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빛의 산란

by 구직활동가

빛은 어디에서 왔을까. 지구와 1억 5천 km 떨어진, 빛을 품은 항성이 있다. 태양이다. 이 뜨거운 항성은 우리에게 빛은 물론, 대부분 에너지를 공급한다. 빛은 1초에 약 30만 km에 도달한다고 하니, 태양에서 지구까지 8분이 조금 넘는 거리다. 가늠조차 되지 않는 거리에서 빛이 도착했다.


20170907_173011-2.jpg


빛이 너무 밝아 눈부셨던 기억이 있을까. 눈 감아도 붉은빛이 스며든다. 거부할 수 없는 존재가 열렬히 사랑해 주는 느낌이다. 그러니 빛을 신의 숨결이라고 말할 수밖에.


빛이 없으면 볼 수 없다. 흔히 눈을 ‘마음의 창’이라 한다. 안팎 모두 들여다볼 수 있다는 의미다. 사진도 그렇다. 오늘날 스마트 폰으로 편리하게 사진을 찍고, 각자 느끼는 아름다움과 감수성을 표현할 수 있다. 사진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읽히고, 미묘한 파장을 만들기도 한다. 빛이 수놓은 아름다운 장면을 터치 몇 번으로, 저장하고 즉시 공유할 수 있다. 기술 발전이 만든 결과다. 포착한 결과물을 변형하고 수정하면 어떤 이미지가 원본인지 알 수도 없다. 아름다움을 소유하는 방법이 쉽고 간단해진 것이다. 이런 시대에 사진을 논하려니 민망한 마음이 든다. 그러나 스마트 폰으로 포착한 결과물만을, 사진으로 정의하는 것은 ‘사진’이라는 매체 가능성을 가두는 듯 갑갑함이 든다.


‘사진 찍는’ 행위를, 이미지 제작 과정에서 최초 단계로 보면 어떨까. 요리를 만들려면 원재료 품질이 좋아야 한다고 들었다. 주재료 없이 어떤 음식도 만들어 먹을 수 없다. 사진을 새롭게 규정지어 보자. 재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을 잠깐 멈추는 ‘일시 정지 버튼(Pause)’으로 말이다. 찰나에 찍은 샷은 버튼을 누른 사람에게 의미 있는 순간이다.


시간을 붙잡아 두었지만, 흘러가는 시간을 사진 안에 가둘 수는 없다. 포착한 아름다운 장면은 움직이지 않아 보여도 그렇지 않다. 시간은 흐르고 있다. 그러니 사진은 역설이다. 시간을 붙잡아 아름다움을 담으려 했으나 결국 이를 놓아야 한다.


시간을 멈춰 이미지를 생성한 사람, 즉 작가는 본인이 포착한 순간에 어느 정도 책임이 필요할까. 작가 윤리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버튼을 눌러, 의미를 만들고 기록했다면 그 멈춘 시간에 관해 의도를 전하거나, 왜 그 순간을 포착했는지 변명할 수 있어야 한다. 비록 그 이미지가 우리의 편견을 넘지 못해 ‘괴이하다’라는 테두리로 인식되더라도 말이다.


‘빛은 어디에서 왔을까’라는 첫 문장에서 시작된 이 글은 미완성이다. 또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무언가가 될 것이다. 사진이 그러하고, 이를 바라보는 우리 눈이 늘 새로워질 것이기에.


20191201_144449.jpg


그냥 잘 찍은 사진보다, 의미 있는 어떤 순간이 당신에게 스며들기를 바란다. 빛은 늘 우리 곁에 있다. 그 풍족함이 고마움으로 느껴진다면 지금보다 조금 더 재밌고, 따뜻하게 인생의 순간을 기록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일상을 새롭게 바라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