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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이상일 감독의 청춘물

김민정의 일상다반사(26)

by 김민정

매스게임을 중지하라, 청소 강요를 중지하라

학교는 우리들의 것이다!

1969년 고교생들의 외침 영화 <69 식스티 나인>


무라카미 류의 자전적 소설 <69>가 이상일 감독, 구도 칸구로 각본, 츠마부키 사토시 주연으로 영화화된 것은 2004년의 일이다. 그 당시 가장 인기가 있던 배우 츠마부키 사토시와 안도 마사노부를 기용했고, 그 외에도 요즘 가수로 활약중인 호시노 겐, 카리스마 있는 여자 역할을 주로 연기하는 에구치 노리코, 그밖에도 기리타니 겐타, 가세 료, 에노모토 유 등 요즘 인기가 있는 수많은 배우들이 이 영화를 통해 얼굴을 알렸다. 그만큼 화제성이 높고 작품성으로도 인정을 받은 영화이다.


1969년 사세보. 사세보는 나카사키의 항구마을로 미군부대가 있다. 영화는 미군부대 앞 철조망 앞에 선 6명의 남고생들로부터 시작된다. 겐스케(츠마부키 사토시)는 미군 부대를 엿본다. 미군부대에 들어가면 1분만에 잡힌다는 데 그게 사실인지 궁금하다. 무엇보다도 반미투쟁이 상당하던 시절이다. 미군부대에 들어가는 것만으로 엄청난 반미투쟁이며, 영웅의 탄생이다. 겐스케는 친구 가방을 미군부대 안으로 던지고 가방을 찾는다는 용건을 빌미로 철조망을 넘으려다 일본 경찰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입담이 뛰어나고 재치가 있는 겐스케는 불량학생까지는 아니지만 말썽꾸러기다. 겐스케의 꿈은 미국처럼 페스티발을 여는 것이다. 1969년 8월에 열린 우드스톡 페스티벌과 같은 영상과 음악이 한데 어우러진 축제를 재현하는 것. 이 축제에 손님을 모으려면 잘생긴 남학생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에 아다마(안도 마사노부)를 영입한다. 탄광촌 출신으로 하숙을 하며 지내는 아다마는 사투리가 심하고 직설적인 성격이다. 간신히 아다마를 영입했는데 영상을 찍으려니 비디오 카메라가 없다. 그래서 대학 동아리를 찾아가지만 반미투쟁에 한창인 대학생들은 투쟁과 관련이 없는 이유라면 비디오 카메라를 빌려줄 수 없다고 거절한다. 궁지에 몰린 겐스케는 “학교 옥상을 바리케이드 봉쇄하겠다”고 선언해 버린다.


그리하여 여섯 명의 절친과 투쟁에 발을 디딘 고교생 여러명은 개학을 코앞에 둔 어느날 문이 잠긴 학교를 담넘어 들어간다. 복도마다 페인트칠을 하고 책상과 의자를 전부 밖으로 던져 버린다. 바리케이드 봉쇄는 성공했지만, 이들의 행각은 금세 경찰에게 발각된다.


경찰(구니무라 준)은 겐스케를 추궁한다. “애들이 다 불었어. 다들 네가 리더래. 네가 리더 맞지? 할 말이 있으면 해 봐.” 그는 냉정하고 침착하다. 경찰에서 풀려낸 겐스케와 그 친구들은 모두 정학을 당한다. 겐스케의 아버지만은 “네가 믿고 한 일”이라며 “너는 영웅일 수도 있어, 혁명이 일어나면”이란 말로 겐스케를 위로한다.


1969년의 일본은 어떤 시대였나. 돌아보자. 1월 2일부터 나라가 뒤숭숭했다. 경제적으론 육이오 전쟁 특수의 단맛을 제대로 본 일본은 1964년에 도쿄올림픽을 치르고 1965년에 한일합의를 한 후, 한국으로도 발을 뻗을 수 있게 되었고, 고도경제성장에 완벽하게 돌입했다. 그러나 그 뒤에는 패전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일본이 패전한 후, 패잔병들은 자신들의 속내를 어디에도 터놓을 수 없었고, 패잔병 중 한 명이던 오카자키 겐조가 1월 2일 국민들에게 인사를 하러 나온 일왕에게 파친코 구슬을 세 발 발사했다. 일왕을 직격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오카자키는 재판에서 성기를 드러내고 검사에게 소변을 봤으며 판사에게 침을 뱉었다. 그후 오카자키는 전쟁에서 일본군인들이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를 끊임없이 폭로했고, 80년대에는 그의 다큐 <유키유키테 신군>이 발표되어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 뒤숭숭함은 곧 1월 18일 도쿄대 야스다 강당 공방전으로 이어진다.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반전 운동이 전세계적으로 불거지던 시점, 일본 학생들에게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원흉이었다. 때문에 미일안보조약 자동 연장을 막고, 미일안보조약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는 좌익학생들이 60년대 말 반미를 외치며 투쟁을 계속했다. 도쿄대도 마찬가지였다. 그와 동시에 등록의제도에 반대하는 도쿄대 의대생들이 야스다 강당을 점령하고 투쟁을 시작하자 주장이 다르지만 입장이 비슷한 타대학교 학생들까지 몰려들어 투쟁에 가담했다. 경찰들은 살수차로 물을 퍼부었고, 학생들은 돌멩이와 화염병을 던졌다. 그리하여 600여명의 학생들이 체포되었다.


1969년 도쿄대는 졸업식도 치르지 못했고, 입학시험도 치르지 못해 이듬해인 1970년 도쿄대 입학생은 0명이었다. 당시 이 투쟁에 참여한 어느 학생은 전설의 학원강사가 되어 아직도 물리강사로 이름을 떨치고 있고, 누군가는 일본판 GQ의 편집장이 되었으며 어떤 이는 야당에서 어떤 이는 여당에서 정치를 하고 있다. 야스다 강당은 폐허가 된 채로 남아 창고로 사용되다가 1989년 보수 공사를 한 후, 강당으로 다시 사용되고 있으며, 재개 당시 스티븐 호킹 박사가 와서 강연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월 19일에는 메이지 대로를 해방구로 쓰겠다는 ‘간다 카르체 라탄’투쟁, 5월에는 리츠메이칸 대학에서 학생들이 전쟁 체험을 담은 조각 와다츠미상을 박살냈으며, 10월 국제 반전의 날에 신주쿠에서 대형 시위를 해 이를 진압하러 나선 기동대와 싸우다가 1500여명이 경찰에 붙잡혔다. 도쿄대 야스다 강당 투쟁 이후 경찰들의 추적과 진압은 더 강화되고, 결국 일본 학생들 중 일부는 데모를 그만두거나, 경찰 무기고를 털어 산으로 도망가거나 북한이나 중동으로 떠나기도 한다. 무기고를 털어 산으로 들어가 학생들끼리 살상한 ‘아사마 산장 사건’이 1972년에 발생했고, 요도호를 납치해 북한으로 간 것이 1970년이며, 일본 적군파 간부이자 마녀라 불렸던 시게노부 후사코가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와 연계해 여러 테러 사건을 일으킨 것도 1970년부터다.


영화 <69>에 나오는 학생들은 외국문화의 영향을 받고 컸다. 이들은 레드 제플린의 음악을 듣고 고다르의 영화를 본다. 도쿄대 야스다 강당 봉쇄의 영향으로 자신들이 다니는 고등학교를 봉쇄해 버린다. 그리고 미국처럼 자유로운 페스티발을 열려고 한다. 베트남 전쟁에 반대한다, 미국과 안보조약을 맺지 말라고 부르짖으면서도, 미국의 페스티발을 동경하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자유를 외치는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 일본의 학교는 여전히 군국주의적인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외국물을 먹은 청소년들에게 이런 학교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곳이었다.


방과 후에 여학생들에게는 매스게임 연습을 시키고, 남학생들에게는 오래달리기를 강요하고, 모든 학생들에게 청소를 요구하며, 조금만 잘못해도 손찌검 수준이 아니라 폭행을 가하는 체육교사. 어떤 면에서 일본의 69년은 한국의 89년과도 닮아 있다고 할까?


체육교사에게 혼이 나면서 겐스케는 이렇게 외친다.

“교실로 돌아가게 해주세요. 저는 학비를 냅니다. 수업을 들을 권리가 있습니다.”

즉 1979년의 고교생들은 외국물을 먹고 자랐고, 대학생들이 벌이는 데모 냄새를 흡입하여, 어떻게나마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해 보고자, 도전을 했다고 풀이할 수 있다. 무라카미 류도 그런 이야기가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시 보면 당시의 투쟁은 지금 시점에서 보면 조금 유치하고 단순하다. 학교에 낙서를 하는 것, 책상과 의자를 학교 밖으로 집어 던지는 것, 교장실 책상 위에 변을 보는 것 수준이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아마 그 시절에는 그것이 가장 큰 도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유효했다. 그리하여 이 학생들은 페스티발을 열게 되었고, 매스게임과 오래달리기와 청소는 모두 사라졌다. 어쩌면 투쟁을 해서 무언가를 얻을 수 있었던 거의 마지막 시대가 아니었는지 모른다. 그 후 일본의 학생운동은 거의 모두 사라졌으니까.


역시나 여성혐오적인 부분들도 빠뜨릴 수 없다. 좌익 투쟁을 하는 여학생들을 못생긴 여학생으로 그린다거나 고릴라로 부르는 장면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주인공 겐스케는 여학생들이 방과 후에 해야 할 일은 학교에 남아 매스게임 연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수영복을 입고 바닷가에서 신나게 노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에 절반은 동의한다. 그는 여학생들도 함께 투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학생들과 연대할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투쟁은 남학생들의 몫이고 여학생들은 바닷가에서 수영복을 입어주어 눈요기거리가 되어주면 그만이란 것이다.


시나리오를 담당한 구도 칸구로는 극단 <오토나케이카쿠(어른계획)>의 작가로 데뷔해,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에 스토리를 제공한, 현재 일본에서 가장 잘나가는 각본가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여성들은 이 영화에서와 비슷하게 소비된다. 이상일 감독의 행보도 여성주의적이지는 않다. <훌라걸스>로 한국에도 알려진 이상일 감독의 최신작 <유랑의 달>은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소아성애의 남자가 여자아이를 자기 집에 데려갔다가 유괴범이 되었는데, 이 여자아이가 커서 그 남자를 찾아왔다. 복수를 하려고? 그러면 다행이다. 연애를 하려고 찾아온 것이라니 설정부터 놀랍다. 이상일 감독의 대다수의 작품이 남성 범죄자의 변명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으로서 나는 종종 아쉽단 생각이 든다.


여하튼 1969년, 좌파와 우파가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시절. 고교생들은 대학생들을 흉내내며 학교를 봉쇄한다. 이런 깜찍한 학생들을 학교에선 폭력으로 벌하고 정학 처분을 내린다. 그럼에도 그들은 당당하게 끊임없이 투쟁한다. 우리에겐 수업을 들을 권리가 있다, 매스게임과 청소를 시키지 말라!라고. 그해 여름은 분명 뜨거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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