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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May 04. 2018

너는 꼭 행복해지길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2018, 션 베이커 감독)


  눈 마주치는 순간 사람을 홀려 버리는 영화 포스터들이 있다. 내겐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그랬다. 색감만 보면 라라랜드 뺨을 치는 느낌이었지만 포스터만으로는 이 영화의 내용이 감이 오지 않았다. 사실 예고편 영상을 봐도 그랬다. 분명 내용이 이게 다가 아닐 텐데 무니의 먹방에만 초점이 맞춰진 예고편은 이유를 알 수 없다고 생각했으나, 보다 보니 또 이해가 갔다. 주인공 무니는 사람을 홀리는 매력이 있었다. 그 예고편에 끌려 나도 극장으로 향했으니.


  개인적으로는 한참을 시름시름 앓던 때였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계절이었고, 주변 사람들을 손 닿지 않는 곳으로 많이 떠나보낸 시기였다. 그런 일련의 사건들이 바람처럼 갑자기 불어와 나를 쳐대다 기어이 꺾어 놓았고, 꺾이고 심란해진 마음으로 매일같이 생각했다. 세상이 조금 더 무해하면 좋겠다고, 아이들에게 그리고 한때 아이들이었던 이들에게. 억지로라도 시간을 한 단락 잘라내지 않으면 앞으로의 시간을 살 수 없을 것만 같아, 일부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본 영화였다. 무니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며 힘도 내고 기분 전환도 하려던 심산이었는데, 막상 보니 그때까지 하고 있던 생각에 방점을 찍는 영화였다. 이쯤되면 운명이려니 하고, 나는 꺾인 것들을 스스로 접어들였다.




  영화는 모든 것들을 직접 설명하기보다 천천히 풀어 보여준다. 시간을 더 들여서라도 하나씩 다 공 들여 눈앞에 들이댄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를 따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무니라는 6살 아이와 무니를 둘러싼 세계를 알아간다. 그 세계는 화려하지만 친절하지만은 않다. 영화 속 세계는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배경은 디즈니랜드 근처의 조악한 모텔촌이다. 연보랏빛과 노란빛으로 알록달록하게 칠한 모텔 건물이나 아이들의 옷 색깔이 부드럽게 얽혀들면서 환상처럼 고운 색감을 보여주지만, 현실 인식만큼은 거의 봉준호의 영화만큼이나 서늘하여, 모텔 침대에는 빈대가 득실거리고 아이들이 입는 옷가지는 몇 벌 되지 않는다. 생뚱맞게 봉준호에 비유하는 게 적절치는 않지만 그 온도만큼은 그 정도라는 의미에서.


  모텔방은 침대 하나면 거의 꽉 차는 작은 방인데다가 욕실도 작고, 당연히 부엌은 없다. 하루이틀 머물 수는 있을지언정 거주지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나 6살 무니와 그 엄마 핼리는 그곳에 “살고” 있다. 핼리와 무니뿐 아니라 무니와 함께 노는 친구 스쿠티도 엄마와 함께 그 모텔에 살고, 또 다른 친구 젠시가 사는 곳도 조금만 더 걸어가면 나온다.


무니를 둘러싼 세계는 사탕 봉지처럼 화려하게 색칠되어 있지만 그 내부는 조악하고 차갑기 그지없다.


  이 집이고 저 집이고 비슷비슷하다. 영영 동심으로 사는 디즈니랜드 코앞이어서일까, 책임을 질 법한 '어른'을 찾아보기 힘든 세계다. 아빠들은 아예 없고 엄마들도 너무 어리다. 6살 무니의 엄마라고는 하지만 핼리는 그대로 데려다가 하이틴 로맨스를 찍어도 될 만큼 어린 나이다. 스쿠티의 엄마 애슐리도 핼리와 함께 놀러 나갈 때 보면 아직 어린 티가 풋풋하다. 젠시는 그런 엄마도 없이 아예 할머니 손에 맡겨진 채다.


  그런 현실이지만, 영화는 회색 톤의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오히려 무니와 친구들이 노는 모습을 많이 보여 주면서 아이들이 보는 파스텔톤 세계를 담아낸다. 이래서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도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 하나 보다. 희극보단 분명 비극에 가까운 인생이지만... 6살짜리들이 알면 뭘 얼마나 알까. 쓰러져서도 자라는 나무들처럼 아이들은 자란다. 아이들이 보는 세계는 그냥 아이들의 세계다.



  아이들이 서로를 부르는 모습이나 같이 노는 모습은 내게도 너무나 익숙한 광경이었다. 시골 아이들은 어릴 때 다 저렇게 놀았다. 물론 선풍기에 대고 인디언처럼 소리를 내거나 아이스크림을 먹거나 하는 건 어디서나 했겠지만... 아무도 살지 않는 빈 집이나 시골의 애매한 공간들을 걸어다니거나 동물들을 보면서 있는 그대로보다 더 과장된 현실을 상상하는 건 주변에 인프라가 별로 없는 동네 아이들의 특징이었다. 빈 집을 무도회장이라고 말하거나 소 몇 마리를 보고 사파리라고 하는 건 아이들의 풍성한 상상력인 동시에, 그런 근처도 갈 일이 없었던 무니가 TV로 익힌 세상을 확장해 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실상 집에서 먹는 건 피자 혹은 와플 정도지만 막상 식당에 가면 식재료의 이름과 음식을 줄줄 말하며 음식을 즐겁게 먹는 무니의 '먹방' 세계 또한 그렇게 확장되어 온 것일지도.



  그리고 그렇게 노는 아이들 근처에 언제나 모텔 관리인 바비가 있다. 바비는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고, 이따금씩 이 오갈 데 없는 영혼들을 보호하는 모습도 보여주어 관객 마음을 든든하게 하는 인물이다. 아이들이 놀고 있는 곳에 수상한 사람이 나타나 얼쩡거리자 바비는 아이들이 놀라지 않도록 그를 한쪽으로 끌어낸 다음 불같이 화를 내며 다시는 이곳에 발도 들이지 말라고 거세게 말한다. 오갈 데 없이 모텔에 사는 사실상의 홈리스들을 이따금씩 그가 지켜주는 건 그의 투철한 직업 의식이다. 그의 직업 의식이 최소한의 안전망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러나 그 또한 감정에 서툴며, 결정적인 순간에는 도움의 손길을 뻗을 수 없다. 결국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지만 사실 태어나서 본 게 온통 문제뿐이라 자기가 처한 상황이 문제인지도 모르는 아이들의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모텔촌을 둘러싼 사람들을 한 바퀴 돌며 천천히 비추고 나면, 영화는 핼리와 무니의 이야기지만 그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사실 이 영화는 이 영화에 나오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스크린 너머에 실재하는 사실상의 홈리스들, 미혼모와 어린아이처럼- 사회 지반 어딘가가 무너져 내릴 때 가장 먼저 내려앉는 이른바 “취약 계층”들. 이 영화는 현실에 색채를 칠해 “영화답게” 담음으로써 관객 앞에 현실을 더욱 가까이 들이밀었다. 다큐보다 더 마음을 둥둥 쳐대는 픽션, 어떤 엄중한 말보다 더욱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천진한 아이의 얼굴.



  그중에서도 결말은 정말 압권이었다. 누구라도 알아챌 만큼 한 번에 휙 영화의 결이 바뀐다. 색감이 바뀌고 음악이 바뀌고 시선이 바뀌고... 세상이 바뀐다. (해당 장면만 아이폰으로 찍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결말 이후의 삶을 궁금해하게 만든다. 스크린 속의 캐릭터가 생생해서 어딘가 있을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종종 있기는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주인공이 제발 행복하기를, 스크린 이후에 부디 좋은 일들만 있기를 이렇게 간절히 바라며 일어선 적도 없었다.


  이유를 안다. 무니는 영화 속에만 사는 아이가 아니다. 션 베이커 감독은 이 영화를 미국인들이 많이 보아주면 좋겠다고, 개인적으로는 상 욕심이 없지만 이 영화만큼은 상을 받아 언급되고 소비되기를 원하는 마음을 밝혔다. 그 이유도 명확히 말했다. 이건 미국에 실재하는 정말 무거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핼리와 무니는, 제 나름의 방법대로 최선을 다하지만 아직 어린 미혼모와 아직 너무 어린 아이는, 이 세상에 수천 수만 가지 이야기로 변주되는 초상의 한 자락이다. 이들이 왜 디즈니랜드 주변의 모텔촌에 살고 있는지 궁금해한다면, 제목이 왜 <플로리다 프로젝트>인지 궁금해한다면 우리는 스크린 너머의 무니를 만날 수 있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디즈니월드를 처음 지을 때 일대를 정돈하면서 해당 작업에 붙인 이름이었고, 지금은 집 없는 이들에게 보조금을 지원하는 사업명이다. 디즈니랜드 인근은 “히든 홈리스Hidden Homeless”라 불리는, 핼리와 무니처람 사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션 베이커 감독은 이들의 삶을 “불행 포르노”처럼 담지 않으면서도 훌륭하게 문제 제기를 해냈다.


  알게 모르게 그런 시선을 느낄 때가 있다. 후원 받는 아이라면 응당 받는 것에 무조건적으로 감사해야 한다는 생각, 혹은 기본적인 의식주 외의 것들을 후원으로 채워선 안 된다는 생각 같은 것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받는 아이 입장을 배려하지 않아 전달하기 곤혹스러운 선물을 강요하거나 생필품 외의 것에 후원금을 사용하는 순간 도끼눈을 뜨고 비난을 던지는 이들이 있다.


  물론 가난하면 불행할 수 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이 가난할 때 우리는 불행으로 치닫기 쉬운 조건을 더 많이 안고 살게 된다. 그러나 가난하다고 행복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아프리카에서 후원 받는 아동이라고 해서 모두 엇비슷한 표정을 하고 엇비슷한 생각을 하며 엇비슷한 삶을 살아야만 하는 건 아니다. 무니가 무니이듯, 스쿠티가 스쿠티이듯, 젠시가 젠시이듯, 각자의 성격이 있고 개성이 있고 웃음이 있다. 아이들은 불행 한가운데서 있어도 불행에서만 살지 않는다. 놀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이런 걸 잊어버린다면- 역설적으로 우리는 시혜적인 시선 속에서도 타인의 인격성을 깔아뭉갤 수도 있다.


  무니를 보고 나오는 길 나는 오래오래 무니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무니를 생각했다. 그건 오래 전 인도의 골목골목을 헤치고 다니며 에이즈 아래 신음하는 '가난한' 집을 방문하고 나서는 길이면 늘 하던 버릇이었다. 무니를 보고 나오는 길은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이 아니라 세파에 지지 않고 자라는 어린아이 하나를 만나고 나오는 길이었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반짝거리는 사탕 봉지처럼 알록달록하게 색칠되어 있지만 벗겨 보면 조악하고 차갑고 텅 비어 있는, 그런 세상을 순식간에 뒤집을 수는 없다. 그러나 바라건대 무니가 좀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만나서 인사라도 나누었다면 분명 좋은 친구가 되었을 무니가 세상 어딘가에서 웃고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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