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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May 04. 2018

길이 없으면 만들어 가자

영화: 당갈(2016) + 시크릿 슈퍼스타(2017)


  훌쩍 긴 러닝타임과 그 대부분을 잡아먹는 군무 장면, 어이가 없을 정도의 과장과 그럼에도 풍기는 엄격한 진지함, 잊을 만하면 나오는 힌두교 색깔... 인도 영화는 그 규모에 비해 너무나 낯선 영역이었다. 다소 난해하고 멀게만 느껴지던 발리우드를 우리에게 가까이 데려온 건 8할이 아미르 칸이다. <세 얼간이>를 필두로 해서, 우리에게도 통하는 유머, 우리에게도 공감되는 메시지를 담은 인도 영화를 하나하나 끌고 왔다. 샤룩 칸도 유명하고 살만 칸도 유명하지만 한국에서 칸 중의 칸은 역시 아미르 칸이다. 그가 소중한 영화를 하나, 아니 둘이나 더 데려왔다. 레슬링을 하는 딸들과 아버지의 사랑이 빛나는 영화 <당갈>, 그리고 <당갈>의 피드백처럼 아쉬운 점을 촘촘하게 채우며 나타난 영화가 바로 <시크릿 슈퍼스타>, 노래하는 딸과 어머니의 사랑이 빛나는 영화다.



  <당갈>은 얼핏 보면 전형적인 스포츠 영화다. 전직 레슬링 선수이자 전국 챔피언까지 되었던 마하비르 싱 포갓(아미르 칸 분)은 국제대회를 앞에 두고 레슬링을 그만두게 된다. 비인기 종목이라 지원도 없는 레슬링 선수의 길을 계속 가기엔 집안이 너무 가난했고, 현실을 직시하라는 아버지의 차가운 말이 그의 마음을 꿇어 앉혔다. 그러나 못 다 이룬 꿈은 차마 잊을 수가 없어 그는 아들을 낳아 레슬링 메달리스트로 키우리라 굳게 다짐했다.


  그런데 웬걸. 딸만 넷이 태어난 것이다. 처음에는 곧 아들을 낳을 수 있지 않을까, 이 다음엔 아들을 낳겠지, 하고 기대하던 그도 넷째까지 태어난 후엔 희망을 접는다. 메달과 신문 기사 스크랩 등등 찬란했던, 그러나 색이 바랜 꿈의 흔적들을 캐비닛에 집어넣으며 그는 씁쓸하게 뒤돌아선다. 그러면서도 아들을 못 낳았다며 어쩔 줄 몰라하는 아내에게 "당신 잘못 없다", "기타와 바비타는 소중하다. 오해하지 마라"고 말한다. (이 대사는 스토리의 큰 흐름에서 간과하기 쉬운 대사임에도 예고편에까지 들어가 있다. 불필요한 논란을 막기 위해 일부러 힘주어 넣은 대사라는 게 느껴진다.) 다만 그의 꿈이 꺾였을 뿐이다.


  그러나 동네 남자아이들과 시비가 붙었을 때 아이들을 묵사발로 만들어 놓은 두 딸에게서, 그는 레슬링의 재능을 엿본다. 그때부터 딸들을 레슬링 선수로 키우기 위한 그의 특훈이 시작된다.



  스포츠 영화로서 예측 가능하게 흘러간다. 실존 인물을 모티프로 한 데다가 메인 포스터에 "최초의 여성 레슬링 금메달 감동 실화"라고 되어 있으니 사실상 결말을 알고 보는 셈이기도 하다. 스포츠 영화를 자주 보는 편이 아닌 나조차도 영화에 나오는 각각의 승부는 물론 기술까지 '아 이쯤에서 뭐가 어떻게 되겠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클리셰가 클리셰인 데에는 이유가 있다. 예측 가능하다 해서 그 장면이 흥미롭지 않다는 건 아니다. 스포츠에는 늘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매력이 있고, 레슬링을 전혀 모르고도 흥미진진하게 보았다.


  게다가 <당갈>은 스포츠 영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아미르 칸이 누구인가. 그는 <세 얼간이>에서 과열된 교육 현장을 향해 정말 공부다운 공부를 하자고 일갈했고, <지상의 별처럼>을 통해서는 부모 생각과 달라도 모든 아이는 그 자체로 소중하니 각자의 행복한 삶을 빚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자는 메시지를 전달했으며, <피케>에서는 불가침의 영역이었던 종교에 화살을 날렸다. 이번에는 인도 구석구석에 있는 여자아이들을 일으켜 세운다. 그래서 특히나 세심하게 신경 쓴 흔적이 보인다. 여느 때보다 단호한 표정 일색인 이번 영화에서도 그는 가슴 따뜻한 눈물을 보여준다. 나는 아미르 칸이 눈물 흘리는 장면들을 좋아한다. 참 좋은 사람, 참 좋은 배우, 참 좋은 제작자다. 이런 메시지를 계몽적으로 외치게 아니라, 즐겁게 웃고 애틋하게 울면서 전한다는 데서 더더욱.


아미르 칸(Aamir Khan, 1965~, 인도 배우/영화 제작자)


  그는 이번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아니라 한 걸음 물러선 자리에서 딸들을 레슬링 선수로 키우면서 세상의 성 차별에 펀치를 날리려 한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특훈에 들어선 두 딸, 기타와 바비타에게 이 상황은 벌이라고 느껴질 뿐이다. 새벽에 일어나 체력 단련을 하고, 체격을 키우기 위해 정제버터를 한 컵씩 마시고, 여자아이로서 해본 적이 없는 일들을 하나씩 하게 된다. 여성이 다리를 드러내는 옷을 잘 입지 않는 인도에서, 보수적인 지역에서는 딱 달라붙는 바지마저 다리 라인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고 눈총을 받는 나라에서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는다. 종교적인 이유로 여성과 신체 접촉을 금기시하는 사람들도 있는 나라에서, 남녀가 유별한 사회에서 상대와 몸을 붙이고 하는 운동을 시킨다는 자체가 센세이션이었다. 즉 기타와 바비타가 메달리스트가 되는 건 둘째치고, 그냥 그 둘을 데리고 레슬링을 시작한다는 자체부터 이미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보다 더 어려운 건 머리를 자르는 일이다. 학교에 다니는 인도 여자아이들은 십중팔구 긴 머리를 땋아 내려 리본으로 단단히 묶는다. 단발로 자르는 일도 드문 나라에서, 이 영화에서처럼 애티를 슬슬 벗어가는 여자아이들을 데려다 더벅머리로 자르는 건 거의 구한말 단발령 수준이다. 온 동네 사람들이 괜히 미쳤다고 손가락질을 하고 비웃는 게 아니다.


  영화 속 기타와 바비타는 괴로워하면서도 그렇게 비주류의 길을 걷게 된다.  강압적으로 시키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여성에게 씌여 있는 굴레 하나를 벗겨주는 장면들이다.



  미쳤다 소리 들어 가면서, 성희롱을 대놓고 듣고도 그냥 넘기면서... 그들은 앞만 본다. 모든 금기를 깨고 그냥 달려갔다. 출전을 거부당하다가, 남자 선수를 이긴 뒤로는 대회 출전을 어렵지 않게 허락받게 된다. 서브주니어 때 체중 미달인 아이를 우격다짐으로 참가시켰지만, 눈부신 활약상을 보인 뒤로 주니어 때는 체중 미달이어도 참가 접수가 가능해졌다. 그렇게 하나씩 길을 개척해 간다. 영화의 모든 순간이, 벽에 부딪히고 그 벽을 깨는 과정이었다. 반바지를 입는 것이나 머리를 자르는, 우리 눈엔 작아 보이는 것부터 모두 다 그랬다.


  길을 처음으로 만들어 가는 이들의 걸음은 조금 거칠고 과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강압적으로 보이는 장면조차 실은 굴레를 벗기는 모습이었다. 아이들의 친구(기타와 같은 반에서 공부하던 친구)는, 너무 어리고 어두운 얼굴로 결혼식을 올리며 말한다. "그래도 너희 아버지는 너희를 자식으로 생각해서, 강압적일지언정 너희를 위한 방향으로 데려가고 있는  아니냐".  나아가 영화가 하고 싶은 말을 직설적으로 한다. 인도에서는 딸을 낳으면 집안일과 요리만 가르쳐 짐짝 처분하듯 시집 보내 버릴 뿐이라고.


  요리하고, 아이를 키우고, 집안일을 돌보는 건 분명 우리 삶에 필요한 일이겠지만... 스스로 선택해서 집안일을 하고 육아를 하는 게 아니라, 그런 선택권부터 배제당한 여자들의 입장에서는 그런 말이 듣고 싶을까. 이 말은 집안일하는 여성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집안일밖에 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를 거부하는 말이다.


  실제로 훗날 결승전을 앞둔 밤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전략을 묻는 딸에게 이야기한다. 기억에 남는 경기를 해야 한다고.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은 "금메달만이 기억되고 은메달은 잊힌다" 따위가 아니다. 여성을 열등하다고 여기는 수많은 이들과 싸우는 경기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내일 네가 이기는 건 너 혼자 이기는 게 아니라 그런 수백만의 사람들과 함께 이기는 것이라고.


혼자 이기는 게 아니라 그런 수백만 명의 사람과 함께 이기는 것이라고.


  인도가 여성의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사실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예전에 북인도의 한 고아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고아원에는 여자아이들뿐이었고 원장은 힌두교도였는데, 당시 그 원장이 말해주었다. 힌두교에서는 아들이야말로 그 부모를 천국에 데려다줄 수 있는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딸을 낳으면 버리는 일이 많다고, 여기는 그렇게 버려진 여자아이들과 함께 사는 집이라고. 힌두교의 교리란 사람마다 제각각이어서 그 말이 꼭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다. 딸이 결혼할 때는 지참금을 내야만 하는 것이라든지, 아들만큼 사회 진출이 쉽지 않다든지 여러 다른 이유들도 한몫했을 것이다. 아무튼 힌두교도가 말한 것이니 없는 얘기는 아닌 셈이다.


  사회 곳곳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기회를 박탈당하거나 유리천장에 부딪히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태생 직후 부모의 손에 버려지기까지 한다. 아미르 칸의 대사를 보면 이 영화 제작자들은 그런 여성들과 함께 일어서는 것, 그런 여성들을 일으키고 그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것까지가 이 영화의 역할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전투', 엔드 존에는 기타 혼자 들어간다. 아버지 없이도 굳건히 서는, 스스로의 힘으로 이겨내는 기타를 보여줘야 했기 때문이다. 굳이 실제로는 없었던 코치와의 갈등을, 조금 무리하다 싶은 설정으로까지 만들어가며 보여주고자 한 건 기타 한 명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 내내 영화는 사촌오빠 옴카르의 목소리를 내레이션으로 활용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태어나는 초반을 제외하면 영화는 옴카르의 시선으로 상황을 담고 있지 않다. 진중한 아버지, 그 아래서 같이 눈을 홉뜬 기타와 바비타의 무게를 조절하며 영화의 사소한 재미를 더하는 '감초' 캐릭터다. 더 나아가 그는 영화에서 주로 여성이 맡던 역할들을 기타, 바비타와 맞바꾸었다. 발리우드 영화 속 군무조차 여성의 춤과 남성의 춤이 선명하게 나뉘어 있는데, 기타가 콧수염을 붙이고 남성의 춤을 출 때 옴카르는 스카프를 두르고 여성의 춤을 춘다. 기타와 바비타를 위해 요리를 하고, 아버지가 선수촌 근처로 갈 때 자기가 집안일을 할 테니 데려가 달라고 조르는 것도 보통은 여성 캐릭터의 몫이었다. 이 영화는 철저하게 성 고정 관념을 부수기로 작정한 영화라는 걸 알 수 있다.


  이렇게 성 고정관념을 박살내는 걸 두려워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변화는 안주해왔던 무언가를 박살내는 과정이니 편치만은 않은 게 당연하다. 그러나 이러한 메시지는 궁극적으로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자유롭게 만들 것이다. 옴카르의 남성성이 훼손된 게 아니라 더 풍성해졌듯이.



  만약 어린 날의 내가 이런 영화를 두어 편만 봤더라면 아마 나는 지금보다 체력이 좋은 사람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 내가 몸 놀리는 데 재능이 없다는 이유로 운동과 거리가 먼 삶만을 살지는 않았을 테니까.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의 폭풍이 되어 여기저기 묵사발 만들고 다니는 사람은 못 되었겠지만, 최소한 굳고 단단하며 강한 여성상을 동경하는 마음에 하다못해 줄넘기를 해도 하나 더 했겠지. 그래서 나는 이런 영화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아미르 칸 프로덕션에서 또 한 편의 멋진 영화가 나왔다. <당갈>에서 기타 아역을 맡았던 배우 자이라 와심이 인시아라는 이름으로 다시 주연을 맡았다. 기타 치고 노래하는 걸 좋아하는 인시아는 할머니, 부모님과 아직 어린 남동생 구두와 살고 있다. 집안에 들어서면서부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강압적인 아버지, 그 곁에서 숨도 조심조심 쉬면서 살아온 어머니, 이를 체념으로 받아들이고 침묵하는 할머니 아래서 노래라는 꿈은 감히 펼칠 수 없는 것이었다. 유튜브에 노래를 올리고 싶다는 인시아에게, 어머니는 노트북을 마련해주고 무슬림 여성들이 입는 차도르로 얼굴을 덮으면 아빠가 모를 것이라는 아이디어까지 내준다. 인시아의 노래는 그렇게 세상에 알려진다.



 그러나 학교도 가야 하고, 공부도 해야 하고, 아버지는 10학년만 마치면 인시아를 시집 보내 버릴 생각인 와중에 노래에만 집중할 수 있을 리 없다. 일련의 사건들로 이제 노래를 포기하려는 인시아에게 어느 날 러브콜이 도착한다. 한때는 좋은 노래를 만들던, 그러나 이제는 그냥 화려하기만 하고 알맹이 없는 노래만 만들며 유명세만 탕진하고 있는 가수 샥티 쿠마르에게서. 전에 없이 주책 맞고, 보고 있으면 "으..." 소리가 나는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아미르 칸은 <당갈>에서보다 한 걸음 더 물러서, 주인공에게 스포트라이트를 집중시킨다.


 

  인시아는 노래로, 강단으로, 자신을 둘러싼 세상과 맞선다. 정확히는 아버지로 대표되는 관습에 맞선다. 샥티 쿠마르뿐 아니라 학교 친구 친딴, 사랑하면서도 안쓰러워 하는 대상인 엄마, 동생 구두, 할머니까지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자라나면서 인시아는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나간다. 인시아는 제 목소리와 노래를 찾는 데 그치지 않고, 가족 안에서 또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는 데까지 이른다.


  <시크릿 슈퍼스타>는 착한 영화다. 무리수를 써서라도 해피엔딩을 보는 발리우드에서 온, 게다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한 영화다. 그럼에도 인시아의 길은 <당갈> 기타의 길에 비하면 괜시리 불안하고 조마조마하다. 아버지의 두툼한 팔뚝이 뒤에 버티고 있었던 기타와 바비타에 비해, 어머니조차 자신이 지켜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고 혼자만의 계획을 진행하는 인시아에게 세상은 너무 거대하고 인습은 너무 잔인하니까. 여성 인권이란 뉴스나 조약문에 들어가는 단어 이전에 이런 한 명 한 명의 삶이다.

  


 인시아의 길에는 뒷바라지는커녕 가정 폭력과 조혼을 들이미는 아버지가,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숨 막히는 집안 분위기가 있지만 조력자도 있다. 특히 학교 친구와 남동생은 <당갈>의 옴카르보다 더 적극적으로 전통적인 '남성' 캐릭터의 반대 선상에 서는데, 이는 다음 세대에 대한 희망으로 남는다.


  인도는 이미 변하기 시작했다. 충격적인 사건들이 여전히 곳곳에서 일어나긴 하지만, 그 앞에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도 일어나고 있다. 무엇보다 여자아이들이 일어서고 있다. 호신술을 배우고, 조혼이나 사회적 인식에 맞서 될 수 있는 대로 끝까지 교육을 받겠다고 강단 있게 말하는 아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이제 선택은 변화하거나 아니면 변화에 끌려가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이후는 달라질 것이다. <당갈>과 <시크릿 슈퍼스타>는 이미 그 시작을 보여주고 있가.


 변화에 익숙한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이런 영화들이 우리에게 보여줬듯 우리는 씩씩하게 앞으로 가면 된다. 길이 없으면 만들어 가자. 내일에게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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