게 되는 너럭바위는 바위산으로서 인왕산의 특징을 잘 드러내 주는 수려한 ‘자연석조물’이다. 코끼리 형상을 닮아 일명 코끼리 바위라고도 하는데, 그 비범한 생김새와 영험한 기운으로 인해 소원을 이뤄주는 바위로 알려져, 바위에 얽힌 재미있는 전설들이 구전되어 온다. 아이가 없던 노부부가 이 바위 앞에서 득남을 빌어 소원을 이루었고, 아들의 시험 합격을 기원한 한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로 결국 아들이 출세의 길에 들어섰다는 이야기 등이 전해지며 소원바위, 혹은 행운바위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자료출처_서울미술관 홈페이지)










                                         계곡 사이,  조선말 유입된 청(淸)나라식 건축의 한 유형을 보여주는 중국풍의 정자




한국의 전통 건축양식과 중국(당시 청나라)의 건축양식이 적절히 조합되어 있는 정자. 김흥근이 청나라 장인을 직접 불러와 조영 했다는 설이 있지만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정확한 내용을 알 수는 없다. 정자에 남아있는 청나라풍의 문살 문양과 평석교(平石橋)의 형태 등을 통해 건축 당시 이국 취향의 정자가 주었던 독특한 아름다움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또한 바닥을 나무로 마감하는 한국의 전통 정자와는 달리 화강암으로 바닥을 마감한 점은 건축적으로도 매우 특이하다. 1974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었다. (자료출처_서울미술관 홈페이지)


                                         















바람이 분다, 가을 찬 바람에 쓸려가던 낙엽들..

                                       


물을 품고 구름이 발을 치는 집

석파정은 원래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흥근(金興根, 1796~1870)의 별장으로 바위에 삼계동(三溪洞)이란 글자를 새겨놓아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라 불렸던 곳이다. 이후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후 별장을 차지하면서 바위산에서 얻은 석파(石坡)라는 자신의 아호를 따서 별장이름도 석파정(石坡亭)이라 바꿔 불렀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의 별장으로 익히 알려진 이 곳의 이름이 바꿔지게 된 데에는 김흥근의 억울한 사연이 역사의 한 자락 뒤에 숨어 있다. 조선말 황현(黃玹, 1855~1910)의 <매천야록>에는 이러한 석파정의 내력이 전해진다. 삼계동에 있는 김흥근의 별장은 장안에서 경치가 좋은 곳으로 이름난 유명한 정원이었다. 건축뿐 아니라 빼어난 산수와 계곡으로 이뤄진 그곳의 아름다운 경관을 마음에 들어했던 흥선대원군은 자신에게 팔 것을 간청하였는데 김흥근이 듣지 않자 결국 하룻 동안만 빌려달라 하여 드디어 승낙을 받아냈다. 이어 꾀를 낸 대원군은 그곳을 자신의 아들 고종(재위: 1863 ~ 1897)을 행차시켜 다녀 갔다. 임금이 한 번 거처한 곳에 신하가 감히 다시 찾을 수 없는 법, 결국 김흥근은 자신의 별장에 다시 걸음 하지 못했고 결국 삼계동정사는 대원군의 소유물이 되고 말았다. 자신보다 20년도 더 어린 흥선대원군의 이러한 처사에 그의 심사는 좋을 리 없었을 것이다. 고종 즉위 후 흥선대원군이 정치에 간섭하는 것을 비난했던 김흥근은 대원군의 미움을 산 연유로 안동 김씨의 세도가로 지니고 있던 많은 토지도 빼았겼다. 



흥선대원군 별서. 본래 7채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오늘날은 3개의 살림채와 정가 등 4개 동이 남아 있다.
인왕산 북동쪽의 바위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흥선대원군 별서(興宣大院君 別墅)는 본래 조선 철종과 고종 때의 중신(重臣) 김흥근(金興根, 1796∼1870)이 조영해 별장으로 사용한 근대 유적이다. 김흥근이 언제 이곳(당시 삼계동정사로 통칭)을 조영 하였는지에 관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일부 문헌을 통해 그 시기를 대략 1837~58년 사이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후일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의 섭정이 시작된 1863년을 전후하여 대원군이 이를 인수, 별서로 사용하게 된다. 
흥선대원군 별서는 본래 7채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은 안채, 사랑채, 별채와 같은 살림채와 정자 등 4개 동이 남아 있다. 별서들 중에서도 흥선대원군 별서와 같이 안채 이외에 별채를 가지고 있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대원군은 사랑채에서 난을 치는 등 이곳을 예술적 활동을 했던 장소로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종의 행전이나 행궁, 즉 임시거처로도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높은 자리에 위치한 별채의 구성과 별채로 진입하는 협문, 과거에 있었던 꽃담 등은 왕이 묵던 곳으로써 손색없게 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흥선대원군 사후에도 대략 50년간 그의 후손들에 의해 관리되어 오다가 한국 전쟁이 시작된 후 콜롬바 어린이집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민간에 이양되어 관리되어왔다. 1974년 석파정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었고, 현재는 (주)석파문화원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사랑채 서쪽 뜰에 위치한 노송은 서울특별시 지정보호수 제60호로서 유구한 세월 동안 이곳과 운명을 함께해 왔다. (자료출처_서울미술관 홈페이지)


외침 속에도, 전생의 상흔 속에서도 묵묵히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었을  유구한 세월..사랑채 서쪽에 위치한 노송




삼계동 각자
사랑채 서측 후면 암반에 새겨져 남아 있는 삼계동(三溪洞)이라는 각자는 김흥근이 별서를 지어 이를 경영할 당시 이곳이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 삼계정, 삼계동 산정 등으로 불렸을 것을 추정하게 한다. 이는 소치(小癡) 허련(許鍊)이 집필한 『소치실록(小癡實錄)』과 양의영(梁義永)의 『유북한기(遊北漢記)』 등 일부 문헌들에서도 드러나는데, 부근에 세 갈래의 내가 합쳐져 흘러 삼계동이라 불렀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흥선대원군이 이곳을 소유한 후 별서의 앞산이 모두 바위이므로 자신의 호를 석파(石坡)로 바꾸고, 정자의 이름도 석파정으로 바꾸었다. (자료출처_서울미술관 홈페이지)







바위에 새겨진 글. 물을 품고 구름이 발을 치는 집, 소수운련암 각자.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의 글씨.
김흥근이 당시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라 불렸던 별서를 조영하기 이전에 이 자리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별서 초입 사랑채 맞은편에 커다란 암반이 있고, 거기에 “巢水雲廉菴 寒水翁書贈 友人定而時 辛丑歲也(소수운렴암 한수옹서증 우인정이시 신축세야)”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어 김흥근의 별서 조영시기 이전의 모습에 대해 추정하게 한다. ‘물을 품고 구름이 발을 치는 집으로, 한수옹(寒水翁)(권상하權尙夏, 1641∼1721)이 벗 정이(定而)(조정만趙正萬, 1656∼1739)에게 신축(辛丑)(1721, 경종 1년)에 글을  써주다’라는 뜻의 이 글귀는 매우 운치 있는 시적 표현으로 자연을 대하고 노래하는 조선시대 선비의 심성을 느끼게 해준다. 조선 숙종 때 문신인 오재(寤齎) 조정만의 별서 조성에 관한 기록은 따로 전해지지 않으므로 더 이상 고증된 자료는 없지만, 이 암각을 통해 현재의 위치에 18세기 초 또는 그 이전부터 별서가 조성되어 경영되고 있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자료출처_서울미술관 홈페이지)







"좋다... 날 좋을 때 이곳에 숨어들어, 저 숲자락에서 뒹굴거렸으면 좋겠다." 

"종일 책 보다, 하늘보다... 그치?"

"그래, 다음엔 꼭 다시 와보자, 춥지 않을 때..." 

석파정은 그림같이 아름다웠다. 제법 쌀쌀한 바람으로 오래 앉아 있기엔 점점 몸을 움츠리게하는 날씨만 아니었다면, 정말 시간의 구애없이 오래오래  숨어들고 싶은 풍경이었다. 그리고 마치 속 깊은 오랜 친구처럼 편안한 곳이었다. 그래서 오래오래 한없이 마주하고 싶은, 긴 말이 오가지 않아도 서먹하지 않고 언제고 찾아와도 거리낌없이 다 받아줄 것만 같은.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줄 것이 많다는 듯이.... 詩 안도현, 가을엽서 中



별서 건너편 언덕에 자리한 삼층 석탑. 통일신라 시대의 유산으로 경주에서 옮겨온 것이라 한다.
이중(二重)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塔身部)와 정상에 머리장식(상륜, 相輪)을 올린, 화강암 재질의 높이 4.5미터의 일반형 3층 석탑이다. 4장의 돌로 짠 기단부(基壇部) 중 아래층기단의 각 면마다 모서리 기둥(우주, 隅柱)과 가운데 기둥(탱주, 撑柱) 2개가 새겨져 있고, 윗층 기단 윗면의 탑신받침이 2단으로 구성되어 신라석탑의 특징을 보인다. 탑의 중심 부분인 탑신부는 몸돌(탑신석, 塔身石)과 지붕돌(옥개석, 屋蓋石)이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되어 있으며, 몸돌의 각 모서리에는 층마다 기둥 모양이 조각되었을 뿐 다른 장식은 찾아볼 수 없다. 각 층의 지붕돌은 크기의 줄어든 정도가 적당하고,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지붕돌 윗면에 완만한 경사가 흐르다가 양끝에서 부드럽게 살짝 들려 경쾌함을 더한다. 
현재는 3층 지붕돌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노반석, 露盤石)만이 남아 있는 모습이지만, 전체적인 형태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에 건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 근처의 개인 소유 경작지에서 수습한 것으로 현재의 모습으로 조립하였고, 석파정 공개를 앞둔 2012년 6월 경 현 위치로 이전 설치되었다.  ※ 정영호(단국대학교 석좌교수·박물관장/한국문화사학회 회장), 「삼층석탑 소견서」, 2007. 참조 (자료출처_서울미술관 홈페이지)


그곳에서 가을을 보았네...  


미술관 건물의 옥상에 조성된 공원



                                   


석파정에서 모아온 단풍잎들로 띄운 손메모가 화이트보드에 가득. 미술관을 통해 석파정을 다녀간 이들이 남긴 흔적이다. 나도 한켠에 은행잎 하나를 매어두었다. 김흥근과 이하응, 동시대 멀고먼 바다 건너의 이국(異國), 불란서에 살았던 한 젊은 시인이 읊었을 시를 떠올리며.   


.... 그리고 나는 가네 / 나를 실어가는 / 모진 바람따라 / 이리저리 / 마치 / 낙엽처럼.  

베를렌느(1844~1896)의 시, <가을의 노래> 중에서

(... Et je m'en vais / Au vent mauvais  / Qui m'emporte, / Deçà Delà,  / Pareil à la / Feuille morte.    <Chanson d'Automne>, Paul-Marie Verlaine)


문득 작가 이이남의 작품처럼, 석파정에 앉아 있는 베를렌느를 머릿 속으로 상상해 보니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이 곳의 따스한 가을 햇살 아래 숲을 거닐었다면 그는 어떤 시를 짓고 있었을까.




스밈... 그날의 기억을 정리하며 들었던 음악

http://youtu.be/P1XvIXu6N3g






지난 글을 올리며 서울미술관 홈페이지를 들어가보니 석파정을 한바퀴 감싸는 두 개의 관람 길을 만들어 둔 것을 알게 되었다. 미술관에서 나와 흥선대원군 별서뒤로 걸어올라가  삼계동 각자를 지나 너럭바위까지 석파정을 굽어보는 '구름길', 그리고 너럭바위에서 석파정(지금은 중국풍 정자에도 석파정이라는 같은 이름을 붙여두었다)를 지나 신라시대 삼층석탑소수운련암 각자까지 이어지는 '물을 품은 길.' 지도에서 초록색으로 표시해 본 길이다. 노란색 표시는 2012년 미술관 개관 당시, 친구와 석파정을 거닐었던 이동경로. 

석파정은 서울미술관을 상징하는 또다른 아이콘이기도 하다. 미술관의 로고를 보면 과거와 현재의 조화로운 공존을 보여주는 미술관의 특징을 담아 미술관 공간과 뒤편의 석파정을 연결하는 동선을 형상화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12년의 기록) 이중섭의 '황소'가 탄생시킨 미술관 2012년 8월 29일 개관한 서울미술관은 종로구 부암동에 자리하고 있다. 미술애호가로 알려진 유니온약품 그룹 안병광 회장이 설립한 미술관으로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등록된 석파정 부지에 세워졌으며 국내 사립미술관으로는 삼성미술관 리움 다음으로 큰 규모라 한다. 지상 3층에 지하 3층, 대지 약 4만 3000㎡(1만 3000여 평)에 연면적 약 6611㎡(2000여 평) 규모. '황소' '자화상'(1955) '환희'(1955) 등 이중섭의 작품 19점을 대표 컬렉션으로 하여 박수근, 천경자, 김기창, 오치균 등 한국 근·현대 작가들 작품 1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미술관 입장료로 미술관과 석파정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www.seoulmuseum.org 



중국식 호벽이 보존되어 있는 석파정의 또따른 별장 건축물 원래 석파정의 일부였으나 흥선대원군 별서에서 분리되어 남아있는 석파정 별당은 종로구 홍지동 상명대 앞 세검정 교차로에 위치하고 있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23호. 지금의 석파랑 음식점의 뒤편에 자리한 석파정 별당은 1958년 서예가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馨1903~1981)이 그 곳에 자신의 거쳐를 조성하면서 뒤뜰에 옮겨 이전하였다. 지금은 '석파랑'이라는 음식점이 된 손재형의 집은 여러 문화재들을 한 데 모아 공간을 완성한 곳이다. 석파정의 별당 외에도 입구의 메인 레스토랑으로 사용되는 가옥은 손종의 계비인 순종효황후 윤씨의 옥인동 생가를 옮긴 것, 고종의 황제 즉위를 기념하기 위하 경복궁에 세워졌던 만세문도 볼 수 있다.

석파정 별당 역시 흥선대원군 별서의 독특한 특질을 잘 드러내는데, 김흥근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보았던 모습을 이곳에 재현한 듯하다. 19세기 중엽에 건축된 것으로 조선 말엽 왕궁 건축을 위해 중국 천진에서 들여온 중국식 호벽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중앙에 대청이 있고 양 옆에 방이 있는 ㄱ자형의 맞배지붕을 한 건축물로, 지붕이 끝나는 별당의 양 측면은 붉은 벽돌로 벽을 세워 원형과 반원형의 창이 나 있다.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중국풍 건축의 특징이다. 흥선대원군이 앞쪽으로 돌출된 큰방을 사용하였고, 작은방은 손님 접대공간인 작은방, 난초를 그릴 때에만 사용하였다는 대청방 들으로 이루어져 있다. 규모는 작지만 뛰어난 기술을 지닌 장인들이 고급 자재를 사용하여 지은 조선 후기 상류사회의 대표적인 별장 건축물로 꼽힌다.

 (자료출처 : blog.daum.net/elegant0302/2022)



2012년 10월 28일(토요일)의 이동경로 |  광화문 KT 본사 앞 버스 정류장에서 마을버스 1711번을 타고 경복궁역을 지나 자하문터널 입구에서 하차, 서울미술관으로. 미술관 관람과 석파정 산책을 마치고 부암동 길을 따라 걷다. 점심은 천진포차 부암동점 텐진식 만두. 교자관, 친구와 만두 세 접시. 다양한 나라의 커피를 맛볼 수 있는 커피 전문점 클럽에스프레소에서 테이크아웃 커피 두 잔, 쿠키 한 봉지. 창의문로를 따라 걷다가 청운중학교 앞에서 인왕산 보기~ 창의문로를 걸어 청와대로, 효자로를 따라 통의파출소까지.갤러리 메타포에서 PINA & I, 피나 바우쉬 전시 마지막 날을 챙겨보며 우종덕 사진을 만나다. 막 개관한 지 3일 된, 방문객들로 북적이는 옛 서울시청사 건물인 서울도서관을 둘러보고 서울 북 페스티벌 마지막 날, 잔디광장의 체험부스 돌아본 후 시청 신청사까지 들러 로비의 인테리어와 건축관련 전시를 간단히 보고 마지막 덕수궁으로. 덕수궁 궐내 여러 전각들과 미술관에서 펼쳐졌던 국립현대미술관의 야심찬 기획전, '덕수궁 프로젝트' 관람으로 하루의 여정을 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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