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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래울 이선예 Mar 22. 2024

비우며 살기

이사 가는 준비

  이사를 하게 되었다. 한집에서 23년을 살다 보니 집도 낡고 지루하기도 했지만, 인생을 살아온 날이 많아지니 노후에 대한 준비와 정리가 필요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니 결혼 생활 40년 동안 이사를 별로 하지 않았다. 1980년에 서울 강동구에서 신혼 시절을 시작해 아들이 중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살았고, 1995년에 경기도 성남시 분당으로 이사해서 23년을 살았다.

  20여 년 만에 이사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들은 분가했지만, 시어머니와 함께 살아온 우리 집 살림은 두 집 살림이나 다름없었다. 비교적 넓은 평수의 아파트에 살다가 식구도 줄었고, 살던 곳보다 조금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하기로 했다. 물건 정리가 필수였다.

  이사하기 석 달 전부터 틈틈이 정리를 시작했다. 아들이 쓰던 책상은 남편이 쓰기로 했고 남편이 쓰던 오래된 책상은 버렸다. 책장에 보지 않는 책들도 과감히 버렸는데 남편이 결혼하기 전에 보던 옛날 책들도 대단히 많았다.

  오래된 묵은 책들은 누렇게 색이 바래서 넘겨지지 않는 것도 있고, 40년 전 신혼 시절에 내가 쓴 가계부도 여러 권 있었다. 펼쳐보니 콩나물이 100원이라고 쓰여있었다. 요즘 콩나물 한 봉지에 2,000원 정도 하는 것을 생각해 보니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웃음도 나고 옛 시간으로 돌아가 잠시 추억을 돌아보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한 책 정리는 어마어마했다. 며칠을 정리하고 수거 전문 업체를 불러서 책을 팔았지만, 집 안에 있는 책을 일일이 끈으로 묶어놓아야 하는 작업만으로도 힘이 들어서 며칠 동안 팔이 지끈지끈 아팠다.

 책 정리에 이어서, 가구 정리를 했다. 안방에 몇십 년을 버티고 있던 나의 손때 묻은 정든 가구도 모두 버렸다. 작정하고 시작한 정리는 어마어마했다. 20년 이상 묵은 살림들을 버리지 않고 살았으니 버리는 것도 일이었다. 오래된 가구들이나 자질구레한 생활용품 버리는 것도 일일이 신고를 하고 수납을 해야 버릴 수 있어서 수거 비용만도 거의 수십만 원이 들었다.

  옷 정리도 여러 날을 했다. 나는 결혼 전부터 아동 미술 지도를 했고, 결혼 후에도 사회활동을 계속했다. 최근까지 학부모 대상으로 강의를 해왔던지라 이방 저 방 옷장은 거의 내 옷으로 빼곡하게 차 있었다. 사놓고 몇 번 입지도 않고 버리기 아까워 정리하지 못했던 옷들이 가득했다. 옷뿐만 아니라 수십 장의 스카프와 핸드백, 가방, 구두들도 정리할 것들이 많았다. 신혼여행 갈 때 입었던 원피스도 있고 핸드백도 있었다. 입을 수 없는 옷들과 신지 않는 신발들, 낡은 가방을 보니 내가 살아온 족적을 보는 것 같았다.

  나의 과거의 삶과 옛 추억을 없애는 것 같아 약간은 서운했지만, 과감히 버렸다. 의류도 수거업체를 불러서 처리했다. 그렇게 정리해도 버릴 것이 계속 나왔다. 며칠을 정리하고 나니 옷장 안이 넉넉해서 가뿐하고 기분이 개운했다.


  며칠 후 남편 것을 정리하려고 보니 남편 옷과 물건들은 너무 간단했다. 옷장에 걸린 계절별 양복 몇 벌과 겨울 외투, 등산복, 점퍼, 남방, 티셔츠도 몇 가지뿐이었다. 남편 옷이 이렇게 없었나 할 정도였다. 머플러도 몇 개 없다. 신발장을 보니 최근에 신고 다니는 신발들 몇 개뿐이었다. 남편이 평상시에 검소한 편이고 옷을 잘 사지 않는 것은 알았지만 내 것과 너무 비교되었다. 내 옷장을 볼 때마다 안 입는 것들은 좀 정리하라고 할 때 알았다고 건성으로 대답하고 듣지도 않았다. 남편의 초라한 옷장을 보면서 사회활동을 한답시고 남편에게 세세하게 신경 써주지 못했던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버릴 것도 별로 없는 남편의 헐렁한 옷장을 보면서 마음 한구석이 짠해졌다.     

  새집으로 이사 온 지 어느새 4년이 다 되어간다. 또다시 책장에 책이 한두 권씩 늘어가고, 옷장에는 새 옷들이 조금씩 또 쌓여가고 있다. 자주 들지 않는 가방도 하나둘 또 늘어간다.

 인생사 ‘空手來空手去(공수래공수거)’라고 하지 않았던가. 세상에 태어나, 떠날 때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는 게 인생인데, 인간의 물욕이 기본욕구의 본성인 듯 잘 지켜지지 않는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 책을 다시 읽어봐야 할까? 비우며 살기를 다시 실천하기로 했다. 필요하지 않은 것은 절대로 사지 않기! 단순하게 살기! 내게 남은 노후는 그렇게 살아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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