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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뜬금없다, 청춘을 박제하라

김민정의 일상다반사(25)

by 김민정

<썸머 필름을 타고>가 여고생 삼총사의 영화 제작 프로젝트였다면, <린다 린다 린다>(2005년 개봉)는 여고생 사총사의 밴드 프로젝트다. 때는 2004년, 여름이다. 그리고 고등학교 축제가 그 무대다. 여름, 축제, 고교생! 말할 것도 없이 ‘청춘’이다!


고등학교 축제가 열리기 전날, 여고생 사총사 밴드에 이변이 생긴다. 기타 담당의 손가락이 부러졌고 그 일을 계기로 보컬과 키보드 사이에 싸움이 나서, 밴드가 해산에 이른 것이다. 여고생 사총사뿐만 아니라 평소 이들을 관심있게 지켜보던 밴드부 담당 교사도 한숨을 내쉰다.

결국 기타와 보컬이 빠진 후, 케이와 노조미와 교코는 새로운 보컬을 찾아 나선다.

“저기 모퉁이 보이지? 저 길로 가장 먼저 나타난 사람이 보컬이야.”

이렇게 엉뚱한 제안을 한 것은 키보드를 담당했다가 기타를 맡게 된 밴드의 리더 격 케이다. 케이의 제안이 뜬금없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어찌할 수도 없는 일이다. 내일이면 축제가 시작되고 3일 후엔 무대에 서야 한다.

한 통통한 남학생이 나타난다.

“여자였으면 좋겠다.”

노조미가 말한다. 셋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바로 그때 저 멀리로 키가 큰 여학생이 한 명 보인다. 송이다.

“야, 송, 밴드 할래?”

“네.”

“보컬인데 할래?”

“네.”

송은 그냥 네라고만 대답한다. 송은 일본어를 잘 모르는 유학생이다. 이 송이라는 유학생 역을 배두나가 맡았다. 어깨가 구부정하고 일본어를 못하니 어딘가 어리바리하다. 한국어를 섞어서 쓰고 일본어에는 주로 “하이(네)”라고만 답한다.

케이, 노조미, 교코는 송을 데리고 밴드부 실(경음악부)로 가 대뜸 <블루하츠>의 노래들을 들려준다. 그녀들은 <블루하츠>의 곡들을 이번 무대에서 발표할 예정이다. 이 또한 아주 우연히 결정되었다. 잘못 튼 테이프 속에서 흘러나온 노래가 <블루하츠>였다. 송은 <블루하츠>의 ‘린다린다린다’라는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려 버리고 만다.

“시궁쥐처럼 아름다워지고 싶어. 사진에는 찍히지 않는 아름다움이 있으니까/언젠가 내가 그대를 만나 이야기를 하게 되었을 때, 그때가 온다면 부디 사랑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되어 있으세요” 눈물을 쏟은 송은 보컬을 하겠다고 승낙하다.


<블루하츠>는 1985년에 결성되어 1995년에 해산한 남성 사인조 밴드로 현재는 다른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일본에서 80년대를 보낸 사람들에게 <블루하츠>는 전설이고 청춘이다. 어떤 면에선 신해철의 <무한궤도>와도 약간 닮아있다. 87년에 발표한 ‘린다린다린다’는 아직도 응원송으로 불리며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그야말로 ‘청춘’의 대명사다.


사인조 여고생 그룹은 3일 후 발표를 앞두고 밤낮없이 연습을 한다. 배두나, 우리들의 송은 노래방을 찾아가 <블루하츠>의 노래들을 불러보고, 케이는 오랜만에 잡은 기타가 손에 익지 않아 고생 중이다. 각자 학교 축제에서 크레이프도 팔아야 하고 한일문화교류 부스도 지켜야 해서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다. 틈틈이 만나 대화를 나누고 화음을 맞춰본다. 절망적으로 조금도 어루러지지 않는 음색 속에서도 이 사인조는 마냥 신나게 웃는다.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웃음이 터지는 나이다. 케이의 전 남자친구 스튜디오를 찾아가 연습을 하고, 노조미의 집에 가서 요리를 해먹고, 아무도 없는 학교에 몰래 숨어 들어가 목소리를 낮추고 노래 연습을 한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린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고백을 받고 누군가에게 고백을 한다. 송을 좋아하는 남학생은 열심히 한국어를 연습해와서 송에게 고백한다. “쓰레기 소각장에서 너를 봤어. 사랑해.”라고 말이다. 송은 이 고백이 어색하기만 하다. 송은 그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쓰레기 소각장에서 잠시 스쳐지나간 남학생은 송의 기억엔 손톱만큼의 스크레치도 남기지 않았다. 비비빼다가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좋아하는 것도 아니야”라고 말하고 뛰어나가는 송. 남학생은 그래도 눈치를 못채고 어디 가느냐고 묻는다.

인생은 우연이다. 우연히 유학생 송은 밴드의 보컬이 되었고 아주 우연히 <블루하츠>의 곡을 노래하게 되었고 외롭던 유학시절에 한줄기 단비같은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 그리고 자주 쓰레기를 버리러 간 탓에 황당한 고백까지 받게 되었다. 이런 소소한 것들이 모두 추억이 되는 순간이 있다. 바로 청춘이다.

사인조 고교생 밴드가 아무리 열심히 연습을 해도 무대 위에선 제실력을 발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음악이 아무리 좋아도 음악으론 먹고 살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아무렴 어떠랴. 소소한 추억들이지만, 그것이 밥을 먹여주지는 않겠지만, 꺼내보고 또 꺼내볼 추억이 될 것이다. 그렇게 추억은 박제될 것이다.


여담이지만 고교시절에 연극을 했다. 무대에 서고 싶었다. 그게 연극이든 밴드든 코미디든 뭐든지 좋았다. 악기나 노래보다 조금 수월하다 싶어서 연극부에 들어갔다. 그 시절 나의 대사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봄방학 때 학교에 가서 연극에 쓰일 대형 소품을 제작한 기억만은 또렷하다. 물감 범벅이 되어 그림을 그리고, 수다를 떨고, 정신없이 웃었다. 나는 이제 다른 사람을 연기할 수는 없지만, 그 시절엔 중국 영화배우 ‘궁리’(당시엔 궁리라고 불렀고 요즘은 공리라고 한국어로 쓴다)를 꿈꿨다. 하지만 아무런 도전도 하지 못하고 나의 청춘은 지나갔다. 그나마 학교 강당 무대에 섰다는 것, 그것 하나를 건졌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하고 싶은 일에 마음 편히 먹고, 열정적으로 돌진할 것! 오디션에서 떨어지면 어떤가. 그런 마음을 그 시절에 가질 수 있었다면 나에겐 지금쯤 새로운 직업이 아니라, 새로운 추억이 남았을 것이다. 어차피 인생은 뜬금없고, 인연이나 우연은 더욱 그러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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