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2학년 때 쉬는 시간 10분이 참 짧았다. 때마다 운동장에 나가 축구를 했다. 금방 땀에 절어 교실에 들어오기 일쑤였다. 조금만 뛰어다녀도 얼굴이 금방 벌게졌던 터라 선생님께 어디 아프냐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선선했던 봄 날씨였다. 여느 날처럼 축구공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고개를 들어보니 반원 무지개가 피어있었다.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음이 났다. 축구도 안 했다.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 무지개가 떠 있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비 내린 후에만 무지개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기에 있는 물방울이 햇빛, 달빛에 굴절되거나 반사되면 생길 수 있다고. 나타나는 조건이 까다로워 우리는 무지개를 ‘행운’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사진에서 빗소리가 들려온다. 가끔 비는 거추장스럽다. 특히 우산을 준비하지 못했는데 집에 가야 할 때 그렇다. 어느 술집에서 그칠 때까지 마셔도 좋겠다. 하염없이 떨어지는 비를 들으면 어지러운 마음이 저절로 씻기는 듯 편안하다.
새벽까지 눈을 붙이지 못해 잠들기 위해 빗소리를 켜두었다. 그럴 때면 비 맞는 꿈을 꾸었다. 온몸에 비가 스며들어 축축했고, 한기마저 돌았다. 빗소리가 이토록 수면에 영향을 주다니. 놀란 가슴을 달래고, 이불 밑을 확인했다. 다행이었다. 빗소리가 감미롭게 들려 행여나 오줌을 지렸을까 걱정했다. 소리를 끄고 다시 잠을 청했다.
타닥타닥. 이 의성어에서 어떤 장면이 떠오르는가. 불을 품은 장작이 타오르는 모습, 누군가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올까. 사람마다 다양하게 연결 지을 수 있다. 우리는 글자를 두고 상상한다. ‘타닥타닥’은 내게 비가 지붕에 얇게 떨어지는 소리다. 이 때문에 비 오는 사진을 보면 정겨운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때론 비가 측은하다. 품고 있던 고민을 끝내 말하지 못하고, 추락을 택한 것 같아서.
비는 직선으로 고루고루 내린다. 바람이 더해지면 우산을 써도 물줄기에 맞는다. 사선으로 떨어지니 우산도 사선으로 쓸 수밖에. 비와 우산 관계가 공격과 수비를 해야 하는 대적 관계로 느껴질 때가 있다. 몸이 젖지 않기 위해 우산으로 비를 철저히 막아야 한다. 티끌이라도 스며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랄까. 어떠한 의견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오만함’을 우산 쓰는 행위에서 발견했다면 과한 해석이라 생각할 수 있겠다.
신영복 선생님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라고 했다. 여기서 비는 어려움이나 계속해서 변하는 환경을 말하는 게 아닐까 싶다. 만약 우산을 가지고 있다면 상대와 같이 쓰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하면서도, 고통을 함께 맞는 것도 꽤 멋진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