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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Jan 11. 2020

무너진 곳을 바라보는 방법

영화: 사마에게 (2019, 와드 알-카팁/에드워드 와츠 감독)


   국제면 기사를 읽는 사람이라면 뿌연 먼지와 피를 뒤집어쓴 시리아 아이들의 얼굴을 자주 보았을 터다. 언제부턴가 그 얼굴들은 잘 울지도 않는다. 세상 다 산 듯 허공을 보는 멍한 얼굴은 더 슬펐다. 차라리 울고 발을 구르고 화라도 낼 수 있었으면. 그러나 사진으로만 실려오는 아이들은 나와는 딴 세상에 살고 있어, 그들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다른, 이라는 말과 딴, 이라는 말 사이의 간극을 생각한다. 다르다는 말보다 어쩐지 더 먼발치에 있는 것 같은 딴, 이라는 말. 그 딴 세상의 목소리를 <사마에게>는 우리에게 데려다준다. 딸에게 바친다는 영화, 맑고 아름다운 "하늘"이라는 뜻의 그 이름에게 보여주려고 담은 이야기. 이 이야기는 딴 세상의 굄돌이 되어 우리의 간극을 메운다.


   작년 요맘때 개봉한 <가버나움>이 논픽션을 고스란히 담아낸 픽션이었다면, <사마에게>는 픽션보다 더 픽션 같은 논픽션이다. 요르단 난민촌에 있는 시리아 난민의 가족을 3년 간 따라가며 담아낸 다큐멘터리 <작은 영혼>이 흩어진 이들의 유리창 파편 같은 이야기라면, <사마에게>는 시민군의 거점 도시였던 알레포에 끝까지 남은 이들의 기록이자 유리가 깨진 창틀 같은 이야기다.



- 시사회에 초대받아 관람한 후 작성한 글로, 개봉은 1월 23일입니다.


   시리아는 오래전부터 수많은 이들의 숨결과 발자국이 켜켜이 쌓여온 곳이다. 고대 문명 발상지와 대국들에 둘러싸여, 자연히 도시가 발달하고 길이 넓게 트였다. 어쩌면 우리는 그냥 시리아라는 이름을 한두 번 흘려듣고 말 수도 있었다. 우리 대부분의 일상에 부르키나파소 혹은 니카라과 같은 나라 이름이 잘 등장하지 않듯, 시리아라는 국명도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독재 정권에 맞선 혁명, 유혈 진압, 내전으로 차곡차곡 흘러온 상황은 결국 시리아 하면 자동 검색어처럼 뒤에 난민이란 단어가 따라붙는 지금 상황을 빚어냈다.


   시리아 난민이라는 단어는 구호단체의 브로슈어나 국제면 뉴스, 관련 책 같은 곳에서 많이 보인다. 아주 바르고 뭔가 공식적인 느낌이 드는 곳에서. 그러다 보니 나는 자주 잊는다. 그곳에도 아기가 태어나고 인큐베이터에 들어간다는 걸. 내린 눈을 꾹꾹 눌러 사랑한다고 쓰는 남편과 임신 사실을 어떻게 알릴지 고민하며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아내가 산다는 걸. 장학금을 타는 우등생과, 친구를 흉내 내며 놀리고 낄낄대는 젊은이들이 있다는 걸. 아니 있었다는 걸.



   이 영화를 만든 와드는 열여덟에 고향 집을 떠나 알레포 대학에 들어갔다. 그리고 대학생으로서 혁명을 맞았다. 그때부터 와드는 카메라에 알레포 시내를 담았다. 혁명이 어떻게 피로 진압되는지, 내전이라 부르지만 약자에겐 대책 없이 당하는 날일 뿐인 시간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그 내내 본인과 친구들이 어떻게 알레포에 남아 버텼는지 꾸준하게 기록했다. 자연히 카메라는 시리아의 정국만큼이나 속절없이 흔들리지만, 공포와 절망이 일상에 자욱하게 번져와도 끝내 몇 년간 기록을 멈추지 않았다는 그 신념만큼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와드의 카메라에는 다양한 저항의 모습이 들어있다. 시민군 거점이었던 도시 알레포는 한때는 승리를 예상하며 축포를 터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상황이 바뀌고 알레포는 포위되어, 공습 소식만이 들려온다. 사람들은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틴다.


   시장통에서 체스를 두는 노인은 이야기한다. 왕을 잡아야 이기는 것이니, 아사드 정권을 잡아야 이게 끝날 거라고. 노인 특유의 재치가 담긴 그런 말도, 부모님이 떠나도 여기 남겠다고 말하면서 그 상상만으로 눈물을 감추지 못하는 소년의 표정도... 알레포에 남아있다는 자체로 모두 저항이었다. 그중 와드와 함사 부부는 아주 적극적인 몸짓을 계속한다. 와드가 카메라를 잡고 그 모든 장면을 담는 동안, 함사는 의사로서 환자를 붙든다. 그러는 동안 함께하던 이들을 잃기도 하고, 공습을 겪기도 한다. 기적적으로 살아난 환자를 보며 희망을 품기도 하고, 끝내 눈을 감은 아이와 그 가족들을 보며 착잡한 한숨을 쉬기도 한다.



  그 와중에 태어난 첫 아이 사마는 그야말로 봄날의 환한 빛 같은 존재였다. 아이에게 좋은 것만 주고 싶은 마음이 오죽했으랴만 두 부부는 계속해서 알레포에서 버틴다. 그냥 버티는 게 아니라 매일 죽음의 냄새와 싸우면서, 자기 할 일을 놓지 않으면서 버틴다. 이건 그 치열한 날들의 기록이다.



   말로만 듣던 곳을 영화로 보겠구나 생각했는데, 말로도 듣지 못한 곳을 보았다는 기분이다. 난민들의 삶 그 뒤에 있던 것들. 성실하고 평범한 일상인이었던 시절과, 그 모든 걸 상실하고도 버틴 시절의 이야기. 알수록 처참함은 깊어진다. 초등학교나 갔을까 싶은 어린아이조차 길가에 서 있는 버스가 왜 까맣게 탔는지 정확히 안다. 폭탄을 맞았다는 것, 심지어 그 폭탄이 확산탄이라고 정확하게 그러나 해맑게 대답한다. 누가 이 어린아이에게 그런 복잡한 단어를 가르쳤을까. 왜 아이들을 무릎에 껴안고 들려주는 이야기가 폭탄과 공습에 대한 내용이어야 하나.


  정답은 어디 있을까 찾고 싶어진다. 패권국가에겐 답이 없다는 걸, 이 상황을 해결해 줄 슈퍼 히어로 같은 권력은 존재하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다만 이 영화에서 나는 정답을 보았다는 기분이다. 이상하지만 극도의 절망에서 희망은 묵묵히 일하고 있다. 쓰던 병원 건물이 공습을 당했다는 같은 상황에서 함사와 와드는 전혀 다른 일을, 각자의 일을 한다. 함사는 곧장 그 건물을 대체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나서고, 와드는 무너진 곳의 면면을 새록새록 카메라에 담아둔다.


  무너진 곳을 보고 섰을 때, 누군가는 그곳을 세울 생각을 하고 누군가는 그 흔적을 기록할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건 어쩐지 다큐 속 어떤 어린이가 장래희망을 이야기하는 장면과도 이어지는 것 같다. 건축가가 되어 도시의 무너진 곳을 다시 세울 거라고 대답하던 아이. 어딘가에 자기는 작가가 되어 이 모습을 기록하겠다 대답하는 아이도 있을 것이다. 그 아이들에게도 사마에게도 이 기록은 역사가 될 것이고, 언젠가 그들이 그들의 역사를 새로 쓸 날도 올 것이다.


   가끔은 인류에게 답이 없는 것 같다는 절망도 올라온다. 학살의 양상은 늘 비슷해서, 1980년의 광주도 2015년의 시리아도 2018년의 홍콩도 얼핏 보면 비슷해 보이니까. 그러나 절망에 맞서는 인간의 방법은 언제나 같으면서도 새롭다. 우리는 무너진 곳에 맞서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낸다. 괴로움을 쉬이 덜어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폐허에서 버틸 힘을 하루하루 이어가는 것이다.



   끔찍한 일이 너무 많은 세상에서 우리의 힘은 그것뿐이다. 슬퍼할 여유도 없는 곳에서 슬픔을 기록하며 전달하는 것. 그리고 무너진 자리를 끝까지 다시 세우는 것. 그 기록을 소중하게 보관하고 서로에게 건네며 기억하는 것. 서로 일손을 보태는 것. 그냥 계속하는 것.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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